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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화려하게 장식된 열차가 속도를 줄이면서 천천히 하얼빈 역으로 들어섰어.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하얼빈 역에는 열 맞춰 늘어선 러시아 의장대를 비롯해, 각 나라 영사들과 일본인 환영객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
‘러시아 측에서 철저히 준비한 모양이군! 이번 회담은 순조롭게 성사되겠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어. 이토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일본에도 이번 만주 방문은 매우 중요했거든.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수순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세상은 이토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하고 있었어.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땅에 야금야금 식민지를 건설해 나갔어.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끼어든 일본은 조선을 발판 삼아 만주로 뻗어나가고자 했어. 그러려면 조선을 집어삼키기 전, 만에 하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청나라나 러시아와 먼저 말을 맞춰야 했어.
이토에게는 러시아를 다독일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어.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러일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은 러시아와 만주를 나눠서 지배하기로 합의했어. 남만주는 일본이, 북만주는 러시아 세력권에 두는 식이었지.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러시아가 또 다른 전쟁을 벌이지 않을까 두려워했어.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날로 팽창하는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토의 머릿속에서는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세력을 펼칠 계획이 차근차근 그려지고 있었어. 머지않아 제 손으로 계획을 이룰 생각을 하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어. 어느새 열차는 멈췄고 이토의 눈앞에 이번 회담의 대상인 코코프체프 러시아 재무 장관이 서 있었어.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코코프체프입니다.”
“반갑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두꺼운 양탄자가 깔린 귀빈 칸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이토가 일어서서 반갑게 코코프체프를 맞았어.
“그동안 일본과 러시아가 이해관계로 충돌할 때마다 공평하고 현명하게 처리해 오신 각하를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각하를 영접할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오늘 만남이 두 나라의 친교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코코프체프도 예의를 갖춰 대답했어.
“분에 넘치는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는 정의와 공평을 존중하는 나라이기에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문제는 우리 황제 폐하의 결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안중근의 총소리
만주로 떠나기 전 이토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300여 명이나 모인 자리에서 이번 방문은 순전히 개인적인 일일 뿐 정치적인 목적은 없다고 강조했어. 통감 직위에서도 물러났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했어. 하지만 만주에서 철도를 운영하는 문제를 비롯해, 장차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필요한 여러 일들을 처리해야 했던 일본에서는 이토만한 사람이 없다고 보았지.
“조촐하지만 밖에 환영식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잠시 열차에서 내려 사람들을 만나 보시지 않겠습니까?”
약 30분간 진행된 회담을 순조롭게 마친 뒤 코코프체프가 창밖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어. 이토를 환영하는 국악대의 연주와 함께 열광적으로 그를 반기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 왔지. 계획에 없던 일이라 잠시 당황하던 이토는 이내 칼이 달린 지팡이를 꽉 움켜쥐고 열차 밖으로 걸음을 옮겼어. 지팡이뿐 아니라 잘 벼려진 단도 두 자루도 몸에 지니고 있었지. 여차하면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이토는 자신했어.
열차에서 내린 이토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늠름한 러시아 의장대 앞을 걸어갔어. 각 나라의 영사들과 인사를 마친 이토가 일본인 환영객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는 순간 날카로운 총소리가 하얼빈 아침의 찬 공기를 갈랐어.
탕! 탕! 탕!
동시에 이토의 몸이 휘청하더니,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허공에 손을 휘저었어. 지팡이에 달린 칼을 휘둘러 볼 겨를조차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어.
뒤이어 다시 세 발의 총소리가 들려 왔고 한두 걸음 앞에 있던 코코프체프가 손을 뻗어 이토를 붙잡으려 했어. 그제야 뒤따르던 일본인들이 황급히 이토를 부축해서 열차 안으로 옮겼어. 의사가 응급처치했으나 이토는 총을 맞은 지 30여 분 만인 오전 10시쯤 영원히 눈을 감았어.
난데없는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땅에 납작 엎드리거나 어디론가 달아났어. 겁에 질린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하얼빈 역은 아수라장이 되었지. 그때 의장대 뒤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어.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에 일어난 일이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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