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종말론자의 두려움 극복 프로젝트
모든 것은 할머니의 방수 식탁보와 함께 시작되었다. 물로 닦아낼 수 있는 그 하얀 식탁보는 닳고 닳은 나무 식탁 위에 깔려 있었다. 식탁에는 치즈케이크, 바닐라롤빵, 스웨덴식 사과파이, 파운드케이크, 푸딩케이크, 작은 접시에 담긴 생크림 등 부담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보온병에 담긴 필터 커피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티스푼으로 연한 자줏빛 찻잔 속에 담긴 커피를 달그락대며 젓자 설탕과 연유가 한데 섞였다. 우리는 고기말이와 경단, 사슴고기와 붉은 양배추와 콩 샐러드로 이제 막 점심을 끝낸 뒤였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늦은 오후에 든든히 먹으라고 버터 바른 빵 몇 개와 햄을 식탁에 더 차려내셨다. 온가족이 일요일에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만날 때면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우유 마시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할머니는 곧바로 우유와 함께 초콜릿과 바나나 그리고 바닐라 혹은 딸기 맛 시럽을 식탁에 올려놓으셨다. 내가 “우유 먹기 싫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할머니는 나를 행복하게 해줄 주스와 탄산음료와 시럽이 지하실에 충분한지 어떤지 걱정하는 눈치셨다. 그렇기 때문에 “괜찮아요. 아무것도 안 먹을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런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울부짖는 사슴 그림과 가족사진이 걸린 벽 아래에 앉아 정신 나간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내가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가족이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세상이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두툼한 이파리가 달린 고무나무를 찬찬히 살펴봤다. 전신 마사지 의자에 꿈꾸듯 앉아 소금램프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크루즈 여행 사진이 박힌 접시를 훑어보다가 내 시선은 왁스 처리된 식탁보가 덮인 식탁 모서리로 이동했다. 아힘 삼촌과 다정한 숙모, 마르고트 고모와 과묵한 고모부, 사촌들, 조카의 딸과 아들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들은 모두 케이크 포크를 손에 쥐고 가족의 최대 관심사인 자동차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레타, 우리가 파던 파란색 트라비 아직 생각나니?”
아버지는 이렇게 물으며 기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내 나이 채 여섯 살도 되지 않았었다. 내게 새파란 트라비트라반트 A601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만큼이나 전설이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은 탓에 나 자신의 기억이 되어버린 물건이었다. 그 둘은 현재 나의 삶과 거의 무관했다.
“그 트라비는 지붕이 검정색이었잖아요.”
대화의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내가 말했다.
“그건 우리가 가죽처럼 보이게 하려고 칠판 페인트를 바르고 솔질을 해서 그런 거야.”
아버지가 대답하셨다.
“가죽으로 된 자동차 지붕은 동독에 없었어.”
이제 아버지는 물 만난 고기마냥 신이 나셨다. 아버지는 1970년대에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어머니를 만나 자식들을 낳고 집을 넓혔다. 아버지의 힘센 두 손은 동독 생활에서 한 조각 행복을 얻어낸 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죽 지붕의 세세한 부분을 윤색해서 말하는 동안 나는 그때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회상했다. 1980년대 말에 우리는 튀링겐 주 어느 시골의 작은 집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아직 위험성이 알려지지 않았던 회색 석면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을 집이었다. 친척들과 함께 떠난 동물원 소풍도 생각났다. 동물원의 최고 볼거리는 스라소니였지만, 그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냄새만 맡았다. 트라비에 짐을 잔뜩 싣고 발트 해로 휴가를 떠난 적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1989년 이전의 모습들은 색깔이 왜곡돼 있고 윤곽이 두루뭉술하고 어슴푸레하다. 그 당시 자동차 지붕에 거친 솔로 솔질을 하던 아버지는 머잖아 트라비가 놀림감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파산선고를 받은 시스템의 대명사에 솔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동독 시절의 자동차 이야기에 끼어드셨다. 할아버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겨우 몇 달 전에 초록색 바르트부르크 스테이션왜건을 구입했다.
“20년을 기다린 끝에 얻은 차였어!”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웃으셨다. 그 목소리에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다. 1930년대 초에 보잘것없는 마구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난 할아버지에게 바르트부르크 스테이션왜건은 일종의 계시였다. 그는 어린 날과 청소년기를 지독한 가난 속에서 보냈다. 밭일을 하거나 ‘어린이 농촌 이송 작전1’에 동원되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일화들은 대개 이런 말로 끝났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어.”
