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영웅이다
김마리아1892~1944
판사
“너는 언제부터 조선의 독립을 생각해왔는가?”
김마리아
“한시도 독립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없다.”
판사
“여자가 어째서 남자들과 함께 운동을 했나?”
김마리아
“세상이란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고 좋은 나라는 남녀가 협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재판 진술 중에서
여기 저고리 한 벌이 있다. 바느질은 야무진데 옷 모양이 어설프다. 오른쪽 안섶이 왼편의 겉섶보다 눈에 띄게 짧다. 이 이상한 옷의 주인공은 김마리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잃고도 “너희 할 대로 다 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뺏으리라”하고 끝내 무릎 꿇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
그는 1892년 7월 11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일명 소래마을에서 김언순자字는 윤방과 김몽은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연은 한 번 나래를 치면 천 리를 내달리고 외세와 싸우면 판판이 이긴다는 전설의 새 장산곶매로 유명한 곳. 그 땅 기운을 받아서인가, 그는 어려서부터 대범하고 기개가 있었다. 부모는 사내애들과도 내남없이 어울리는 그에게 바지를 입히고 아들처럼 키웠다.
18세기 중엽부터 김언순 집안이 개간해 이룬 소래마을은 언더우드, 매켄지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고 한국인이 최초로 교회를 세운 곳이기도 했다. 대지주였던 김언순 역시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마을에 소래교회를 건립하고 해서제일학교일명 소래학교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마을 유지이자 가문의 어른으로 큰 역할을 하던 김언순은 1894년 서른넷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큰딸 함라는 여덟 살, 둘째 미렴은 여섯 살, 막내 마리아는 불과 세 살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세 딸을 데리고 시집 근처에 따로 살림을 냈다. 시동생 김용순이 만류했지만, 남편 없는 시집에 얹혀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딸들은 이런 어머니에게서 자연스레 독립성과 생활력을 배웠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딸들을 제대로 가르치려 온 힘을 다했다. 아버지가 없어도 세 딸을 학교에 보내 근대교육을 받도록 했다. 마리아 역시 1899년 아버지의 손길이 깃든 해서 제일학교에 입학했다. 한글, 산술, 천자문, 역사, 성경, 작문 등을 가르치는 이 4년제 보통학교에서 마리아는 금방 눈에 띄었다. 남자애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데다 워낙 학업 성적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학교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마리아는 상급생을 모두 제치고 전교 1등을 했다. 한 살 많은 고모 김필례는 2등이었다.
1903년 마리아는 학교를 졸업했다. 별일이 없다면 당시 연동여학교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에 다니던 고모들과 큰언니 함라처럼 마리아도 서울에서 여학교에 들어갈 터였다. 그러나 진학은 미루어졌다. 오래 복막염을 앓던 어머니의 병세가 부쩍 악화된 것이다.
1905년 추운 겨울날,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떴다. 어린 막내의 앞날을 걱정한 어머니는 “3형제 중 둘은 못 하더라도 마리아만은 꼭 외국 유학까지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마리아는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나마 언니들과 삼촌들, 고모들이 있어 고아가 된 설움을 조금은 덜 수 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장례가 끝난 뒤 마리아와 언니 미렴은 삼촌들이 살던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삼촌들은 남대문 밖 제중원 옆에 김형제 상회를 차리고 인삼 무역과 목재상을 하는 한편, 큰삼촌 김용순자字 용오은 애국계몽단체인 서우학회의 발기인으로, 작은삼촌 필순은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김필순은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을 만큼 가까운 사이로, 김형제 상회는 신민회 운동의 거점이자 안창호를 비롯한 노백린·이동휘·유동렬 등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모임 장소로 애용되었다. 마리아는 이런 어른들의 활동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키웠다.
1906년 마리아는 언니들과 고모들이 다니는 연동여학교에서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마리아는 학교에서 국어·역사·산술·성경 등 늘 배우던 학과만이 아니라 생물·천문·서양사 등도 배웠는데,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기쁨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조차 잊게 했다. 마리아는 열심히 공부했다. 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그였지만 작문 시간에는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써서 내면의 뜨거운 민족애를 드러내기도 했다. 친구들은 과묵하면서도 해야 할 말은 꼭 하고 해야 할 일은 앞장서 해내는 마리아를 믿고 따랐다.
1910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언니 김함라가 재직하던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해에 조선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른바 경술국치였다. 부모님에 이어 나라마저 잃다니! 마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교직에 헌신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3년 뒤에는 학창 시절부터 그를 눈여겨본 루이스 교장의 부름을 받고 모교의 수학교사로 부임해 후배들을 가르쳤다. 교사로 함께 일했던 동창 유각경은 당시의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항상 하는 얘기는 조국의 독립이었어요. 마리아의 비분강개를 듣노라면 나도 분노와 울분에 덩달아 울었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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