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톨게이트를 지나자 안개가 한층 두껍게 내려앉았다. 차들은 빙판길을 지날 때처럼 서행하고 있었다. 얼마 전 한 대교 위에서 십사중 추돌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 열두 명, 부상자가 서른아홉 명이나 발생한 대형사고였다. 안개 때문이었다.
남자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갓길에 차를 세웠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지도를 확인하고 싶었다. 짙은 안개가 정차한 차 주변을 에워쌌다.
이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야.
남자가 지도 위의 도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도 위에서 길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실제는 지도에 표시된 도로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다. 지도는 언제나 현실보다 단순하게 마련이었다. 여자는 노랗게 칠해진 길을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나는 듯했다. 남자가 라디오를 켜 교통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었다. 빠른 곡조의 노래와 노래 사이에 시정거리 오십 미터 미만의 짙은 안개를 조심하라는 리포터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는 앞창에 바짝 붙어서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쏘아보았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계획을 잡기만 하면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사정이 생겼다. 지난달에는 남자의 대학 동창회가 열렸다. 축구부 선생으로 자리잡은 선배들이 많이 온다고 했다. 잘만 하면 그런 자리 하나쯤 소개받을 수도 있었다. 남자로서는 빠지기 아쉬웠다. 그 전달에는 여자 때문에 못 갔다. 여자는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들은 아쉬워하며 일정을 연기했다. 아프지도 않고 바쁘지도 않은 주말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놀러가자고 수업을 미룰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여자에게 배우는 글짓기 말고도 배우는 게 많았다. 제각기 다른 학원 시간표를 가진 아이들을 묶어 보강 시간을 잡기는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개별적으로 보강 시간을 잡았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다른 때보다 배는 더 피곤한 한 주를 보내게 될 것이다.
지도만으로는 얼마나 먼지 감이 잘 안 오네.
울렁이는 속을 누르며 여자가 말했다.
지도란 게 원래 그래. 그래도 재밌지 않아? 우리가 이 지도에 찍힌 점보다 더 작다는 게 말이야.
남자가 점이라며 가리킨 것은 실은 학교를 나타내는 기호였다. 여자는 조금도 재밌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슬쩍 웃었다. 남자는 아이들이나 쓸 법한 케케묵은 비유를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는 데 익숙했다. 여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지도만으로 찾아가는 게 흥미로웠다. 도로는 잔가지처럼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해마다 새로운 길이 생기고 있던 길이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할 것이다. 아예 없어지는 길도 있을 터였다. 남자의 지도는 육년 전에 발행된 것으로 운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써왔다. 그간 바뀐 도로 사정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앞좌석이 이전보다 조금 앞쪽으로 당겨진 느낌이었다. 처음 탈 때부터 좀 좁아져 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전에는 편하게 발을 뻗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릎을 조금 구부려야 했다.
내 키가 컸을 리는 없어.
여자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남자가 물었다. 그는 조금 들떠 있었다. 날짜를 잡고 여행지를 정하고 숙소를 예약한 사람은 모두 남자였다. 그는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어때? 드디어 떠나게 됐잖아.
여자는 불편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응?
남자가 대답을 기다리며 여자를 돌아봤다.
하필 안개가……
여자가 괜히 안개 탓을 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앞좌석에 앉았던 게 분명했다. 여자는 남자가 보라는 듯이 몸을 뒤척였다.
안개라면 괜찮아. 안개는 날이 맑을 징조라고. 아침이면 감쪽같이 날이 갤 거야.
W시에는 야생 차밭이 있는 산이 있었다. 시 끝에는 해안선이 복잡한 바다가 있고, 해안을 따라 도는 유람선이 있었다.
바다냐 산이냐 하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곳이라니까.
여행지를 정할 때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마른걸레로 앞창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뿌연 안개는 가시지 않았다.
그들은 밤 열시에 여자의 집 앞에서 만났다. W시는 톨게이트를 지나 여섯 시간가량 걸린다고 했다. 여자의 집에서부터 치면 거의 일곱 시간 가까이 걸리는 셈이었다. 여자는 멀미가 심했다. 바다든 산이든 계곡이든 상관없었다. 단지 가까운 곳이었으면 했다. 일곱 시간이나 차를 탄다는 생각만으로 내이內耳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작년에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말이야, W시가 숨겨진 관광지 일위로 뽑혔어. 한 번쯤은 이런 곳으로 여행을 가줘야 한단 말이지.