‘천년 제국2’ 시절에 돼지를 쳤던 할아버지는 그 제국이 12년 후에 막을 내리고 당신의 돼지우리가 후일 바르트부르크와 토요타를 넣어두는 차고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셨다.
할아버지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증조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증조부는 운전면허증이 없었으니 자동차에 얽힌 일화도 들려줄 게 없었을 것이다. 증조부는 독일 제국 시절에 태어났지만 그 제국도 얼마 안 가 사라졌다. 세 세대가 흐르고, 세 개의 이데올로기가 명멸했고, 세 번의 붕괴가 있었다. 나는 또 다시 붕괴할 운명에 처한 시스템에 순응한 다음번 타자일까? 그 시스템에서 행복을 찾으면서도 그것이 정당성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다음번 사람일까? 나로 하여금 모든 게 옛날과 똑같으리라고 확신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내가 훗날 내 손주들과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도 풍요와 과잉과 이런 크림케이크를 선사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건재할까?
공포감으로 등골이 오싹했다. 머릿속에서는 전쟁과 테러, 경제 위기, 기후 변화, 자원 부족, 환경 파괴, 인구 변화, 비정규직화, 약탈 자본주의에 관한 뉴스를 듣고도 애써 외면했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불에 타버린 열대림, 끝없이 펼쳐진 콩밭, 녹아내리는 빙하, 기름 범벅이 된 바다표범들, 죽어 있는 바닷새 내장에서 발견된 비닐 쓰레기들이 암울한 콜라주가 되어 나타났다. 퇴근길 교통 체증에서 발생하는 소음, 대형 마트 계산대에서 규칙적으로 나는 삑삑거리는 소리, 시위자들이 내뱉는 저항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무력감이 떠올랐다. 이 모든 모습과 소리들을 나는 오랫동안 내 안에 흡수한 뒤 뇌에 있는 단단한 캡슐 속에 넣고 닫아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터져 나오면서 희미한 불안감을 방출했다. 그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 바로 이 표현을 제목으로 단 책에서 저자 클라우스 레게비와 하랄트 벨처는 왜 머잖아 세계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설득력 있는 논거들을 내놓았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위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을 잠시 흔들어 놓을 뿐 몇 가지만 바꾸면 다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 겹치고 심화되는 끝없이 많은 위기들과 맞닥뜨리고 있다. 기후 변화, 에너지 위기, 자원 부족, 인구 증가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더 큰 차원의 위기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그 위기는 250년 동안 전 세계에 걸쳐 대단히 성공적으로 유포되었던 사상의 종말을 알리고 있다. 두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승승장구했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죽음에 내몰린다. 자본주의는 보편적인 재생산 체제로 기능하지 않고 그렇게 설계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그토록 성공적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핵심 모순 때문이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무한성장이라는 전망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의 생태계는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기이하고 위험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오큐파이 운동Occupy: 점령 운동의 선구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부채, 그 첫 5,000년Debt: The First 5000 Years』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 시스템이 앞으로 한두 세대도 못 갈 거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우리 인간들이 자본주의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믿는다면 그 자본주의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임박한 종말을 부르짖는 이러한 경고들은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비판론자들은 끊임없이 탐욕이 안고 있는 자기파괴적인 논리를 경고해 왔다. 이미 1972년에 성장의 한계를 파헤친 로마클럽3은 같은 제목의 보고서에 이렇게 말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 인구와 산업화의 증가, 환경오염과 식량 생산과 천연자원의 착취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지구상에서 향후 100년 안에 절대적인 성장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예상 시점의 절반 가까이 와 있는 셈이다. 로마클럽은 1992년과 2004년과 2012년에도 통계 자료와 수치를 동원하여 매번 최신 보고서를 펴냈는데, 그 골자는 언제나 동일했다. 우리가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를 외치며 지금처럼 계속해 나간다면 상황은 머잖아 어려워질 거라고 말한다.
오랜 세월 우리는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성장 비판론자들의 논리를 외면할 수 있었다. 앎과 깨달음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차이를 가지고 버틸 수 있었다. 그것은 끔찍한 미래가 아직 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한 것은 전세계에 퍼진 종기가 터지기 시작한 때였다. 부동산 위기, 은행 위기, 경제 위기, 유로화 위기, 국가 위기, 이 모든 것들이 서구 풍요 모델의 정체성 위기라는 단 하나의 커다란 위기로 귀결되었다. 자본주의 비판론자들이 오랫동안 예언해왔던 일이 갑자기 현실로 드러나면서 과거의 찬란했던 날들은 끝난 듯이 보였다. ‘후기 로마 시대의 타락’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사회학자 마인하르트 미겔Meinhard Miegel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낭비와 과잉의 황금기’라는 말로 이 시대를 표현했다. 비대하게 뒤룩뒤룩 살이 쪄 역사의 승자가 되었던 우리는 이제 빨간 사과를 입에 물고 도살장의 작업대로 끌려가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학자들의 말이 그런 소리로 들렸다.
