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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오래 산다’
우리는 건강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런 건강 수준은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치이다. 나의 어머니는 1932년 아일랜드 웨스트코크 지방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열 살 때 몹시 아팠는데 당시에는 의사 왕진이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부모는 너무 걱정되어 주치의를 불렀다. 의사는 15킬로미터 남짓을 운전해서 왔는데 도착할 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이를 진찰한 후 부모에게 폐렴이 걸렸다고 얘기하면서 설파피리딘을 처방하였다. 설파피리딘은 2년 전 처음 개발된 항생제로 제조사의 이름을 따서 흔히 ‘M&B’May & Baker라 불렀다. 이 약은 2차 세계대전 때 많이 사용되었으나 페니실린이 널리 보급되면서 사라졌다. 의사는 부모에게 절대 물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지시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부모가 의사의 충고를 거스르지 못해서 어미는 폐렴과 심한 갈증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어머니를 구한 것은 언니 마거릿이었다. 간호 당번을 맡은 밤에 우물에서 물을 떠서 먹인 것이다. 마거릿의 금지된 간호, 혹은 ‘M&B’의 약효, 아니면 둘 다 작용해서 어머니는 살아났다.
그러나 오빠인 빌리는 운이 나빴다. 열일곱 살에 기숙학교에서 병에 걸렸는데 체중이 빠지고 등에 통증이 있었다. 결국 귀가 조치되었고 척추결핵으로 진단받았다. 빌리는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서 수백 명의 다른 소년들과 밀접하게 생활했는데, 그중 여러 명이 틀림없이 결핵에 걸렸을 것이다. 음식은 감옥처럼 배급제로 제공되었고, 전쟁 때는 특히 사정이 안 좋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만성적인 영양결핍 상태에서 감염에 더 취약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결핵에 효과적인 약이 없었다. 부모는 아들의 병이 많이 진행되어 치료가 불가능하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머니가 집에서 아들을 간호했고 동네 아줌마들이 집안일과 애들 돌보는 일을 도와주었다. 결국 빌리 삼촌은 1946년 열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몇 년 전에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간 누나 줄리아는 수녀원의 허락을 받지 못해 동생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줄리아 이모는 내가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결핵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걸쳐 아일랜드에서는 재난이었다. 극작가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아버지 윌리엄은 인구통계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일랜드에서 1931~41년 사이에 전체 사망자의 11.4퍼센트전체 1,187,374명의 사망자 중 135,590명가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결핵은 가난이나 영양실조와 관련이 있어서 환자에게 사회적 낙인이 찍혔고 ‘쇠퇴’나 ‘연약함’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낙인효과가 너무 커서 결핵 환자의 가족들은 환자를 숨기기도 했다. 빌리 삼촌이 사망하고 2년 후에 노엘 브라운이라는 젊은 의사가 아일랜드 연립정부의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라운은 결핵에 대한 집단 검진과 함께 BCG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브라운의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서 결핵 사망률은 1947년 인구 10만 명당 123명에서 1951년에는 73명으로 줄어들었다. 브라운은 결핵요양병원도 몇 개 지었다. 결핵요양원은 유럽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활발히 운영되었는데, 토마스 만의 『마魔의 산』이라는 소설의 무대도 스위스의 결핵요양원이다. 요양원에서는 휴식과 함께 맑은 공기와 햇볕, 그리고 대구 간유 같은 영양보충제를 제공했다. 이런 치료로 일부는 회복되었으나 대부분은 사망하였다. 폐결핵 환자에게 다양한 외과적 시술도 시행했는데, 그 가운데는 기흉을 만들어 폐를 짜부라뜨려서 폐를 ‘쉬게’ 하거나 횡경막 신경을 마비시켜 폐를 역시 ‘쉬게’ 하고, 아니면 감염된 폐 일부를 절제하는 시술도 있었다. 이러한 치료들은 효과가 의심스러웠지만 지금도 수술 치료를 받고 살아남은 노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빌리 삼촌이 사망한 즈음 미국에서는 스트렙토마이신이 결핵 치료제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영국 제약회사들이 이 약을 생산하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48년 영국에서는 거의 최초로 이 약을 써서 결핵 치료를 받았다. 그는 『옵서버』지 편집인인 데이비드 애스터, 보건부 장관 어나이린 배번 등과의 친분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스트렙토마이신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동물농장』의 저작권료가 약값으로 지급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지 오웰은 스트렙토마이신에 반응하지 않았고 심한 부작용을 겪었다. 그는 남은 약을 자신이 치료받던 글래스고 인근의 헤어마이어스 병원에 기증했다. 두 명의 의사 부인이 이 약을 복용하고 완치되었다.
