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화 정책의 전개와 갈등
1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제국주의와 『만국공법』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상품의 생산·유통·소비의 전 과정에서 대규모화를 촉진하며 거대 기업을 출현시켰다. 기계화된 공장에서는 값싼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교통이 발전하면서 상품을 유통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져 시장 규모가 점점 확대됐다. 그러나 거대 기업이 대규모 자본과 우세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독점해가는 양상도 보였다. 독점자본주의에서 성장한 자본가들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상품 단가를 낮추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또한 과잉 생산에 따른 판로를 개척해야 했으며, 잉여 자본을 소진할 새로운 투자처를 확보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새로운 원료 공급지이자 시장, 그리고 투자처로 해외에 눈을 돌렸다.
당시 유럽사회는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이 보편 가치로 부각된 상황이었다. 특히 프랑스혁명은 주권이 국민nation에게 있음을 밝힘으로써, 국민이 국가의 주체인 국민국가nation state를 탄생시켰다. 국민국가는 성직자·귀족·평민·농노 등 신분으로 구분됐던 사람들을 국민으로 포섭해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부여했다. 봉건 영주나 귀족에 예속됐던 사람들은 이제 법적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게 됐다.
한편 유럽사회에서는 소수의 자본가에게 부富가 편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부의 편중은 빈부격차를 심화시켰으며, 그에 따라 계급 및 계층 간 갈등이 표면화됐다. 국민국가는 내적 갈등과 균열을 봉합하고 국가 통합을 구현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활용했다. 비스마르크 수상은 독일의 통일 이후 설립한 공립초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는 대신 소수언어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19세기 유럽의 음악가들은 신화·역사·지리·문화를 소재로 민족·애국적 정서를 담아낸 곡을 만들었다. 유럽 국가들은 교육과 문화를 통해 모든 국민이 공통의 경험과 기억을 공유한다고 강조함으로써,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일체감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배타성을 갖기 시작했다. 해외 시장으로 진출한 독점자본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침략적 성격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국민국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한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비서구 지역으로 정치·경제적 침략을 본격화했다. 제국주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서구 국가들은 문명국을 자처하면서, 비서구 사회를 야만으로 규정했다. 인종주의를 조장해 유색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차별했다. 문명화로 인류의 진보를 달성해야 한다는 명분과 사회진화론을 앞세워 비서구 지역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한편 서구의 국제법은 서구와 비서구를 구분하는 체계 중 하나였다. 국제법은 30년간의 종교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맺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Westfälischer Friede 이후 유럽 기독교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한 공법에서 출발했다. 국제법에서 규정한 상주 사절단 파견, 무역 규정, 조약 등은 서구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 적용된 규범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서구 국제법 학자들은 비서구·비기독교 국가의 법체계에 비문명 요소가 작동한다고 판단해 국제법은 서구 기독교 국가에서만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서구식 문명화를 이루지 못한 국가에는 주권국가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결국 서구 열강은 국제법의 논리에 따라 비서구·비기독교 국가에 거주하는 자국민에게 자국법을 적용하는 치외법권을 관철시켰다.
서구의 국제법이 ‘만국공법萬國公法’으로 번역되어 동아시아에 전래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청淸은 1864년 미국 법학자 헨리 휘턴Henry Wheaton, 1785~1848의 『국제법 원리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만국공법』으로 번역 출간했다. 일본은 1868년 『국제법 원리』를 일본어로 번역했고, 조선은 한역된 청의 『만국공법』을 수용했다. 청은 『만국공법』의 속국屬國, 반주지국半主之國 논리에 주목했다. 속국·반주지국이란 한 국가에게 자주혹은 주권를 누릴 수 있도록 하되, 종주국 아래의 속국에도 지위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청은 이 논리를 근거로 조선에게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자주를 인정함과 동시에 조선이 자국의 속국임을 분명히 했다. 1876년 일본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를 통해 조선과 청국의 속방관계를 부정하고자 했다. 조선에서는 개화당開化黨을 중심으로 『만국공법』의 독립국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다. 이처럼 동아시아에는 전통적인 중화질서와 서구의 만국공법 질서가 양립하는 가운데 상호관계를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구의 침략과 중화질서의 재편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전후였다. 청은 서구 상인의 무역활동 지역을 광저우廣州로 국한했고, 특허받은 공행公行만 제한적으로 허락했다. 영국은 무역 확대를 목적으로 청에 개항開港을 요구했다. 이는 차茶의 수입 증가에 따른 대청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청이 영국의 요구를 거부하자 영국은 인도를 통해 청에 아편을 수출했고, 그 결과 청은 은화 유출에 따른 무역적자와 아편 중독자의 급증에 따른 사회적 위기에 직면했다.
1839년 청 정부는 황제의 명령으로 보내던 흠차欽差 대신 정치가 린쩌쉬林則徐, 1785~1850를 광저우로 보냈다. 린쩌쉬는 아편을 몰수하고 아편의 매매를 엄금했다. 그러자 영국은 1840년 함대를 청으로 파견해 청과 전쟁아편전쟁, 제1차 중영전쟁에 돌입했다. 영국군은 우세한 해군력으로 청군을 제압하고, 광저우를 포위했다. 결국 1842년 청은 영국과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해야 했다. 난징조약에서 청은 홍콩을 영국에 넘겼으며, 광저우와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방했다. 영국은 개항장에 영사관을 설치했고, 청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1843년 영국은 후먼조약虎門條約을 통해 청에서 치외법권영사재판권과 최혜국 대우Most favoured nation treatment 특권까지 확보했다. 영국은 난징조약과 후먼조약에 만족하지 않고, 면제품을 비롯해 영국 제품을 청에 수출하는 지역을 양쯔강 이북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