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담겨 있던 구절이다. 나에겐 문학이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요약해주는 말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문학과 관계 맺은 사람치고 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컨대 이 책에 수록된 어떤 글에서 시인 오든은 그가 아폴론의 시대라 부른 자기 당대에 문학이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장난스럽게, 그러나 진지하게 충고한 적이 있다. 그 충고는 당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당대를 넘어선 것이기도 하다. 문학은 당대에 뿌리를 두고서 당대가 넘으려다 넘지 못한 불완전성, 뚫고자 했으나 다 뚫지 못한 한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당대와 소통하면서 당대를 넘어선다. 한계는 그저 한계가 아니라 다음 시대의 잠재성으로 남는다. 문학에 대한 나의 믿음은 그곳에 있다.
2021년 2월
도정일
지금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1. 헤르메스의 십계명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 6월, 시인 W. H. 오든은 하버드대학 졸업식전에 초대되어 축시 한 편을 낭송한다. 1946년은 오든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국적을 옮겨 ‘미국 시인’이 된 해이기도 하다. 어떤 행사를 기리고 축하하는 소위 행사시라는 것의 운명은 짧다. 행사가 끝나기 무섭게 잊히고 아무개 시인이 그날 무슨 식전에 나와 시를 읊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것이 대체로 행사시의 운명이다. 그런데 오든의 그날 축시는 다르다. 그 시는 육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기억해주고 추억처럼 찾아 읽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 선집에도 올라 있다. 어째 그럴까? 시 자체가 희극적 기지와 농담을 넘치게 담고 있어서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 시는 축시라기보다는 미국에 닥칠 한 시대에 대한 시인의 놀라운 예언과 예지를 담은 경고의 시이자 우려의 시이다. 온 나라가 승전의 기쁨과 자신감에 들떠 있던 그해 1946년, 시인은 미국 사회에 드리운 어떤 위험의 그림자에 주목한다. 그것은 제도, 권력, 전문가, 관료, 시장주의자들이 미국을 쥐고 흔드는 ‘부드러운 독재’의 위험성이다. 이 위험을 몰아오고 있는 자들을 시인은 아폴론의 추종자라는 의미에서 ‘아폴로니언’이라 명명한다. 그날 행사가 졸업식이었기 때문에 오든의 시는 특히 대학의 미래에 집중된다. 아폴로니언들이 미국의 대학을 장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학은 어찌되는가? 여기서는 핵심을 찌른 두어 줄의 내용 인용만으로 충분하다. 아폴로니언에게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유용한 지식’요즘 한국 용어로는 ‘실용 지식’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대학을 점령하는 순간 “진리는 유용한 지식에 자리를 내주고” “상업정신”이 특별히 강조될 것이며 강의 화목들은 “광고, 보건, 스포츠” 같은 실용 과목들로 채워질 것이다 ― 그날 하버드 청중에게 오든이 반쯤 농담처럼 던진 경고는 이런 것이다.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시인의 경고가 그냥 농담이 아니라 대학을 포함한 미국 사회 전체의 근접 미래를 내다본 예언적 진담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본론? 무슨 본론?) 나는 오든의 축시 얘기를 좀더 하고 싶다. 대학 졸업식 축사가 (그게 축사다운 축사일 때) 졸업생들에게 한번 더 짚어주고 가야 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대학을 다녔는가, 대학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마지막으로 환기시켜주는 일이다. 오든 같은 사람이 볼 때 대학의 최고 목적은 자유로운 정신을 키우고 그 정신의 내면 구축을 도모하는 일이다. 그런데 대학이 아폴론 추종자들에게 장악되면 자유로운 정신도 내면 구축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오든의 축시는 젊은이들이 아폴론적 질서, 권력, 제도 앞에 엎어져 순종만 할 것이 아니라 아폴론에 맞서는 헤르메스의 분방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키우고 유지할 것을 당부한다. 니체가 한때 아폴론 대 디오니소스라는 두 종류의 충동 모형을 대립시켜 그리스 예술의 비밀을 해명하려 했다면, 오든은 아폴론 대 헤르메스라는 대조 구도로 두 종류의 대립적 정신상을 담아낸다.(신화의 헤르메스는 태어나자마자 아폴론의 소떼를 훔쳐 달아나고 아비 제우스 앞에 불려가서는 “저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어른 아폴론의 소를 훔칩니까?”라고 둘러대어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도둑질로 기성 질서를 교란하고 거짓말로 재판제도에 구멍을 낸다. 이런 이력 덕분에 헤르메스는 도둑과 거짓말쟁이들의 수호신이 된다) 아폴론과 헤르메스를 대립시킴으로써 오든이 포착하고자 한 것은 두 개의 상반된 감성과 세계관,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사회적·정신적 비전 사이의 화해하기 어려운 충돌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국 사회가 아폴론 추종자들과 헤르메스 지지자들 사이의 또다른 전쟁을 겪게 될 것임을 시인은 예감한다. 축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든은 젊은이들에게 ‘헤르메스의 십계명’이라는 대목을 들려준다. 그 대목은 그날 졸업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을 수많은 아폴로니언을 향해 오든이 연신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거리며, 그러나 진지한 목소리로 시대의 면상에 대고 읽어내려갔을 법한 시인의 딴지 걸기, 혹은 선전포고 같은 것이다. 일부를 생략하고 소개하면 그 십계명의 주요 대목은 이러하다.