남자가 서서히 차를 움직이며 말했다. 남자가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여자 역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하룻밤을 꿈꾸었다. 막상 여행을 떠나게 되니 도시 인근의 바다에서 대하나 잔뜩 먹고 왔으면 좋겠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이틀이나 비워도 될 만큼 한가한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멀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일곱 시간이나 걸리는데 굳이 그리로 가야 해?
여자의 말에 남자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야 여행을 간 기분이 들지, 안 그래?
대하나 좀 먹었으면.
여자가 중얼거리자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하야 여기서도 먹을 수 있잖아!
남자는 성격이 급하고 말이 거칠었다. 쉽게 화를 내지만 곧 풀어지는 성격이었다.
내가 멀미를 심하게 하잖아.
여자가 변명하듯 대꾸했다.
약 먹어.
남자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서울을 벗어나기 전 그들은 대형 마트에 들렀다. 밤의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마트가 벅적거렸다. 여자는 카트에 생수와 망에 든 귤 두 묶음을 담았다. 색이 균일한 부사도 담았다. 식당가에서는 한 줄에 이천원 하는 김밥을 여러 줄 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밥을 좀 싸는 건데.
남자가 힐끗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자는 못 들은 척 과자와 사탕 같은 군것질거리를 담았다. 여섯 개씩 묶인 캔맥주를 종류가 다른 것으로 세 개나 골랐다. 팩에 담긴 튀김과 구운 지 하루가 지나 세일중인 빵도 담았다. 여행용 티슈와 미처 챙기지 못한 양말도 두 켤레 샀다. 안주 삼아 먹을 마른오징어와 땅콩도 빼놓지 않았다. 남자는 정육 코너에서 삼겹살을 두 근이나 샀다.
거기서도 다 팔 텐데.
여자의 핀잔은 이미 채소 코너로 옮겨가고 있는 남자의 발소리에 묻혔다. 남자가 상추나 치커리 같은 쌈거리를 비닐 가득 담으며 말했다.
고기를 좀 사야 여행 가는 기분이 나지, 안 그래?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삼겹살이 든 봉지를 주물럭거렸다. 차갑고 물컹거리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계산대로 가던 중 여자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새벽에 춥겠다 싶어 때 이르게 거위털 잠바를 꺼내 입었는데, 지금 보니 몸이 너무 둔해 보였다. 여자는 초겨울답지 않게 부쩍 따뜻한 요즘 날씨가 못마땅해졌다. 다시 집에 돌아가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그러자고 하면 남자는 아예 여행을 때려치우고 모텔이나 가자고 할지도 몰랐다. 여자는 종종걸음으로 의류 코너로 갔다. 남자는 못마당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러다 늦겠다.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그가 참을성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옷걸이들 사이를 빠르게 왕복하는 동안 마음에 드는 옷을 찾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다고 해도 살 수 없을 것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굳어 있었다.
톨게이트를 지나는데 갑자기 여자가 큰 소리를 냈다.
아, 멀미약!
급하게 수업을 마무리하고 오느라 미처 약을 챙기지 못했다. 마트에서는 옷에 정신이 팔려 약 사는 것을 잊었다. 남자는 힐끗 여자를 돌아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언짢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약을 먹지 않은 걸 깨닫자마자 차 안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터틀넥이 감싼 목에서 땀이 흘렀다. 값싼 앙고라털이 몸을 간질였다. 여자는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손을 넣어 긁어댔다.
차라리 스웨터를 벗어.
남자가 말했다.
여기서?
그렇게 물으면서 여자는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벗겠느냐고 생각했다. 안개가 모든 것을 가려줄 것이다. 이런 안개라며 발가벗어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차는 안개를 헤치며 천천히 나아갔다. 앞차의 후미등이 보안등이 되어 길을 밝혀주었다. 여자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캐미솔만 입은 윗도리에 거위털 잠바를 이불처럼 덮고 묵묵히 진군해오는 안개를 쳐다보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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