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웃고 있군요
샌들을 벗어 드릴 테니
파도 소리 들리는 섬까지 걸어보세요
세월
하얀 민들레 곁에 냉이꽃
냉이꽃 곁에 제비꽃
제비꽃 곁에 산새콩
산새콩 곁에 꽃다지
꽃다지 곁에 바람꽃
소년 하나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네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해라
걷다가 시 쓰고
걷다가 밤이 오고
밤은 무지개를 보지 못해
아침과 비를 보내는 것인데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밭에 엎드려 한 노인이 시를 쓰네
| 시인의 산문 |
가난한 마을로 오는 푸른 기차
― 시를 시작하는 청춘들에게
봄, 비닐봉지에 담긴 은하수
ㄱ
징검다리를 걷습니다.
안녕, 미르!
징검다리에는 내가 붙여준 미르〔龍〕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늘의 용처럼 날아오르렴. 나는 늘 미르에게 말합니다. 미르에는 서른한개의 디딤돌이 있습니다. 이내가 낄 무렵 열두번째 디딤돌 옆의 작은 디딤돌에 앉습니다. 이 디딤돌 좌우에 갈대가 자랍니다. 해 뜨고 질 무렵 갈대 사이 작은 디딤돌에 앉는 걸 좋아해요. 앉아서 시도 쓰고 커피도 마시고 디딤돌과 이야기도 나눠요. 디딤돌에 부딪는 강물 소리 들으며 세상 이곳저곳 떠돌아다닐 적 생각도 하지요. 강 이름은 동천이에요. 해가 뜨는 쪽으로 흘러가지요. 당신 혹 이곳에 들러 나란히 앉을 생각 없는지요. 좋아요, 꼭 오세요. 사는 게 무엇인지, 어쩌다 시를 쓰게 되었는지, 세상의 꽃과 바람과 눈보라, 얼어붙은 대지와 새들의 노래에 대해 얘기해요.
ㄴ
한국전쟁 직후에 태어났지요.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순간을 당신의 방식으로 얘기해주었습니다. 추석 지나고 첫서리 내린 날 저녁 밥숟가락을 놓은 뒤. 아이를 원치 않았던 어머니는 독한 금계랍을 물도 없이 몇 번이나 삼켰다는군요. 아이는 그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못할 짓을 했구나. 아이에게 어머니는 늘 미안함을 지녔습니다. 바람이 불 때, 배가 고플 때, 하늘의 별을 볼 때 어머니의 촉촉한 눈망울이 떠오릅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저 지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시도 쓰고 여행도 하고 학교에서 이십년 동안 시를 가르쳤지요. 어머니 생각하며 시 몇편 썼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몬순에 꽃이 피네
꽃에서 엄마 냄새 나네
아지사이
아지사이
열일곱 우리 엄마
수국에 입 맞추네
― 「수국」 부분
처녀 시절 어머니가 수국 곁에서 흑백사진 찍었습니다. 어머니는 수국을 아지사이라고 불렀습니다. 수국도 예쁜 이름이지만 아지사이는 더 예뻐요. 아지사이라고 말할 때 어머니 생각이 나지요. 어머니가 떠난 은하수 생각도 나요.
엄마는 소를 타고
지평선 쪽으로 계속 갔고
나는 강나루에서 내려
엄마를 향해 손 흔들었다
해가 지고
바람 속에서 호두 냄새가 났다
호두 바람 속에서는 펌프 샘 가에 앉아 울던
엄마의 눈물 냄새가 난다
― 「호두 바람」 부분
보리 익는 냄새 좋은 날 어머니와 함께 강을 따라갔습니다. 운전하던 내게 어머니가 말했지요. 길이 끝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말도 기억도 추억도 다 망실한 줄 알았지요. 끝까지 함께 가요, 라고 말하지 못한 큰 미안함 내게 있습니다. 함께 지내지 못했던 오십년 세월, 갈라선 이데올로기도 철조망도 없는데 우리에게 금계랍의 강물 있었습니다.
ㄷ
네 살 무렵 기차 여행을 했습니다.
만주에서 돌아와 벽돌공장 인부로 일하는 외삼촌이 나를 데리고 일터로 간 거지요. 밤 기차 안에 물건을 파는 이가 있었는데 공생원이라 불렀습니다. 외삼촌이 한쪽 팔에 은색 갈고리가 달린 공생원으로부터 사탕 봉지 하나를 사주었습니다. 반짝이는 갈고리가 무서웠지요. 전쟁 때 팔을 잃은 사람이란다. 봉지 안에 색색의 별사탕이 들어 있군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하양. 가슴에 꼭 껴안았지요. 창밖에 별들이 반짝였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한번 보고 봉지 속의 별사탕을 한번 보고 그렇게 밤 기차는 흘러갔습니다. 내가 지닌 최초의 기억, 아름다움에 대한 첫 인식이지요. 추석 지나고 첫서리 내린 날 저녁 밥숟가락을 놓은 뒤, 나는 내가 태어난 시간이 참 좋습니다.
ㄹ
미르 주위에 봄꽃들 환합니다.
민들레 금창초 꽃다지 바람꽃 별꽃 산새콩 냉이꽃 현호색 큰개불알꽃. 봄꽃들을 보고 있으면 내 몸이 바람이 되는 것 같아요. 꽃들을 가만히 흔들고 싶은 거지요. 꽃들의 귀에 대고 아침 햇살 속에 쓴 시들을 읽어주고 싶은 거지요. 난 냉이꽃을 좋아해요. 동천에 사는 참새들, 봄날 아침식사로 뭘 먹는지 아세요? 냉이꽃이에요. 냉이꽃을 콕콕 쪼아 먹는 참새들 보면 요정 같아요. 꽃이 지고 씨가 여물면 참새들은 씨를 먹어요. 콕콕콕 참새들이 냉이 씨를 먹는 거 보며 지난밤 쓴 시 읽어줘요.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해라
걷다가 시 쓰고
걷다가 밤이 오고
밤은 무지개를 보지 못해
아침과 비를 보내는 것인데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밭에 엎드려 한 노인이 시를 쓰네
― 「세월」 부분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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