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이민자의 기억법, 회상
― 독일 브레멘 항구의 이민 박물관
독일의 서북쪽 함부르크 아래 도시 브레멘의 항구에는 이민 박물관이 있다. ‘떠난 사람들의 집’이다. 크고 작은 배들이 정착한 항구에 범선 모양을 한 박물관은 19세기부터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떠났던 독일 이민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2005년에 세워졌다. 박물관 마당의 바닥 돌에는 떠난 사람들의 이름과 도착지, 떠난 연도가 새겨져 있다.
이민자들의 꿈을 기억하는
브레멘 항구 이민자의 집
박물관 입장 티켓을 끊으면 승선권과 카드를 준다. 오디오 가이드는 영어, 독일어 두 가지 버전 중 선택할 수 있고 추가 비용을 내면 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이민자가 되어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전 과정을 체험하는 ‘발견투어 프로그램Discovery Tour’은 떠나는 사람들Emigration 편부터 시작했다. 승선권은 실제로 1923년 브레멘에서 미국으로 간 마르타 훈너Martha Huner, 1906~1987의 것이다. 전자카드를 출입문에 꽂으니 출입국사무소로 꾸며진 방의 문이 열리고 디오라마*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민 박물관이 브레멘에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디오라마Diorama는 모조 공간을 만들어 관람객이 그 공간에 들어가 완전히 몰입하게 하는 전시 방법이다. 놀이공원에 온 듯 기차를 타고 내부를 관람하며 전쟁이나 지진 상황을 체험하게 하는 등 극적인 요소를 활용한다. 이민 박물관의 발견투어 프로그램은 디오라마 방식으로 구성되어 ‘보관하는 박물관’에서 ‘보여주고 체험하는 박물관’으로의 변화를 꾀했다.
1821년도부터 1941년까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봉건 시대에서 만인이 평등한 민주주의시대로 전환하던 시기 4,400만 명의 유럽인이 미국,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호주 등 신생국가로 떠났다. 브레머하펜에서만 1830년부터 1974년까지 배를 탄 유럽 이주민이 720만 명이었고 그중 독일인이 370만 명이었다.
대기실Watehalle에서 관람객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건 Hoffnung희망이라는 큰 글씨와 설명문이다. 이민 박물관에서는 그들이 떠난 이유를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벽에는 당시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의 서류, 출국 조건, 승선요금표, 독일 현대사 연대기표가 붙어 있었다. 전시를 전부 보고 난 후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그런데 다른 방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그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여러 번 반복했지만, 입구에서 받은 출입카드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었다. 방 안에서 초조하게 입구를 찾는 모습이 흡사 그 방 벽면에 붙은 100년 전 사진 속 서류를 제출하고 출국허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이민자 같았다.
이윽고 휘파람 같기도 하고 뱃고동 같기도 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감쪽같던 벽면이 문이 되어 열리고, 좁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길은 큰 항구의 부두Ander kaje로 이어졌다. 캄캄한 항만에는 가로등 몇 개가 켜져 있었고, 높게 쌓인 나무궤짝 사이로 실물 같은 쥐가 나타났다 사라지며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배가 접한 부두에는 배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그 아래에는 떠나는 사람들과 배웅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불안과 기대가 담긴 그들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강렬하게 비쳤다.
이어지는 방에는 배를 타러 가는 길을 재현해 놓았다. 배로 넘어가는 가파른 철제 계단은 실제처럼 삐거덕거렸고 계단 아래에는 부두에서 배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갑판에 오르자 동그란 창문으로 먼바다 파도가 출렁였다. 선실 입구에는 당시 이민자를 싣고 떠났던 실제 배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고 커다란 여행가방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새롭게 조성된 브레멘의 항구 노이어하펜이 보여 정말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나는 듯했다.
가격에 따라 크기와 인원이 정해진 일등실, 이등실, 삼, 사등실의 침실과 화장실, 식당에는 당시 경제적 형편을 보여주는 차림의 사람들 모형이 있었고 부엌과 화장실 수도에 손을 대면 당시 이민자들의 사진이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선실을 지나면 700만 인의 방Galerie der 7 Millionen이라는 이 배에서 가장 길고 환한 도서관이 나온다. 이곳에는 이민 간 700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서랍이 연도별로 있다. 서랍들 사이로 전화기와 사진이 놓여 있는데 수화기를 들면 그 사람이 왜 고국을 떠나게 되었는지 어디로 갔는지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다. 서랍장 맨 위에는 이민자들의 가족 성을 역시 연도별로 분류해 놓았다.