“그레타?” 아득히 먼 곳에서 부르는 듯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먹을래?” 할머니는 사과케이크 한 조각을 케이크서버에 올려놓고 간신히 중심을 잡고 계셨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먹을래요.” 배가 불렀다. 배가 너무너무 불렀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오래된 내 집의 육중한 나무문을 닫고 나는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내 마음이 편해지는 어딘가가 있다면 바로 여기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나의 집이고, 나를 보호하는 공간이며, 내 마음의 고향이다. 이케아 가구, 벼룩시장에서 구한 보물들, 책이 가득 든 상자 몇 개, 빈 클럽마테 병들, 벽에 그려진 틀에 박힌 그라피티, 방을 장식한 마른 들풀, 잡동사니 가득한 의류용 선반, 나의 맥북이 대기하고 있는 곳. 나는 “샤넬 백은 따로 있어요”라는 문구가 적힌 삼베 가방과 여행가방을 내려놓고 운동화를 구석에 벗어 던진 후 발코니로 나갔다. 가을 햇살이 안마당을 내리비추고 있다. 멀리서 전차가 위윙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이웃들이 1층에 있는 자전거포 문지방에 서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다. 할머니의 방수 식탁보가 깔린 식탁에서 떠올린 멸망에 관한 환상은 그저 한순간의 나약해진 정신이 만들어낸 불쾌한 상상이었을까? 불치의 종양을 지니고 병상에 누워 있는 제 모습을 그려보는 사람의 그것처럼? 평생 사랑하는 사람을 자동차 사고로 잃는 상상을 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이곳은 방수 식탁보가 덮인 식탁에서와는 모든 게 다르다. 그런데 또 그렇지가 않다. 그 거대하고 나른한 불쾌감을 이곳으로 가져온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검은 에스프레소 가루를 떠서 유리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 집을 비운 동안 쌓인 신문지 더미 위에 주저앉아 신문을 한 장 한 장 들춰본다. “전문가들, 파국으로 가는 유럽 경고”, “경기, 악화 일로”, “메르켈, ‘기후 변화는 치명적’”, “기후 변화, 기근 심화시켜”, “일상화되는 심각한 기상 상태”, “원료, 되살아나는 식량위기감”, “경기 하락, 피할 수 없어”…….
지금은 2012년 가을이다. 독일의 제1공영방송 ARD의 도이칠란트트렌드라는 프로그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독일인의 80퍼센트는 곧 최악의 유로화 위기가 닥칠 거라고 믿고 있다. 독일의 기업 경영자들이 느끼는 기업 환경을 조사하는 Ifo 연구소의 기업경영 환경지수는 같은 해에 급락했다. 그밖에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조사에 의하면 독일인은 열 명 중 한 명만이 장차 우리 아이들의 사정이 나아질 거라고 믿고 있다. 사회 구석구석으로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커다란 파열음이 터지는 데에는 사실상 불안감이라는 작은 기폭제만 있으면 된다.” 저널리스트 콘스탄틴 자입트Constantin Seibt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야인들이 인류 멸망을 그해 12월 21일로 예언했다는 기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사에는 명상의 눈빛을 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고 프랑스의 어느 마을로 가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UFO를 기다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용감한 시민들은 지하실에 벙커를 만들고 밀교도들은 시대가 바뀌기를 바라는 주문을 왼다. 갑자기 사방에서 선사시대의 기이한 달력에 대한 보도를 쏟아낸다. 카운트다운을 하고, 살아남는 법을 소개하고, 특별판 서적이 나오고, 전시회가 열리고, 전문가와 인터뷰를 하고, 서점에는 별도의 매장까지 마련되었다. 인류 멸망에 쏟아지는 관심의 이면에 대해 깊은 의혹을 품고 있지 않다면 이 모든 일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사실 서구사회의 주도권이 끝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야인들은 우리에게 세계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고대 문명이 발달하고 확산되었다가 사라졌다. 서구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나는 신문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신문을 읽는다고 불안감이 가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끝없이 밀려드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과대망상만 극대화된다. 불안감을 지우고 싶다. 하지만 어느 곳을 바라보든지 기분은 더 나빠진다. 여기 집안에 있는 것들은 풍요라는 서구 사상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를 증명할 뿐이다. 모든 게 역겹다. 찻잔 속의 커피는 부당한 방법으로 수확하고 껍질을 까서 볶은 것이다. 심지어 찻잔 속의 물도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내 앞에 놓인 책상은 할인 매장에서 사온 것이다. 하지만 그 싼 가격을 맞추기 위해 어떤 이들은 착취에 가까운 임금을 받는다. 내가 깔고 앉은 의자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 위에 우리가 앉을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바닥의 양탄자는 아마도 북아프리카 아이들이 손으로 짰을 것이다. 티셔츠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재배하고 가공한 면사로 만들었지만 나는 그걸 말도 안 되는 가격에 구입했다. 