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타자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어떻게 사회를 구할까?
더 많이 접촉하고 더 가까이 있을수록 편견은 줄어든다. 이 명제를 일반화할 수는 없을까?
하랄트 헤르메스가 아직 어렸던 1940년대, 부모님은 그에게 이렇게 겁을 주곤 했다.
“하랄트, 조심해. 집시들은 금발 아이들을 잡아간단다.”
10대가 된 1950년대에 하랄트는 함부르크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쓰레기더미를 뒤적거리는 집시들을 목격했다. 성인이 된 1960년대에는 아랫동네 모퉁이 술집에서 싸움을 일삼던 집시들을 유난히 자주 봤다. 어느덧 70이 훌쩍 넘은 하랄트는 몇 년 전 시리아인, 아프가니스탄인, 이라크인, 소말리아인 등과 함께 롬족들이 독일로 왔을 때, 이 모든 일이 떠올랐다. 그에게 이 모든 일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골칫거리.
하랄트는 아내 크리스타와 함께 함부르크 북쪽의 한 연립주택단지 1층에서 50년째 살고 있다. 건물 외벽은 색이 바랐지만, 이 부부가 꾸며 놓은 집안은 매우 안락했다. 꽃무늬 커튼, 창틀에 놓인 도자기 장식품, 고급 원목 탁자를 보호하는 손수 짠 탁자 보, 이미 오래전 엄마가 된 두 딸이 벽걸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하랄트의 원래 직업은 자동차 정비사였다. 2001년에 정비사 일을 그만두고 몇 년 더 건물관리인으로 일했다. 그다음 완전히 은퇴하여 반복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기상, 아침, 점심, 가끔씩 손주들을 데리고 딸들이 방문했고, 가끔은 크리스타가 병원을 예약해 주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렇게 계속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이웃들이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 그들과 같은 연금 생활자들이었다. 빈집들이 생겼고, 2014년 초에 첫 번째 난민이 들어왔다. 한 독일인 이웃은 시청에 항의 전화를 했다. 또 다른 이웃은 신문사를 찾아갔다. 하랄트는 의회와 정당에 편지를 보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난민들은 연립주택가로 들어왔고, 마케도니아인들도 이주했다. 그렇게 롬족들이 찾아왔다. 은퇴자들이 살면서 오랫동안 조용했던 건물 사이 잔디밭은 북적거리는 아이들로 시끄러워졌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들이 계단을 가득 채웠다. 베란다에는 양탄자와 낯선 빨래들이 가득가득 널렸다. 거주 규정에는 베란다에 빨래를 널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랄트는 디지털카메라로 위반사항을 하나씩 기록했고, 그 사진들을 관리사무소로 보냈다. 그 또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름에는 라마단이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밤마다 베란다에서 바비큐를 해 먹었다. 헤르메스 부부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운 채 벌어진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고기 타는 냄새를 맡고, 아랍어 특유의 목구멍소리를 들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겨울이 되자, 새로운 이웃들은 보일러 온도를 최고로 올린 채 창문을 열고 생활했다. 하랄트는 함부르크 시장에게 편지를 썼다. 재무부 장관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하랄트는 쇼이블레 장관이 방송에서 난민 때문에 시민들이 추가로 부담할 돈은 1유로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헤르메스 부부는 난방비 500유로를 추가로 내야 했다.
하랄트는 독일에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기 동네에 온 외국인들을 보면서 하랄트는 자신의 생각에 더욱더 큰 확신을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첫 번째 난민들이 주변 연립주택으로 들어왔을 때는, 헤르메스 부부의 집과 시끄러운 대가족 난민들이 사는 집 사이에 적어도 잔디밭 하나는 있었다. 헤르메스 부부가 사는 건물에 처음 이주한 난민은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인 부부였다. 그들은 조용했고 언제나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약 40년 동안 알브레히트 가족이 살았던 헤르메스 부부의 바로 윗집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4월의 어느 날, 크리스타는 베란다에서 이웃집 주변을 서성거리는 일가족을 보았다. 한 다부진 젊은 남자와 아기를 품에 안은 긴 검은 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허리춤에도 닿지 않는 아이 세 명이 더 있었다. 무언가를 찾던 낯선 이들의 시선이 크리스타의 머리 위 2층 베란다에 머물렀고, 그들이 서서히 잔디밭을 지나 크리스타 쪽으로 다가왔다. 크리스타는 베란다 문에 대고 소리쳤다.
“하랄트, 우리 건물에 집시들이 오려나 봐요.”
그 가족은 크리스타의 베란다 앞에 멈춰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랄트가 밖으로 나왔다. 젊은 여성이 가족 모두를 소개했지만, 여섯 명의 이름을 크리스타는 곧바로 잊어버렸다. 헤르메스 부부는 이 가족이 대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얇은 벽을 통해 계단 오르는 소리도 들었다. 즉시 위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쿵쿵, 저 방에서 이 방으로 쿵쿵쿵. 그날 저녁 헤르메스 부부는 텔레비전 소리를 좀 더 키워야 했다.
다음 날 베란다에 물이 떨어졌다. 크리스타는 위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한 아이가 문을 열었고, 검은 머리의 아이 엄마도 따라 나왔다. 크리스타가 베란다에 물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다. “Can you speak English?영어할 줄 아세요?”라고 아이 엄마는 물었지만, 이번엔 크리스타가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스타는 집 안으로 들어가 아이와 엄마를 지나쳐 베란다로 바로 갔다. 베란다에는 마치 세찬 소나기라도 맞은 듯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기저귀, 바지, 수건이 널려 있었다. 크리스타가 말했다. “이러면 안 돼요.”
