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복지 정책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흉년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구황
구황救荒은 천재지변이나 기근 등으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현물을 지급하는 정책입니다. 정책 목표도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함’에 있죠. 지금 보면 굉장히 소박해 보이는 목표지만, 이 목표는 전근대의 어떤 나라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이상적 상태’였습니다. 사실 전 국민이 ‘농사 코인’에 올인하도록 국가 역량을 총동원했는데도 먹을 게 부족하다면, 국가 설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철학적인 이유로든, 정치적인 이유로든, 조선은 구황 정책을 메인 프로젝트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은 구황 정책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집행했습니다. 진휼賑恤과 무료 급식소 사업, 환곡還穀입니다. 이 세 가지 정책은 사안에 따라 복합적으로 집행되었지만, 이해하기 쉽게 구분하여 짚어보고자 합니다.
긴급 재난지원금: 진휼
진휼이란 천재지변이나 기근이 발생했을 때 해당 지역의 사람들에게 곡식 등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재난지원금이죠.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천재지변 앞에서 인간은 그저 무력해지고 맙니다. 날씨 예측과 재난을 대비하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어려웠던 조선 사람들은 천재지변을 더욱 크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천재지변의 피해를 피부로 느꼈을 것은 물론이고요. 실제로 무수히 많이 남아 있는 천재지변 기록은 마치 조선을 ‘이불 밖은 위험한’ 시절처럼 여기게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진휼’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2,949건의 기사가 검색됩니다. 특히 복지 정책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195건, 영조382건, 정조268건 재위기, 그리고 역대급 대기근이 있었던 현종403건, 숙종407건 재위기는 진휼이 국책 사업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었죠. 진휼과 비슷한 ‘구민救民’ ‘구제救濟’ ‘진제賑濟’ 등으로 검색하면 기사의 양은 더 늘어납니다.
조선은 정말로 진휼에 진심이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천재지변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서, 또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관리들에게 진휼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업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진휼 담당관인 진휼사賑恤使와 담당 부처 진휼청賑恤廳의 권한은 막강했죠. 진휼청 조직 구성만 봐도 그들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나라의 곳간을 책임지는 호조판서, 인사권을 책임지는 이조판서, 군량미 책임자인 병조판서, 오늘날로 치면 장관급이 되는 인사 세 명이 함께 일했으니까요. 진휼청의 중요 사안은 국무회의에서 가장 급선무로 처리되었습니다. 여기에 수령을 비롯한 각 공무원에 대한 징계권까지 갖춘, ‘전천후 재난재해 컨트롤타워’였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휼 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역대급 재난이 불어닥쳤던 시기들의 진휼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1445년세종 27년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조정은 진휼에 전력을 다하여 217,000세대에 2,738,000석의 곡식을 무상 지급했습니다. 매우 보수적으로 한 가족을 4인으로만 잡아도 약 80만 명이 혜택을 받았음을 알 수 있죠. 1400년대 조선 인구가 580만여 명으로 추정됨을 감안하면, 인구의 13% 이상이 재난지원금을 통해 아사餓死를 피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1795년정조 19년에는 5,585,928명에게 330,596석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총인구 730만여 명 중 5% 정도가 혜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당 부분 추정이지만, 곡물 무상 지급으로 생명의 위기를 벗어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의 진휼 정책은 체제 안정을 위한 최후의 필살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자유 낙하하던 19세기에도 진휼 기록은 무수히 많습니다. 진휼이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조선의 백성 중 누군가가 ‘고려 말 시즌 2’를 보여주지 않았을까요?
구황청, 진휼청, 선혜청
국가가 직접 전국의 창고를 운영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비상 상황 대비입니다. 흉년이나 천재지변, 혹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곡식을 비축하는 거죠. 두 번째는 곡물 가격 조정입니다. 곡물 가격이 지나치게 높을 때, 곡식을 풀어 가격 안정화를 꾀했죠.
고려 때는 의창義倉이 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세종 말엽에 백성 구제 기능만 전담하는 구황청救荒廳과 곡가穀價 조절 기능만 전담하는 상평청으로 분리됩니다. 그러나 구황청은 임시 조직으로 운영되었죠. 그러다 1525년중종 20년 심한 흉년을 계기로 설치된 진휼청이 훗날 상평청의 기능을 흡수하면서, 비상 상황 대비와 곡가 조절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거대 조직으로 발도움합니다.
한편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동법이 실시되자, 대동법 전담 부서인 선혜청宣惠廳이 설치됩니다. 선혜청은 훗날 진휼청과 상평청, 국방세와 수산세 등을 관리하는 균역청을 포괄하는, 조선 최대 재정 기관으로 발돋움합니다. 이때 선혜청의 규모는 지금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호조戶曹를 뛰어넘죠. 진휼청과 선혜청이 확대되어가는 일련의 흐름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환곡과 진휼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역사적 흐름과 궤를 같이합니다.
상평창, 의창, 사창
상평창은 동아시아에서 한漢나라 때부터 운영되었던 곡물 가격 조절 기구입니다. 곡물이 귀하면 저가로 팔고, 곡물이 흔하면 고가로 사들였죠. 농업 국가였던 조선도 곡물 가격을 조절하기 위해 상평창을 설치했지만, 재원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여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습니다. 1525년중종 20년 상평창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상평청이라는 전담 부서가 설치되는데, 곧 진휼청과 병합되어 평시에는 곡가를 관리하고 흉년에는 진휼 업무를 집행하는 기구가 되죠. 훗날에는 환곡 업무까지 담당합니다.
한편 의창과 사창은 다른 기구들보다 앞서 환곡제도를 집행하던 기구입니다. 세종은 심혈을 기울여 의창을 발족했지만, 재원 고갈로 인해 몇 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었죠. 결국 의창이 수행하던 기능 대부분을 진휼청이 흡수하였고, 의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향촌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사창은 조선조 내내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조선 성리학자의 정신적 스승 송나라의 주희朱熹, 1130~1200가 직접 사창을 운영했기 때문인데요. 조선은 주희가 말한 모든 것을 구현하고자 했지만, 유독 사창제만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저이자 운영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기에 땅 가진 이들로부터 격심한 반대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 대토지 소유자들이 다름 아닌 사대부 계층이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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