1장
지나친 노동량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3.6×3.6m에 달하는 커다란 모형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그 상태를 보고 복원 전문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예상보다 훨씬 나쁜 상태였다. 70년 동안 빛, 습기, 공기에 노출되었던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그랬다. 거기에 더해 녹색의 조경 부분 및 주택과 건물을 나타내는 조그만 붉은 상자들 위에는 먼지가 잔뜩 덮여 있었다. 이 기념비적 미래 구상 작품은 나무, 페인트, 판지,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젖은 스펀지로 먼지를 조심스레 ‘들어내야’ 했다. 스펀지에 수분이 너무 많으면 지붕이 내려앉거나 도로가 지도에서 닦여 나갈 테니, 힘든 작업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뉴욕 현대미술관 복원가들은 이 낡은 모형을 1935년 4월 록펠러센터에서 처음 전시됐던 옛날 사진들과 비교해봤다. 모형 속 건물들이 이리저리 옮겨지고 방향이 바뀐 것으로 봐서, 모형을 만든 사람이 좀처럼 완성했다고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건축가가 자신의 미래 전망을 구현하면서 자주 변덕을 부린 것이다. 현실의 벽에 부닥치거나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꿈으로 남겠다 싶은 걱정이 들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2014년, 복원 작업을 마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브로드에이커 시티〉 3차원 모형이 뉴욕에 다시 전시되었다. 미국 도시의 미래에 대한 가장 뛰어난 비전 중 하나인 이 모형에 담긴 사상을 탐구하고 성찰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곧이어 그들은 이 미래주의적 몽상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할까? 그리고 어디로 일하러 갈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조그맣고 표준적인 주택들에는 모두 과하게 큰 정원이 딸려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텃밭임을 알 수 있다. 미래에는 텃밭에서 먹을 걸 마련한다고? 녹색혁명은 어디로 갔지? 현대에 값싼 당근과 저렴한 가공식품을 선사한 농업의 기계화는 어떻게 된 걸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의 미래 전망은 그저 과거로의 비약적 뒷걸음질일 뿐인 걸까?
현대인의 시각으로 〈브로드에이커 시티〉를 한눈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일단 개념 자체가 난감하다. 라이트의 미래 도시에 대한 전망은 오늘날과는 꽤 사고방식이 달랐던 시대의 산물이고 우리가 아는 현재와 전혀 닮지 않은 미래를 그린 작품이었다. 아직 우리에게는 〈브로드에이커 시티〉와 같은 시대에 발표된 거의 모든 미래 전망에 등장했던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없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 기대했던, 꽤 근본적인 삶의 변화 역시 실현되지 않았다.
1930년 프린스턴 대학교 강의에서 라이트는 미래 도시를 풍부한 공간과 여유 시간이 있는 곳으로 전망했다. 일과 사생활이 엄격히 분리되고 “노동자들은 오전 10시에 도시로 몰려왔다가 오후 4시면 쫙 빠져나갈” 것이다. 일주일에 사흘만 그렇게 일하고 나머지 4일은 〈브로드에이커 시티〉에서 정원을 돌보며, 삶을 즐기고 자연과 교감한다.
라이트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건축가일 것이다. 독특하고 풍부한 아이디어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작품 중에서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가장 유별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미래 예측을 꽤 잘 대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텃밭이 딸린 목가적인 미래 주거지에 대한 발상이 유행했기에 라이트의 구상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그런 미래는 불가피해 보였다. 고층 빌딩이 들어선 대도시의 품위 없는 환경에 등을 돌린 최초의 건축계획이 〈브로드에이커 시티〉였을 수도 있지만, 짧은 노동시간과 풍부한 여가라는 미래 삶에 대한 전망 자체는 독창적인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미래에 대한 일반적인 추측이었다.
정리하자면, 과거의 영광을 복원시킨 이 먼지투성이 모형은 활기차고 역동적인 미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만 그렇게 보았던 것은 아니다.
넘치는 여유 시간을
걱정하는 사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처럼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시 자기 분야에서 거인이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지성과 영향력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아직도 그의 이름은 경제학 이론과 더 실용적인 정치적 이슈를 토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케인스에게도 자기만의 〈브로드에이커 시티〉, 즉 미래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전망이 있었다. 이것은 라이트와 같은 시대의 산물이었다.