배는 항해를 마치고 뉴욕항Uberfahrt의 엘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에 도착했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미국 최초 이민국이 세워진 곳으로 신세계의 관문으로 불렸다. 1890년 전까지는 맨해튼 작은 캐슬가든에 있던 이민국이 증가하는 이민자를 받을 수 없어 자유의 여신상 바로 아래 엘리스 아일랜드로 확장하여 이민자를 받았다. 이어진 여섯 번째 방Office of the New World에는 당시 독일인들이 오스트리아, 캐나다, 미국 등 나라별 입국소 위치와 입국 현황을 연도별, 대륙별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표시한 커다란 전도가 사방 벽에 그려져 있다. 그야말로 대이동의 시기였다. 사람들은 종교, 신분, 경제 등의 이유로 새롭게 발견한 땅을 향해 분주히 움직였다.
일등석과 이등석 승객들은 대부분 배 위에서 간단한 심사를 받고 바로 도시에 들어갔다. 하지만 삼등석에 타야 했던 마르타 훈너는 그레이트 홀에서 적게는 3시간 길게는 5시간에 걸쳐 건강진단과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출국사무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입국심사를 하는 사람은 마치 범죄자를 검문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민자의 얼굴을 살피고 있다. 각 사무실은 천장 끝까지 서류가 쌓여 있고 입국심사대에 앉은 이민자들은 입국이 허가되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으로 눈치를 살핀다. 무사히 심사를 마친 사람들은 드디어 자신의 가방을 챙겨 미국 국기가 펄럭이는 커다란 홀 아래 계단을 걷는다.
감옥 면회실 같았던 입국심사대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그랜드센트럴역Grand Central Terminal에는 낯선 언어가 빠른 속도로 흘러나오는 라디오방송국, 화려한 의상과 과장된 모습의 영화 포스터가 붙은 극장, 유럽 가정에서 만들어 먹던 음식들이 공산품으로 만들어져 판매되는 매점이 있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에서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느낌을 주고야 말겠다는 듯 화려하고 과장되게 꾸며져 있었다.
출국 체험이 끝난 후 입국 체험이 이어졌다. 이번 주인공은 베트남인 마이 풍 콜라트Mai Phung Kollath다. 그녀는 독일인 마르타 훈너가 1923년 브레멘 항구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간 때로부터 60년 후 독일로 들어온다. 마이는 1963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81년에 시하펜 로스토크Seehafen Rostock의 4년 계약직 파견노동자로 독일에 입국했다. 매점을 지나고 나타난 장소Kiosk, Frisorsalon에는 그녀의 가족사진이 있고, 고서점Antiquariat-Vintage Book Shop에는 마이 가족의 책과 수집품, 음악이 모여 있는데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믿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여행사Reiseburo-Travel Agency에는 1985년 독일행 비행기티켓, 파견노동자 계약서, 편지, 파견노동자 인증서 등의 기록과 함께 그녀가 왜 독일에 왔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영상이 있었다.
마이는 3개월간 독일어를 배운 후 구내식당에서 일을 배웠다. 그때 자신의 꿈이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노동계약에 사인을 했다. 처음 몇 해는 매일이 고문이었지만, 1985년 마침내 요리사 교육과정을 마치고 관리자로 승진했다. 하지만 1989년에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임신을 했는데 파견노동자는 즉시 중절수술을 하거나 추방되었기 때문에 독일에 계속 있고 싶었던 마이는 헐렁한 옷을 입고 7개월 동안 임신 사실을 숨겼다. 당시 그녀는 베트남에 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가족들이 보낸 답장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상자 두 개에 가득 찰 만큼 많은 편지에서 그녀가 임신했을 때 그녀의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 수 있다.
마이의 월급은 다른 파견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적었다. 그녀는 부업으로 청바지와 청가방 만드는 일을 했는데 다그마 페트리Dagmar Petri에서 나오는 웨스턴 스타일 바지는 작업료가 아주 높았다. 벨트, 지퍼 등의 재료는 베트남 항해사들이 공급했다. 당연히 불법이었고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무마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화점Kaufhaus-Department Store에는 당시 청바지가 전시되어 있는데 마이가 마든 것은 아니고 작업장에서 알게 된 베트남 통역사 훙Hung이 만든 것이다. 그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연락이 끊겨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그마 페트리는 웨스턴 스타일 바지 한 벌에 70서독마르크East Marks를 지불했는데 당시 판매원의 월급이 400서독마르크였다. 함께 전시된 청가방은 포츠담에서 베트남 파견노동자로부터 청바지를 샀던 모니카 리히터Monika Richter 가족이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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