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주 오래된 신화
“‘이치를 따져 말하는 일’hoi logoi만으로 사람이 유덕하게 될 수 있다면 (…) 말하는 일에 많은 보상과 큰 보상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하듯이 (…) ‘이치를 따져 말하는 일’만으로는 많은 사람을 격려하여 고상함과 좋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윤』 X 10, 1179b4-10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2018년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가 피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한다. 얼마 뒤 정부는 탄핵을 당해 물러난 직전 정부가 2015년 일본과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결정을 발표한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정상화 조치의 일환이었다. 이에 일본은 2019년 7월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취함으로써 반격을 가한다. 대일 의존도가 높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필수적인 3개 품목의 수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응방침이 알려지자 국내 시민사회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다. 그러자 언론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감정적 대응’으로 간주, 기사는 물론이고 사설, ‘석학’의 특별기고, 지명도 높은 논객의 칼럼 등을 동원하여 훈계조의 논평을 대량으로 쏟아낸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감정적 대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매체와 필자는 달라도 하는 소리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같은, 감정에 적대적인 논조에 그 어떤 반론도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다들 무언중에 맞는 소리라고 수긍해서였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한다.
감정적 대응 운운하며 말을 에둘러 하지만 골자는 의외로 간단하다.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 이 한마디로 모든 게 집약된다. 분노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거다. 아니, 화가 나는데 화를 내지 말라니 가당키나 한 소린가. 목이 마르더라도 물을 찾지 말고 참아라, 가렵더라도 긁지 말고 견뎌라, 울음이 나오더라도 울지 말고 꾹꾹 눌러라, 이와 뭐가 다른가. 어불성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난센스다.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는 것은 생리적 현상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더라도 분출시키지 말고 틀어막으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연에 역행하는 처사다. 여론의 탈을 쓴 자기기만적 궤변이다. 대체 감정이 무엇이기에 이러는 것일까.
감정신화,
아주 오래된
감정이 신뢰할 수 없는 말썽꾸러기로 다뤄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성 우위의 사고로 점철된 서양철학의 역사가 곧 감정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역사였다. 진득하지 못하고 충동적이다, 이랬다 저랬다 한다, 이성이 옳다고 판단한 것을 왕왕 뒤집어버린다, 믿을 수 없고 합리적이지 않다, 제멋대로여서 통제가 안 된다, 언제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안 된다, 파괴적이다, 맹목적이다, 천박하다, 이 모두가 감정에 붙여진 꼬리표이다.
이 같은 감정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은 이성이다. 감정과 정반대되는 징표를 열거하면 죄다 이성에 들어맞는다. 믿음직스럽다, 한결같다, 냉철하다, 세련되었다, 앞을 내다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삶을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삶을 영위함이 마땅하다.)
이성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주는 유일한 징표이다. 심지어 인간적 세계를 뛰어넘어 신적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널리 퍼져 있는 이성을 보는 보편적 시각이다. 여기서 한번 되짚어보자, 과연 그런지. 유감스럽게도 그 허구성을 찾아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한두 사례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임이 단박에 드러난다. 그래, 이성은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항상 믿음직스럽기만 하던가. 거짓을 말하지는 않던가. 냉철하기만 하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유구한 인류 역사가 웅변으로 증언하다. 인류 역사에서 금수만도 못한 만행의 많은 귀책사유가 이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이 세계에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 역시 많은 부분은 이성이 자초한 결과이자 이성의 무능과 역부족을 반증하는 반례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이성, 만능도 만물박사도 아니다. 실수도 잦고 할 수 없는 일도 부지기수로 많다.
이성을 보는 긍정적 시각이 그러하듯, 감정을 보는 부정적 시각 역시 허구다. 이성을 부각시킬 요량으로, 고의로 평가 절하한 이데올로기적 혐의가 짙다. 허구적이라는 의미에서 감정에 대한 경멸적 내지 적대적 시각은 ‘신화’이다. 철학자들이 감정에 그런 덧칠을 하여 왜곡한 것일 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감정신화 역시 지어낸 이야기이고 인간의 자아상 구축을 위해 편파적으로 각색한 것일 뿐이다.
‘사려분별’프로네시스, 실천프락시스의
영역을 관장하는 이성
이성이 하는 일을 보통 한 가지인 것처럼 뭉뚱그려 사고라고 칭하지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이론적 사고누스/디아노이아와 실천적 사고프로네시스, 이차 ‘사려분별’이라 칭함가 그것이다. 전자를 특징짓는 표현으로는 보편적이다, 필연적이다, 불변적이다, 무차별적이다,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다, 법칙과 원리로 정식화할 수 있다, 등을 들 수 있다. 그것의 대상이 그러하기에 그런 대상을 인식하는 이성 역시 그렇게 특징짓는다. 그러면 사려분별은 어떤가. 그 역시 이성적이다. 동시에 특수하고 개연적이다. 예외 없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십중팔구 그렇다는 뜻이다. 그뿐이 아니다. 규칙을 세울 수 없지는 않지만 예외적인 경우 역시 허다하다. 사려분별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이론적 사고는 무균실에 들어앉아 증류수를 양식으로 삼는, 핏기 없는, 해쓱한 얼굴의 책상물림이 하는 일이라면, 사려분별은 항해 중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외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선박 내의 갖가지 문제를 한배를 탄 동승자들과 함께 가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동원하여 해결해가면서 목표지점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의, 혈기왕성한 근육질의, 땀내 나는 악전고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후자의 경우, 대체로 들어맞는 규칙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도 만만치 않게 넓다. 이론적 사고는 우리가 자연세계, 물리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계절의 순환이나 중력의 작용 등이 비근한 예이다. 수의 계산 같은 것도 같은 분류에 속한다. 해법이 명확하게 일의적으로 정해져 있다. 누가 풀더라도 답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 정답이 아니면 오답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사는 그렇지 않다. 정답이 없다. 답도 여럿이어서 가장 나아 보이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책임이 따르는 결단의 문제이다.
인간의 조건,
재앙이자
이론적 사고가 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불변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면 사려분별은 인간사, 인간의 삶의 물음을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사의 특징은 가변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하면 ‘다른 식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흔히들 말한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고. 큰 틀에서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똑같은 것 하나도 없는 게 인간사이다. 요컨대 큰 규모로 보면 대동소이하지만 딱히 정해진 답이 없다. 정치적 사안을 비롯하여 외교적 현안, 각종 사회적 다툼거리가 다 그렇다. 모두가 ‘일리’ 있는 의견일 뿐,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 유일성을 내세울 정답이랄 것이 없다. 이 말도 일리 있어 보이고 저 말도 일리 있어 보인다.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이해 당사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궁구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숙고(하다)’bouleusis, prohairesis가 바로 그것이거니와, 실천적 사고, 사려분별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여러 가능한 옵션 가운데서 숙고 끝에 단안을 내려 결론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정적인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것이 해결책으로 작동하는 동안만 해결책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유효기간의 길고 짧음만 있을 뿐, 인간사에는 결정적, 최종적, 영구적 해결책 같은 것은 없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삶의) 조건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해결을 요하는 문제의 빈발은 한편으로는 커다란 부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살맛나는 일이기도 하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