내 앞에 놓인 빵 속 소시지로 말하자면 나는 그것이 불쌍한 돼지의 어느 신체 부위에 속하는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돼지는 그 소시지가 되기 위해 잔인한 방법 앞에 목숨을 내주어야 했다. 아이팟 속에 희토류와 점점 고갈되어 가는 석유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니 내 주변의 물건들이 낯설다. 그 물건들을 샀으면서도 나는 거기에 대해 정말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 생각이 없다. 내 불안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물질적 행복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혹은 장차 어느 때인가 고통을 유발하리라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토대다. 어쩌면 당분간은 이 상황을 견딜 수 있겠지. 나 개인과는 관련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확신컨대 그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안이 될 정도로 친숙하고 정답게 보이던 것들이 지금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물건들 하나하나가, 사실들 하나하나가 모두 지금처럼 변함없을 거라고 믿는 나의 놀라운 의존성을 조용히 증명한다. 이 집에서 이런 생활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와중에 키가 제일 큰 나무 밑에 자리를 잡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피곤해진 나는 몸을 뒤로 젖힌다. 하필 이때 밴드 슈테르네가 나에게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술에 취해 불그레할 수 있냐”고 묻는다. 아이팟 헤드폰에서 프랑크 슈필커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른다. “어디서 시작됐어? 무슨 일이 일어났어? 너는 제대로 저항한 적이 없어? 똑바로 걸을 수 없어? 뭐가 잘못되었지? 상처가 가슴속 깊이 박혀 있어? 기억 안 나? 어쨌든 넌 여전히 특권을 누리잖아? 무엇이 널 이렇게 망가뜨렸어?
배낭을 꾸려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세상의 종말로부터 안전한 곳이 있기나 할까? 만일 그런 고이 있다면 나는 정말 지하 터널이나 원시림이나 사막 텐트에서 살아갈 마음이 있을까? 혹은 그곳이 어디가 됐든 기후와 경제와 돈과 평범한 생활에 대한 욕구와 상관없는 곳이 있을까?
나는 더 이상 술에 취해 불그레해지고 싶지 않다. 나는 현재 상태에서, 자본에서, 시스템에서 독립하고 싶다. 그러나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아온 대도시 아이로서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내 트렌치코트와 그 속에 있는 내 사회적 피부를 벗어놓지 않아도? 배수진을 치고 내가 만든 과대망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해도?
나는 부엌 식탁에서 마음을 굳혔다. 1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붕괴 후의 삶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익숙해진 소비 생활을 하지 않게 된다면 먹을 것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어디에서 잠을 잘 수 있는지, 스스로 무얼 만들 수 있는지,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어느 만큼인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 욕망의 수준을 낮출 수 있을까? 그 욕망을 어떻게 다른 식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시스템 이탈자, 다른 식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 괴짜, 선각자, 이상주의자 들의 세계로 내려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다. 큰 물결이 나락으로 치닫고 있다면 나는 더 이상 그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리라. 이미 그 물결을 헤치고 나온 사람들을 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기도, 접촉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서는 안 된다. 내 불안감을 떨쳐버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환영이다. 나는 닥쳐올 종말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들을 배우고 스스로 실험해 볼 것이다. 1년간의 종말 예행연습이 나를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방수 식탁보 이후의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 참고
1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에서 포탄이 떨어지는 위험한 도시의 어린이들을 수 주 혹은 수개월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으로 대피시킨 작전
2 히틀러는 자신이 수립한 나치 독일 체제를 독일 국민의 세 번째 제국이라고 부르고, 이 제국이 천년은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3 ‘지구의 유한성’이라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진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민간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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