(중략)
나는 의학의 황금시대가 끝나갈 무렵인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의학을 공부했다. 이때 의학의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위대한 비판자는 이반 일리치1926~2002였다. 일리치는 오스트리아 출신 사제이자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이다. 1975년 출간된 그의 책 『의료의 한계』Limits to Medicine, 원제 ‘의학의 복수 Medical Nemesis’는 “의료 제도가 건강에 주요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유명한 경고로 시작하고 있는데, 당시 내게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1970년대 지성계의 슈퍼스타였던 그는 지금 거의 잊혀졌다. 그의 핵심 주제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가 서구문명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현대의 제도는 일리치가 지적한 대로 ‘역생산성’counterproductivity이라는 역설적 특징을 띠고 있는데, 이 말은 제도를 통해 원래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를 제도 자체가 좌절시킨다는 뜻이다. 공교육이 사람들을 무지로 이끌고, 현대 운송체계가 오히려 교통마비와 환경 문제를 초래하며, 보건의료가 사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1970~75년 사이에 출간한 일련의 책들, 『학교 없는 사회』, 『공생공락의 도구』, 그리고 가장 유명하게는 『의료의 한계』에서 이 문제들을 정교하게 다루었다. 10개 국어를 하는 걸출한 학자가 대학에 나타나면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1978년 더블린대학교 강연에는 무려 8천 명의 청중이 모였다. 나중에 『영국의학저널』British Medical Journal, BMJ 편집인이 된 리처드 스미스라는 의대생도 1974년 에든버러에서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는데, 당시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이반 일리치의 강연을 들었을 때 종교적 체험 같은 전율을 느꼈다. 카리스마 넘치고 열정적인 일리치가 에든버러의 화석 같은 교수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일리치는 학문으로서 의학은 인구집단의 전반적 건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역학자疫學者인 토머스 매키언이 주장한 바와도 통하는 것으로, 그는 위생, 영양, 주택이 건강에 더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매키언은 의사들이 건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일리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사들이 위험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일리치는 제도화된 현대 의학이 자체의 의식儀式과 교리를 갖춘 새로운 종교가 되었고 의사들은 새로운 사제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의사들의 독점과 지배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현대 의학이 건강을 해치고 있다. 의학이 건강을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제도로 조직되었고 치료한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아프게 만든다.
실로 사람을 흥분시키는 말이었다. 일리치는 추종자들이 많았는데 그중 존 브래드쇼라는 영국 의사는 작가가 되기 위해 의학을 포기했다. 브래드쇼가 1978년에 쓴 『시험대에 선 의사들』Doctors on Trial은 일리치에게 헌정한 책으로 『의료의 한계』의 주장을 재차 강조한 내용이었고, 서문도 일리치가 썼다. 브래드쇼는 일리치를 가리킬 때 ‘예언자’라는 말을 종종 썼고, 자신을 다소 난해한 일리치 이론의 해설자로 생각했다. 마치 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처럼 말이다. 브래드쇼는 1981년 우리 대학에서 있었던 토론회에 연사로 와서, 의학이 건강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일리치의 주장을 소개했다. 토론은 매우 소란스러웠는데, 몇몇 의사들은 일리치와 브래드쇼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폄하하고 심지어 ‘아픈 사람’이라고 깔아뭉개기까지 하면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나는 교내 술집에서 브래드쇼를 발견하고는 우리들의 영웅인 이반 일리치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논쟁에 취해서인지 맥주에 취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 건강에 위협이 되는 직업을 위해 수련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 의구심이 들었다.
의학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그 어떤 전문직보다 더 완전히 지배한다. 졸업 후에 나는 과도한 직무에 소모되었다. 몇 년 동안 내 삶은 주말 당직과 졸업 후 시험으로 점철되었다. 나는 항상 눈앞만 바라보았다. 다음 업무, 다음 자격시험…. 여러 해 동안 이런 삶의 방식과 생각을 받아들이며 살았다. 물론 이런 삶이 무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의료 분야의 커리어 체계와 이 직종에서 성공하기 위해 거쳐야 할 것들이 너무나 견고하고 명확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경력을 쌓으려는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다양한 수련과정을 거쳐 영국 국가보건서비스 수련병원의 전문의에 이르는 사다리를 천천히 올라갔다. 젊은 전문의로서 나는 바리새인 같은 존재, 즉 제도와 전문가 문화의 대리인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40세 때 종신 근무를 보장받았고 남은 인생 동안 잘 짜인 경로를 지속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40대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시시콜콜한 내용을 여기서 다 밝히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개인적인 일들이다. 50세가 되어 일련의 사건들을 돌이켜보고는 나 스스로가 약속된 미래를 훼방 놓은 게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다. 나의 이런 훼방 놓기는 잠재의식이 벌인 고의적 행위였겠지만, 진짜 문제는 신념을 잃은 것이었다. 일종의 자기 배신이라고 할까. 루니툰 만화영화의 주인공 ‘코요테’는 허공을 잘 달리다가도 믿음을 잃는 즉시 협곡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상황을 모르는 동안에는 공중에 잘 떠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배신이 임상 현장이나 예전부터 해오던 환자 진료에까지 미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 즉 의학연구, 관리통제주의, 의료지침, 정량지표에 대한 믿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진보에 대한 믿음마저 잃게 되었다. 나는 의료가 과잉 산업화되었고 건강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이반 일리치의 주장 ― 1970년대 중반의 많은 의사들에게는 바보 같아 보였던 주장 ― 이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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