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어떤 여자들에 대하여:
지성은 여성의 것
세상을 활보한 여자들,
그 용기에 대하여
나혜석
하야시 후미코
버지니아 울프
거의 동시대에 살다 간 이들 세 여성이 유럽 한가운데에서 옷깃을 스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서구에서 근대가 막을 올리고 여성들이 참정권 보장을 외치며 스커트 자락을 걷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직후, 내로라하는 당대 여성 작가였던 이들 또한 보행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여성들의 물결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 때였으니 이른바 역사의 대전환을 코앞에 둔 시기였다.
차마 제정신으로는 속마음을 내뱉으며 살 수 없었던 오늘날 ‘82년생 김지영’보다 100년을 앞서 태어난 ‘82년생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같은 시대의 나혜석과 하야시 후미코. 이들은 혁명적인 사회 변동과 전쟁의 위험 속에서 정물화처럼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집에 앉아서 죽으나 바깥에 나가서 죽으나 매한가지이던 시대였고, 굳이 그런 까닭이 아니었더라도 가슴속의 불덩이를 잠재우지 못해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던 이들이었다.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1927년 6월 19일 열차를 타고 부산진을 출발해 구미 대륙을 여행한 뒤 1929년 3월 12일 부산항으로 되돌아왔다. 1년 8개월이 넘는 그 기간 동안의 기행문 스물한 편을 묶은 것이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다. 칠십 먹은 시어머니와 세 아이 등 남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는 평소 동경했던 서구 화단과 여성들의 활동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며 부푼 마음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당시 나혜석은 일거수일투족이 입방아에 오르는 ‘신여성’이었던 데다 여성의 장기 국외 여행은 처음이어서 그의 외유는 신문 기사로까지 보도되었다. 그만큼 본인이 느낀 부담감 또한 컸을 터. 외국 체류 경험을 고국 발전에 기여하는 동력으로 삼고 예술 활동을 증진하는 계기로 만들겠다는 각오 또한 대단했다. 더욱이, 인간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여성의 지위와 남녀 문제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관심이 컸던 그였다. 실존적인 불안과 함께 모순적인 사회 현실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그는 이 긴긴 여행을 떠나며 자신이 골똘해왔던 인생의 주제를 심도 깊게 탐구할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중국, 러시아,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등 낯선 사회의 풍경과 사람들의 풍속을 묘사한 그의 글을 보면 화가로서 날카로운 관찰력과 번뜩이는 통찰이 빛을 발한다. 근대 문물과 시스템, 평등 사회에 대한 동경이 뜨겁게 불타오른다. 나혜석은 각국 역사를 비롯해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아름다운 자연, 미술관과 예술 작품에 대한 섬세한 설명은 기본이고 근대적 여성들의 앞선 생활상을 르포르타주 쓰듯 낱낱이 적어 내려갔다. 이를테면 하얼빈에서 근대적 여성들이 오전 9시쯤 천천히 일어나 빵과 차로 간소한 아침을 먹고 집을 정리한 뒤 낮잠을 한숨 자면서 힘들지 않게 가사일을 한다는 등 환상적인 가사노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식이었다.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여성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나혜석을 가르친 영어 선생은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가 주도한 여성참정권 운동단체의 단원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여성참정권 운동 초기부터 일찌감치 시위에 참여한 인사였다. 나혜석은 당시 무려 1만여 명의 여성이 ‘여성의 독립을 위해 싸우자’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자’는 깃발을 들고 행진하다가 붙잡혀 단식투쟁을 하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놀란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시위에 나선 여성들이 ‘여성에게 투표권을 달라’Votes for Women고 적어 몸에 둘렀던 남색 띠를 보자마자 나혜석은 자신에게 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영어 선생이 망설이듯 무엇 때문인지 묻자 “내가 조선 여권운동의 시조가 될지 압니까?”라고 답했다.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였다. 1896년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의 딸로 태어난 그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나 재능을 눈여겨본 오빠의 도움으로 1913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1914년 동경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는데, 현모양처론이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여성이 지식과 기예를 익혀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경 여성 유학생들과 함께 계몽적 여성 잡지 《여자계》를 발행했고, 자전적 단편소설 「경희」를 실어 ‘여자도 사람’이라고 부르짖는 여성 주인공을 그렸다.
1919년 3·1운동에 관여해 다섯 달 동안 옥고를 겪은 그는 결혼 뒤 남편 김우영金雨英이 안동부영사로 재직할 때 독립운동가들을 은밀히 돕기도 했다. 파리에서 그림 유학을 하고 서구의 여성 해방 운동가들과 뜨겁게 접촉하고 돌아온 나혜석에게 경상도 동래의 시집 생활은 답답했고 대식구의 생활은 궁핍했다. 더군다나 귀국 짐을 실은 궤짝에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선물 대신 화구와 그림 들이 가득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프랑스 여행에서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崔麟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이혼하지 않겠노라 생각했던 그는 이런 열정이 결혼 생활에도 활력을 주리란 서툰 기대까지 가졌다. 오래전부터 다른 여자와 동거하던 남편 김우영은 급기야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혼을 요구했고, 나혜석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이혼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끝내 이혼을 하게 되어 집을 나온 뒤에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1934년 대중지인 《삼천리》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하며 김우영과의 만남, 부부 생활과 화가로서 자신의 경력, 최린과의 연애까지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서구 여행을 통해 자신은 여자가 한 사회의 주인공, 한 가정의 여왕, 한 개인의 주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평등, 자유는 요구할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춰야 하는 것이라고도 밝혔다. 또 나혜석은 조선 남성이 자기 정조관념은 없으면서 처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빼앗으려 한다며 일갈했다. “방종한 여성”을 이용하고 파멸시키는 남성들의 행위를 “미개명未開明의 부도덕”이라고 적었다.