아이 엄마는 크리스타를 욕실로 안내했고 그 안을 보여 주었다. 크리스타는 모든 걸 알아차렸다. 이 집에는 세탁기도, 건조기도, 빨래 건조대도 없었다. 어릴 적에 크리스타는 직접 손빨래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알았다. “우리집 지하창고에 빨래 건조대가 하나 더 있어요. 가져가서 쓰실래요?” “네.” 아이 엄마는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확실히 이해했던 것이다.
문을 나서면서 크리스타는 집을 한 번 둘러봤다. 식탁 위에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전자레인지 위에는 땅콩 깡통이 놓여 있었다. 이유식을 데우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식기도, 포크와 나이프도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햇살 좋은 4월이라 하기에는 집 안이 너무 더웠다. 크리스타는 질문의 의미로 라디에이터를 가리켰다. 아이 엄마는 서툰 독일어로 설명했다. 아이들이 이불과 베개도 없이 잠옷만 입고 자다 보니 밤에 너무 추웠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뭔가를 깨달았던 것 같아요.”
크리스타는 그 순간을 그렇게 기억한다.
그날 크리스타는 지하창고와 2층 사이를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크리스타는 양털이불, 베개, 침대보를 가져다 주었다. 그런 건 집에 남아돌았으니까. 그리고 냄비, 프라이팬, 전기포트, 낡았지만 여전히 잘 돌아가는 커피머신을 한 아름 안고 올라갔다. 크리스타는 아이 엄마와 커피를 마셨고, 그녀의 이름이 로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밀란이 크리스타의 무릎 위에 앉았다. 하랄트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새로운 이웃 로버트도 세르비아에서 자동차 정비사 교육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직업이 같았다.
그날 이후 로시는 잔디밭에 있는 헤르메스의 빨래 건조대를 이용했다. 크리스타는 시간이 있을 때, 빨래 널기를 도와주었다.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가끔 크리스타는 아이들과 놀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크리스타를 ‘할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넘쳤던 밀란이 집 안 곳곳을 뛰어다니면 로시는 말했다.
“쉿! 할머니가 1층에서 주무셔.”
얼마 지나지 않아 로시와 로버트가 크리스타를 엄마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크리스타는 곧 이해했다. 두 사람 모두 폭력과 무관심이 지배하는 망가진 가정에서 성장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시와 로버트 곁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크리스타는 아이들에게 시간과 사랑을 기꺼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여름에 두 가족은 함께 엘베강가로 갔다. 날씨는 따뜻했다. 물속에 무릎을 담그고 있던 로시가 파도를 맞았고, 이 장면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로시는 매운 음식을 요리했는데,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하랄트도 이 요리를 먹었다. 아나스타시아의 입학식 때 크리스타는 생딸기를 듬뿍 넣은 딸기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 몇 주 만에 ‘집시들’은 ‘사람들’이 되었고, 로버트, 로시, 밀란, 아나스타시아, 크리스티나, 모니카가 되었다. 어느새 그들은 헤르메스 부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3년 후 부부의 거실에서 그들을 인터뷰할 때, 하랄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도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크리스타가 덧붙였다. “낯선 사람들에게 그렇게 온전히 애정을 줄 수 있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 일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냥 그렇게 된 거예요.”
헤르메스 부부는 로버트 가족을 “우리 세브리아 가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들의 세르비아 가족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었다. 헤르메스 부부는 세르비아 가족에게 함부르크를 보여 주었고, 독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세르비아 가족도 헤르메스 부부가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삶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주었다. 헤르메스 부부는 자신들의 삶이 쓰임새가 있기를 갈망했었다. 만약 크리스타가 그날 2층으로 항의하러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하고 하랄트는 가끔 자문한다. 만약 시 당국에 의해 이 집으로 이송된 이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옷 말고는 다른 의복이 거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만약 그 이웃이 게으르거나 멍청해서 혹은 악의로 빨래를 베란다 위에 너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8월 말에 하랄트는 로버트와 함께 시내에 있는 한 변호사를 찾아갔다. 이 사례는 망명자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변호사가 말했다. 하랄트는 시청에 편지를 또 보냈다. 이번 수신자는 외국인 담당 부서였다. 독일은 로버트와 같은 기능공이 필요하고, 이 가족은 독일에 소속되어 독일의 가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런 사실을 자신이 보증할 수 있다고 썼다. 심지어 이 가족은 집 안에 독일 국기와 함부르크 프로축구팀 HSV의 깃발도 걸어 두었다고 편지에 덧붙였다.
하랄트는 이들의 추방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반년 전이라면 그는 이들의 추방을 열렬히 지지했을 것이다. 그때였다면 이 새로운 이웃은 잠재적 사기꾼이자 싸움꾼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골칫거리였을 거란 말이다. 그러나 로버트가 열심히 일하는 기능공으로, 가족을 돌보는 가장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하랄트에게는 매우 사랑스러운 이웃이 되었다.
9월 초, 헤르메스 부부는 금혼 기념으로 오스트리아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베스퍼발트에 있는 하랄트의 누이 집에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베스터발트에 있는 하랄트의 누이 집에 들렀다. 그 집 앞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오후, 하랄트의 핸드폰이 울렸다. 크리스타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로시의 목소리를 들었다. 크리스타는 남편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녀는 곧바로 눈치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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