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고대의 운동 경기
그리스에는 불쾌한 것들이 많다.
그중 가장 불쾌한 것은
그리스가 스포츠 민족의 나라라는 사실이다.
― 에우리피데스, 기원전 5세기
올림피아 정신
올림피아에서의 승리는 인류에게 어떤 유익이 되었는가
올림피아 제전에서 불패를 기록한 선수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는 사실은 어떤 측면에서 인간에게 유익했을까? 스포츠를 비판하는 전통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스포츠와 운동선수의 무익함을 조롱했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이 근육 기능에만 집중하면 이성의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며 스포츠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작품 「아우톨리코스Autolykos」에서 많은 칼로리를 섭취해야 하는 운동선수를 “씹기기관의 종”이자 “위胃의 노예”라며 경멸적으로 표현했다. 그리스 도시국가 시민들은 무리를 지어 올림피아로 순례 여행을 다니며 먹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는 사람들에게 환호를 보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국가로부터 훌륭한 통치를 받을 수 있을지에 관심을 두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인들은 인류의 진정한 미덕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명백하게 포퓰리즘에서 기인한 이 정신 나간 짓을 내버려두었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스포츠 시합에서 승리하면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보고했듯이 젊고 부유한 정치인 알키비아데스는 군에서 시칠리아 원정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군사 지휘권을 얻기 위해서 올림피아 제전에 7대의 마차를 전차 경주에 참가시켜 승리함으로써 그 지휘권을 얻었다. 기원후 165년 로마의 작가인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는 헤로도토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정신적 거장들도 명성을 얻기 위해서 올림피아 제전을 이용했다며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 올림피아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숭배 의식이 열린다. 헤로도토스는 올림피아 제전이 자신이 찾던 기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올림피아로 여행을 떠나, 자신이 집필한 역사서에 등장하는 제우스 신전의 뒷방에서 강연을 했다. 이후 그리스에서 헤로도토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올림피아에서 그를 직접 본 적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올림피아 축제를 관람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풀어놓는 체험담을 통해서 헤로도토스라는 이름을 들었다.”
올림피아의 의미
당시 스포츠 시합은 신을 가리기 위한 숭배 의식Panegyris의 일환으로 종교 숭배지에서 열렸기 때문에, 스포츠 문화에 대한 비판은 종교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올림피아는 처음에는 제사를 올리는 장소였던 듯하다. 기원전 11세기 이후로는 동물 형상의 봉헌 제물이 등장했다. 봉헌 제물은 대개 소나 말이었지만 숫양과 개인 경우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는 항상 이러한 지역들이 특히 비옥했음을 강조한다. 다른 많은 문화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옥함을 신의 선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곳에서 사냥과 여성의 여신 아르테미스나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땅의 여신 데메테르나 대지의 여신 가이아 등 다산의 상징인 여신들을 숭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소한 기원전 7세기부터 올림피아는 제우스 신전이었다. 올림포스 산에서는 제우스 이외에 다른 신들도 숭배했는데, 헤라나 제우스의 아들이자 스포츠에 뛰어난 헤라클레스와 같은 신들을 섬기는 신전은 나중에 지어졌다.
올림피아 근처 곳곳에 신전이 생기기 시작했다. 올림피아 신탁의 예언이 용했고, 이 사실을 부풀리는 선전이 유포되며 날이 갈수록 올림피아에 더 많은 순례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올림피아는 전성기를 누리며 4년에 한 번 지중해 지역 출신의 해외파 그리스인들이 정기적으로 회합하는 장소가 되었다. 기원전 700년, 성지가 확장되고 있던 올림피아 계곡에는 더 많은 방문객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넓은 면적의 땅이 개간되었고, 홍수에 대비하여 클라오데스 강을 막아 둑을 쌓았다. 순례자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지하 깊은 곳까지 땅을 파내 우물도 설치했다. 또한 순례자를 위한 호화로운 신전과 숙박 시설, 봉헌물 보관소도 지어졌다. 이러한 전통을 전하기 위해서 송시 작가 핀다로스나 지리학자 스트라본과 같은 저자들은 그리스의 축제 의식과 일반적인 춤, 연회, 대화 등 화려한 축제 분위기를 묘사했다.