“나는 여성인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러고 여성은 위대한 것이요, 행복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서구 페미니즘 운동의 정신과 역사를 흡수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유럽을 그리워했다. 여행을 마친 그는 이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혼을 한 뒤에도 그는 조선의 성차별적인 관습과 제도를 비판하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쉼 없이 글을 썼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 4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여론은 싸늘했다. 1935년 그림을 모아 전람회를 열었지만 언론 홍보에 실패하여 재기의 발판이 되지 못했고, 대중의 호기심을 끌 만한 내용을 다수 포함한 잡지인 《삼천리》를 제외하면 글을 실을 지면도 얻지 못했다. 화가로 문필가로 가치가 점점 떨어진 그는 병든 거지꼴을 하고 스님이 된 친구 김일엽金一葉이 있던 수덕사로 찾아가 머리를 깎으려 했지만 끝내 스님도 되지 못했다. 오빠의 집과 양로원을 전전하던 나혜석은 결국 세상의 외면 속에 행려병자로 생을 마쳤다. 향년 53.
“나는 숙명적인 방랑자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 여성에겐 조국이 없다고 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이 문장은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1903~1951가 소설 『방랑기』의 앞부분에 쓴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새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행상으로 떠돌며 싸구려 여인숙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물건을 팔고 잡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방랑의 삶 속에서 글쓰기를 이어갔다. 노동의 신성함과 여성의 자립을 그린 그의 소설에는 가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한 여성의 기개가 빛난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덧문처럼” 불안정하지만, “후지산이여! 너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여자가 홀로 여기 서 있다”라고 외치며 독립심을 과시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하야시 후미코 그 자신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등여행기』는 가난했던 그가 『방랑기』의 인세를 받아 들고 떠난 경험을 담은 에세이다. 전쟁의 총소리가 나던 1931년 11월. 작가는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죽는 건 매한가지”라며 용감하게 트렁크를 들어 옮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덜컹거리는 삼등칸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맹추위를 견디면서 소금국처럼 짜디짠 수프를 마시던 그는 막연한 미래 때문에 가끔 불안에 떤다. 일본의 나룻배처럼 떼 지어 줄줄이 걸터앉은 열차 속 여러 나라의 사람들은 굶주리면서도 커다랗게 노래를 불렀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사람들의 ‘곁’을 느낀 시간이었을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했을 땐 일주일 동안 “돌인 양” 잠만 잤다고 한다. 파리의 쌀쌀한 날씨 탓이 컸겠지만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서 비롯한 몸살이기도 했으리라. 재미있는 건, 비몽사몽 잠결에도 으스대며 잘난 척하는 이들의 행태를 지적하며 비꼬는 그의 냉소적 태도다. 하야시 후미코는 특권자들을 경멸했다. 타고난 기질 탓이기도 했고, 가난한 집에서 어른들의 살뜰한 보살핌을 느끼지 못한 채 자라나 온갖 남자에 치이는 한편 부모까지 부양해가면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던 그였기에 나약한 부르주아적 속물성이나 젠체하는 태도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고등여학교에 입학한 뒤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우고 홀로 글을 써서 먹고살았던 그에게 불로소득자들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은 꼴불견이었다. 지금도 여성의 성공을 시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듯 당시 『방랑기』가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가 된 뒤 하야시 후미코에게 신출내기 여성 작가라는 비난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자신을 향한 문단 또는 지식인계의 반감도 그의 냉소적 정서를 형성하는 데 상당 부분 작용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 특유의 낭만적 기질은 당시 보헤미안적인 유럽 문화와 상당히 어울렸다. 그는 구두쇠처럼 돈을 아꼈지만 매일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고, 부랑인인지 노숙인인지 성매매 여성인지 모를 여성에게 붙들려 어쩔 수 없이 그를 집에까지 데리고 와 공짜로 숙식을 제공하는 낭패를 보기도 했다.
단발머리를 한 채 거리의 한 카페에서 인쇄물을 읽는 그의 눈을 보면,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만 같다. 서구의 근대적 변화를 온몸으로 흠뻑 맞으며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는 젊은 동양 여성 작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다.
그는 결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으나 그런 그의 눈에도 유럽 여성들의 생활상은 선진적인 것이었으니, 유럽에 다녀오고서야 비로소 자신 주변의 여성들이 얼마나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부엌에서 일하는지 깨닫게 되었다며 “한 가정의 주부가 부엌에서 해방되는 일은 아주 먼 이야기”라고 밝힌다. 나혜석이 하얼빈 여성들의 간소한 가정생활을 묘사한 것처럼, 그 또한 간단하게 빵과 커피로 때우는 유럽 여성들의 식사와 상차림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릇을 있는 대로 꺼내 자잘하게 밥상을 차려 내는 일본 여성들의 힘겨운 가사노동과 비교하며 안쓰러움을 표한다. 남성 여행자였다면 절대 포착할 수 없을 이런 일상생활과 가사노동의 관찰이 바로 그 시대 여성 여행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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