그대들은 학장이 하자는 대로 하지 말라
그대들은 ‘교육’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지 말지어다
프로젝트를 숭배하지 말며
행정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말지어다
그대들은 설문지에 답하지 말며
세계 문제 퀴즈에도 응하지 말라
그대들은 아무 시험이나 치자는 대로 치지 말며
통계좋아하는 자들과 한자리에 앉지 말라
사회과학 같은 것에 빠져들지 말라
그대들은 광고회사 녀석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
기회를 선택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대들은
이상하고 불리한 쪽을 선택하라
오든이 육십 년 전 축시에 붙인 제목은 ‘어느 수금 아래로Under Which Lyre’이고 부제는 ‘시대를 위한 반동적 주장A Reactionary Tract for the Times’이다. 이 제목과 부제는 한 폭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한쪽에는 아폴론이 의기양양하게 가짜 수금竪琴을 타며 노래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한때 아폴론을 골탕 먹였던 조숙한 천재 헤르메스의 노래가 들린다. 시인은 묻는다. 어느 쪽 노래의 캠프에 설 것인가?
2. 시대와 문학
지금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잘 들여다보면 이 질문에는 질문 자체의 내적 상처가 감추어져 있는 듯하다. 이 시대 문학의 전망에 대한 여러 다른 목소리들 사이의 갈등에서 찢어진 상처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회의의 목소리도 있고 확신의 목소리도 있어 보인다. 회의의 목소리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쓰고 시집 내서 부디 잘 팔리기를 기도하는 것 말고는? 진지한 문학의 날은 저물고 있다. 곧 밤이 닥칠 것이다. 이런 회의론을 반박하고 나서는 목소리도 있다. 확신의 소리다. 할 일이 없다니 무슨 소리냐, 책 많이 팔리고 안 팔리고가 그리 중요한가? 어느 시대이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말을 바로 하자면 지금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할 때다. 자기확신을 잃어버린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자신 없으면 시대 탓 하지 말고 4대강 찾아가 삽질이나 하라. 시대가 어렵다고 언제 문학이 기죽은 적 있느냐? 이런 옥신각신 사이에 끼어드는 제삼의 소리도 있다. 지금이라니, 지금이 뭐 어때서? 소설은 잘 팔리고 있고 문학 독자는 건재하다. 독자는 오히려 좋은 문학을 기다리고 있다. 시대의 물길이 바뀌었다면 그 바뀐 물길을 타면 된다. 그게 지금 문학의 할 일 아닌가? 가능성을 개발하라.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고 물이 깨끗하면 귀를 씻으라고 굴원이 옛날 옛적에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지난 십 년 혹은 십오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 발생한 사회문화적 환경 변화를 초점에 두고 말하면, 지금은 문학이 축복받는 시대는 아니다. 지금은 문학의 시대가 아니라 문화산업의 시대, 대중문화의 시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장의 시대이다. 문화산업, 대중문화, 시장 ― 이 세 가지는 현대 한국인의 문화적·정신적 삶을 바꿔놓고 있는 변화의 주요 진원이고 추동자이며, 문학의 사회적·문화적 위상을 약화시키는 데도 결정적 영향을 준 외적 요인들이다. 문학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문화 형식이 아니고 대중의 문화적 삶에서도 중심적인 향유 대상이 아니다. 문학의 이 같은 위상 약화는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무력감을 안겨주고 ‘지금은 문학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곤경을 호소하게 한다. 그러나 너무 기운 빠지기 전에 미리 좀 말하자면, ‘기업하기 좋은 시대’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에서의 ‘문학하기 좋은 시대’라는 것이 있겠는가? 사실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문학은, 한국에서건 어디 다른 곳에서건 간에, 문학 그 자체의 행복을 위해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나팔 불어주고 꽃을 뿌려주는 축복의 계절을 가진 적이 없다. 문학하기 좋은 시대라는 것 따로 있고 문학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것이 또 따로 있어서 시절이 좋으면 번성하고 시절이 나빠지면 말라비틀어져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런 문학에 ‘문학’이라는 명칭을 붙여줄 수 있겠는가? 지금은 문학이 축복받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불가능한 시대도 아니다. 문학이 어려운 시대에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역설적 화두를 생각해보는 것이 지금 문학의 할일 가운데 하나이다.
문학의 위상 약화에는 ‘문학의 가치와 품위’가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문제가 포함된다. 문학의 가치는 창작자의 영광이나 교양인의 자본이라는 데 있지 않고 개별 작품의 시장가치에 있지도 않다. 근본적 차원에서, 어떤 장르와 형식을 취하느냐에 별 관계없이, 문학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대면해야 하는 크고 작은, 그러나 대부분 중요한 선택들 사이의 (이를테면 진실과 비진실, 자유와 비자유,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문명과 자연, 고결한 것과 비열한 것,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같은, 그러나 사실상 무한수의) 긴장과 모순과 딜레마를 포착하고 인간 정신과 현실 사이에 벌어지는 교섭의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들을 표현해낸다. 이것이 문학이 수행하는 근본적 작업이다. 가장 사소해 보이는 문제를 다룰 때에도 문학의 관심은 근본적인 것에 가닿아 있다. 문학의 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작업에 부여되는 의미가 ‘문학의 가치’이며, 그 가치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 ‘문학의 품위’이다. 문학은 철학 논설도 사회학 논문도 아니고 윤리학 강의도 아니며 도덕론은 더더구나 아니다. 문학은 순전한 심미적 관심에만 몰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문학은 이 모든 지적·심미적·윤리적 탐구의 화두들을 문학의 방식으로 끌어안음으로써 그 자신의 가치체계를 구성하고 그 자체의 독특한 품위 수준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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