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면접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처럼 외교도 때로는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지난 20년 동안 아시아와 관련된 일을 해온 내 경우에는 2008년 12월 초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의 비서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통령 선거 이후 몇 주 동안 나는 국방부 인수위원회에 소속되어 창문도 없는 벙커에 격리된 채 군 운영에 관련된 문서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9·11 테러와의 전쟁, 힘겨웠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전에도 국방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그 당시 국방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9월 11일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 공격 이후 국방부 건물을 포함한 펜타곤 전체는 그전과 전혀 딴판으로 변했다. 당시 우리는 10년째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고, 그런 현실을 그 어느 곳보다 국방부에서 잘 드러났다.
워싱턴 포토맥강 옆 오각형 국방부 건물에는 공중 납치된 여객기가 충돌해 생긴 검게 그슬린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여객기가 충돌한 지점 근처 복도에서는 여전히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후 국방부에는 수많은 추가 보안 시설이 설치되었다. E구역의 밖으로 난 창문들은 노란색 합성수지로 덧칠해졌고, 그 때문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으스스할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 바깥세상은 색이 잘못 입혀진 고전 흑백영화처럼 기괴했다. 남녀 군인들은 모두 당시 새로 도입된 디지털 위장복 차림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위험한 전투에 수도 없이 다녀왔고, 모두 전투에서 입은 상해를 안고 있었다. 군복 왼쪽 가슴에 달린 상이군인 훈장들 때문에 그 부상들이 더욱 돋보였다. 그에 반해 많은 민간 정책 전문가들은 군대 경험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자주 군인들과 민간인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발생했다.
그날 나는 내 황량한 칸막이 방에서 클린턴의 개인 비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새로 채용된 사람이었고 눈에 띄게 명랑한 목소리였다. 내일이나 언제 국무부 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국무장관 예정자를 만날 시간을 낼 수 있냐고요? 아. 네, 그러지요. 하마터면 “지금 바로 가면 너무 빠른가요?”라고 물을 뻔했다.
나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초창기 지지자였다. 클린턴 상원의원에게 브리핑도 자주 했고, 선거 자금도 모았다. 전 국방장관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실망스러웠던 민주당 경선에서 마지막까지 그녀와 함께 “끝까지 남아 버티는 사람bitter-ender”이었다. 희망차게 출발한 그녀의 선거운동은 내부 차별과 분열에 짓눌려 주저앉았다. 동료 정책통들은 처음부터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팀과 함께했다는 듯 재빨리 캠프를 갈아탔다. 클린턴 캠프에 남은 우리 몇몇은 매우 불안했다. 나는 부러우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으로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팀이 경선 승리 후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양가적 감정은 선거에서 패한 후보와 함께했던 선거 관계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하다.
치열한 당내 경선을 뒤로한 채 민주당은 다시 단합했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자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무엇을 할지에 관한 기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도 물론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에 기뻐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패한 팀에 속했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었다. 선거에서 지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 그 때문에 국방부에서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거의 없었다. 정부가 바뀌는 동안 완고한 국방부 정책 서클의 강경론자들을 면담했다. 체니와 럼즈펠드 쪽에 있던 이들인데, 곧 직장을 잃을 사람들이었고 대통령 당선자 오바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지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당시 내가 처한 상황이 이랬던 터라 클린턴 장관 측으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매우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우리는 그 주 후반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 만남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보다 일주일 전에 오바마 당선자가 클린턴에게 국무장관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사람이 놀랐다. 클린턴 상원의원은 더 놀랐다. 대통령 당선자 오바마와 그의 고위 자문단 그리고 빌 클린턴Bill Clinton 전 대통령의 충고를 받아들인 그녀는 마음이 다소 누그러져, 국무장관직을 수락했다. 클린턴과 그녀의 작은 팀은 국무부 건물Foggy Bottom, 미 국무부가 위치한 지역이 과거 ‘Foggy Bottom’으로 불렸고, 종종 국무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쓰인다_옮긴이 주 1층의 인수위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그녀는 브리핑 자료를 검토하고 외교 팀을 구성했다. 클린턴과 만나기로 한 전날 밤, 친구이자 당시 국무부 부장관 내정자인 제임스 스타인버그James Steinberg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시아나 정치-군사 관련 자리일 거야. 어떤 쪽이든 가능해. 그도 저도 아니면 〔정부 쪽 자리를 못 얻고〕 신미국안보연구소Center for New American Security의 예전 연구실에서 구경만 할 수도 있고.”
나무가 잎을 거의 다 떨군 날씨 좋은 초겨울 날이었다. 나는 국무부 건물의 출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만국기 홀이라 불리는 큰 입구를 지나 쏟아지는 빛과 마주쳤다. 그 공간은 다양한 문화가 섞인 시장처럼 열린 공간이었고 무척 매력적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외교관들이 약속 상대를 기다리며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국방부 시절을 뒤로하고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이 장면은 외교에 내재된 희망과 끝나지 않는 전쟁의 어두운 현실 사이의 아주 선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듯했다.