올림피아에서 언제부터 운동 경기가 열렸는지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가 어려우므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육상 경기는 역사가 아주 오래되어 기원전 11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기원전 700년의 건축물에서 최초의 스포츠 행사 시설이 발견되었다. 출발선, 결승선, 관중석, 동시에 여러 선수들이 뛸 수 있는 육상 경주로가 갖춰진 이 시설은 최초의 스타디온Stadion으로서 아직 단순한 형태였다. 스타디온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경마 시설인 히포드롬Hippodrom은 이보다 얼마 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에 드러나듯이 이 시기에 제사 의식과 스포츠 시합은 이미 분리될 수 없는 관계였다. 아마 스포츠 행사는 초지역적인 모임의 기반이 되는 행사였던 듯하다. 이렇게 스포츠 시합이 제도화되면서 시합 참여자들은 평범한 순례자가 아니라, 그리스 전역에서 이 행사만을 위해서 특별히 훈련을 받은 프로 선수들로 바뀌었다.
뮌헨의 고대역사가 크리스티안 마이어는 그리스 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올림피아 제전의 의미를 해석했다. 올림피아 제전에는 정치적인 독립성을 철저하게 존중했던 도시국가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었다. 기원전 8세기 이후 그리스의 식민화 정책으로 지중해와 흑해 주변에 새로운 도시들이 세워졌다. 그리스인들은 대제국을 건설하지 않고, 국내외의 적에 대항할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맺어 도시국가라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의 문화적인 공통점을 유지하기 위한 합의의 장소가 필요했다. 성역聖域은 공동으로 숭배할 수 있는 신들의 세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 올림피아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떤 도시국가도 독점적인 이득을 취할 수 없었고 그리스 전역에서 성역으로 인정받았다. 제전의 매력은 성역의 명성을 높였다. 오히려 성역의 명성이 제전의 매력을 더해주기도 했다. 고졸기의 귀족문화에서도, 민주정 시대에도 마그나 그라에키아Magna Graecia: 대그리스라는 의미로, 고대 이탈리아 남부 동해안 연안에 건설된 그리스의 식민지/옮긴이에서는 공공성과 경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국가들은 전쟁보다는 스포츠 시합을 통해서 경쟁했다. 예술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도시국가들의 경쟁을 그리스 문화의 특징으로 꼽았고 투쟁적Agonalen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며 경쟁심, 공개적인 경쟁, 업적, 명예욕 등이 그리스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성향은 “항상 최고가 되어 남보다 뛰어나기를 원한다”는 호메로스의 인용구에도 축약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은 항상 개인 간 경쟁을 추구했기 때문에 단체 경기가 없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특성 때문에 운동선수는 차츰 각 도시국가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시합에서의 승리는 도시국가의 정체성과 내부의 연대 의식을 강화했다. 운동선수는 기량을 키울 수 있도록 고국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고 시합에서 승리하면 축제가 열렸다. 올림피아 제전에서 우승하려면 수년간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스포츠는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서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올림피아 제전은 전 그리스 문화권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4년에 한 번 전령이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 올림피아 제전 개최 소식을 알리면서 모든 도시에서 경기가 개최되었다. 올림피아 제전은 창설 이후 4년에 한 번씩 총 293회 열렸고 1,00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고졸기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의 이행기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심지어 헬레니즘 문화 이행기와 로마 제국에 통합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올림피아 제전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정수였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이 경쟁을 아주 많이 즐긴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특성은 스포츠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공헌했다. 그리하여 스포츠는 신들의 이미지를 최대한 운동선수처럼 묘사하는, 즉 완벽한 신체와 나신으로 표현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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