라이트가 프린스턴 연단에 섰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케인스는 마드리드 무대에 섰다. 그는 더 큰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미래 문제를 다루는 자리에 연사로 초청되었는데, 여기서 제시된 케인스의 전망은 오늘날 우리에게 라이트 못지않은 잘못된 예측으로 보인다. 그는 미래에 여시가 간이 너무 많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들이 뭐라든 간에 경제학 역시 정치, 소망, 억측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 마드리드 강연은 “더 이상 큰 전쟁도 엄청난 인구 증가도” 없을 거라는 가정하에서, 케인스 나름의 예측에 의한 명확하고 당연한 결과였다. 이 강연은 그의 논문 「우리 손주들을 위한 경제학적 예측」에 정리돼 있다. 이 논문에서 케인스는 1930년까지의 추세에 근거해 “100년 내로 경제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거나 적어도 해결 방법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 2030년까지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이 될 것이며 그 시간조차 경제적이기보다는 인간적 필요를 반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앞으로 다가올 많은 시대에도 고대 인간의 본성은 우리 안에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며 모두 만족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케인스는 말했다.
달리 말하면, 그는 미래의 짧은 노동시간을 일종의 치료 수단으로 보았다. 또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여가 시간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 “빵을 버터 위에 얇게 펴 바르도록, 즉 여전히 필요한 노동을 최대한 넓게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고 썼다.
1930년 마드리드의 케인스는 힘든 노동으로 속죄해야 했던 성경 속 아담의 문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기술과 풍요로 노동이 불필요해진 2030년 지구에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케인스에 의하면 미래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했다. 그것은 ‘삶의 기술 그 자체’로서 사람들이 진짜 도전해야 할 문제는 그 모든 자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일 것이었다.
예상과 너무 다른
현재
1932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60세에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냈다.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단 하나의 요소를 가지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 건설을 궁리해보자는 제안이었다.
그의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촉발되었다. 러셀을 경악시킨 것은 전쟁 자체라기보다는 전쟁 기간 동안 증대한 번영이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불꽃놀이를 처음 발견한 아이들”을 연상시킬 정도의 열정으로 전쟁 기간 동안 생산력이 엄청나게 증대되었다는 것이다. 총알 제작이나 총 쏘기에 엄청난 인력이 투입되어 생산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절반 이상이 전쟁이 투입되었다가 돌아오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기존 대비 절반 이하의 노동시간으로도 같은 번영을 이룰 수 있을 듯했다. 1932년 러셀은 하루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는 안을 제시했고 당시 많은 지식인이 동의했다. 그러나 종전 이후 러셀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왜 하루 4시간 노동이 도입되지 못했을까? 러셀에 따르면 ‘노예 상태의 법칙’과 종교 때문이었다. 개신교는 노동을 그 자체로 숭배하며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로 보았다. 할 일이 적으면 어른은 술을 마시고 아이는 못된 짓에 빠지게 된다는 주장도 많았다. 러셀은 그 반대임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즉, 게으름은 개인뿐 아니라 문명사회 전체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러셀은 사람들이 집에서 놀지 않고, 굳이 일터에 나와 일하려 하는 것을 의아해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4시간 근무 후 집에 가는 사회가 더 멋진 삶을 가져올 뿐 아니라 더 고상한 문화를 낳는다고 보았다. 우리 문명의 위대한 진보, 위대한 예술 작품과 기념비적 과학 발견은 노동자들이 아닌, 여가라는 사치를 즐기는 계급에서 비롯됐다. 고대로부터 문명과 교양 있는 개인을 만들어낸 것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였다.
하지만 러셀에 의하면 1932년의 미국인들은 여가에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자기 자식들조차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문화와 교양을 즐길 시간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러셀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데도 문화와 교양을 즐길 시간을 없애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계들이 발명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노동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멍청한 짓이었다. 영원히 어리석은 짓을 할 이유는 없다.”
하루에 4시간만 일하게 되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질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러셀도 그 부분을 인정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라고 반박했다. “속 편하게 놀 수 있었던 과거의 능력이 효율성을 숭배하는 풍조에 의해 어느 정도 억제돼왔다.” 그런 이유로 자유 시간은 수동적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그 시간에 영화관이나 축구장에 가거나 라디오를 듣게 됐다. (러셀이 현대 매체의 다양화를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러셀은 이를 과도한 노동 탓으로 돌린다.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게 된 것은 일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여전히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일을 덜 하게 되면 다른 것을 추구할 여력이 더 생긴다. 예를 들어 한때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포크댄스는 모두가 즐기는 여가 활동이었으나 1932년에는 옛 추억에 지나지 않게 돼버렸다. 그런 데 쓸 시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러셀의 해답은 무엇일까? 러셀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답이라고 말했다. 교육을 늘리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말했다. 교육을 늘리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는 당시 학계가 문명과 사람들의 필요와 절연됐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러셀은, 우리의 일이 줄어들면 탐구심이 더 많아지고 공부를 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생계의 필요에 얽매이지 않아서 공부가 혁신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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