나처럼 약속이 있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기다리며 여기까지 온 내 삶의 궤적을 뒤돌아봤다. 나는 싱크탱크와 정부에서 일을 했고, 애스펀 전략 그룹Aspen Strategy Group 같은 엘리트 집단에도 몸을 담는 등 전형적인 워싱턴 정책 서클 경력을 걸어왔다. 나는 미국 정부에서 일하려는 열망이 꽤 강한 편이다. 하지만 내 경력은 여느 사람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나는 1990년대 초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를 했고, 구소련의 한 대학에서 공부했다. 학군후보생으로 해군 참모총장실에서 복무했고, 미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 연구위원 자격으로 국방부 본부에서 민간인 참모로 근무한 적이 있다. 내가 아시아를 처음 방문한 것은 해군 시절 아시아로 배치되었을 때다. 도쿄 남쪽 요코스카横須賀 해군기지에 잠시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미국 해군과 일본 해군이 함께 있는 것이 놀라웠다. 일본 구축함과 잠수함들이 미끈한 암회색의 미국 함정들과 나란히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기지에 있는 거대한 크레인들은 과거 일본 제국 해군이 1940년대 초 태평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당시 제작된 것들이다. 기지 주변 언덕에는 수십 년간 꼭꼭 감춰놓았던 동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분실된 무기들의 은닉처와 유골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직까지 떠돈다. 아시아의 어두운 시절 유산이다.
나는 1990년대 초 백악관 장학금을 받아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할 무렵 워싱턴으로 왔다. 처음에는 재무부에서 일했고, 그 후 국방부로 옮기기 전까지 백악관에서 일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가진 경제적·상업적 측면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 미국 간 무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행되는 협상들을 지켜봤다. 그리고 중국에 최혜국 대우를 해줄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백악관과 의회 사이 협상 역시 직접 경험했다.
2년간 워싱턴 생활이 끝나고 하버드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전화 한 통이 이후 내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유명한 교수이자 국제관계 전략가로 당시 학교를 잠시 비우고 국방부에서 국제 안보 담당 차관보를 하고 있던 조지프 나이Joseph Nye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는 내게 국방부로 와서 그의 아시아 팀을 맡아 ‘나이 이니셔티브Nye Initiative’를 실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 구상은 미일 간 안보 협력과 동맹을 재활성화하는 매우 중요한 정책이었다. 미일 동맹은 탈냉전 이후 다시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었다. 미국과 일본 모두 전략적 목표를 재정의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여기서 아시아 쪽으로 내 향후 커리어를 잡는 여정을 시작했다.
국방부에서 일한 5년 동안 나는 아시아 지역, 아시아의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뭔가 애매하고 명확치 않은 아시아적 정치와 외교에 대한 강한 열정을 키웠다. 우리 팀은 매우 뛰어났고, 나는 팀원들과 평생 친구가 되었다. 국방부에서 나는 B회랑의 오래된 사무실을 배정받았다. 가끔 사무실 천장 한구석에 6인치 정도 크기로 난 유일한 창을 통해 하늘을 살짝 볼 수 있었다. 근무를 시작한 첫날, 시설 팀 직원이 와서 사다리를 놓고 그 작은 구멍을 가로질러 막대를 설치했다. 나는 아무도 이 기밀 시설에 몰래 기어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고 그에게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대답했다. “이건 외부 사람을 막기 위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 밖으로 못 나가게 하려는 거지요.” 나는 여전히 내가 국방부에서 했던 일이 매우 보람 있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동료들과 많은 일을 함께했다. 중국과 군사관계도 수립했고, 대만 해협 위기에 대처할 전략도 만들었다. 1995년 강간 사건 이후 오키나와沖縄 군사기지 배치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고, 한-미-일간 최초의 3자 군사 회담을 여는 업무도 했다. 북한의 불안정한 상황에 대비해 동맹국들의 급변 사태 대응 계획도 만들었고, 베트남전쟁 이후 베트남과 첫 번째 군사 접촉도 맡아서 했다.
조지프 나이와 당시 국방장관인 빌 페리Bill Perry는 장관실 직원들에게 엄청나게 끈끈한 동료 의식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동맹 문제와 전진 배치forward presence 전략 문제에 집중했다. 이때 대통령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을 처음 만났다. 글로벌 여성 정상회의Global Women’s Summit를 앞두고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하는 클린턴에게 브리핑을 했다. 그때는 내가 나중에 그녀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그녀의 국무장관직 수행에 관해 논의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국무부 1층의 전이 공간에 위치한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거기 있는 몇 개의 작은 사무실에 클린턴 선거 캠페인에 몸담았던 패자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마치 조국을 위한 큰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워싱턴 사무실 빌딩에 버틸 수 있는 조그만 버팀목을 확보한 사람들 같았다. 처절한 내전 끝에 마지막 남은 게릴라의 본거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동아태국Bureau of East Asian and Pacific Affairs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동아태국이 여러모로 내가 꿈꾸던 직장이었지만, 거기서 일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국무부 6층 동아태국으로 향하는 입구에는 지난 세기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지낸 존경받는 외교관들의 흑백사진이 복도 양쪽을 장식하고 있다. 딘 러스크Dean Rusk, 윌리엄 번디William Bundy, 애버렐 해리먼Averell Harriman,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등이 액자 속에서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진정한 20세기 외교의 거물들이다. 내가 저 뛰어난 사람들의 무리에 낄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물론 이런 의심을 입 밖에 내본 적은 아직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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