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인류 기원의 진실
이 책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근원에 관한 이야기. 문명이 시작되기 전, 우리 선조들이 동굴 벽에 황토로 벽화를 그리기 전, 그들이 불을 다루기 전, 심지어 그들이 이야기에 매혹되기 전의 이야기.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발명품으로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누구든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의 핵심을 완전히 잘못 짚은 적이 있다. 사람들이 세상의 냉혹함과 무자비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말 개를 닮은 세상doggy-dog world이야”라고 하면,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무슨 말이야. 개를 닮은 세상은 진짜 좋은 세상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의문은 숙제 때문에 풀렸다. 내가 숙제에 ‘개를 닮은 세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선생님이 박장대소를 하며 그게 사실은 ‘개가 개를 먹는 세상dog eat dog world’이라고 바로잡아 주신 것이다.
이야기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들려주지만, 흔히 그 이야기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이 결정되기도 한다. 인류의 기원 이야기는 항상 똑같고 설명하는 방식도 뻔하기에 새로울 게 없다. 출발점을 보여주는 지도는 어디로 갈 수 있는지를 한정한다. 그 이야기가 박해의 역사라면 우리는 나머지 삶을 희생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수한 것으로 등장하면 다른 종족이 열등하다는 증거가 차고 넘칠 것이다. 어떤 커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명확히 알고 싶으면 그 커플에게 어떻게 만나게 됐느냐고 물어보라. 그들의 이야기가 다정함과 상호존중과 기쁨의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그런 분위기에서 멀어지는가? 두 사람이 권력다툼에 몰두하고 고집불통이라면 이야기가 ‘그 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선사시대 선조들은 굶주림과 질병, 맹수들, 다른 부족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며 살았다. 가장 강하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치열하고 가장 무자비한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그들의 유전자를 후손들에게 남겼다. 이렇게 운 좋은 사람들마저도 수명은 35세 전후였다. 그러다 1만 년쯤 전에 어느 천재가 농업을 발명했고, 그로 인해 인류는 야만적이고 비참한 삶에서 풍요로운 문명, 여가, 교양, 부유함을 누리는 삶으로 발전했다. 어쩌다 퇴보할 때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조건은 그후로 계속 좋아졌다.
1651년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문명이 발생하기 전에는 인간의 삶이 ‘고립되고, 곤궁하고, 위험하고, 폭력적이었으며, 수명도 짧았다’고 주장했다. 홉스의 이런 시각은 350년 후 영어로 쓰인 학설 중 가장 유명한 학설 중 하나가 되었고, 문명론의 기본적인 토대로서 끈질기게 되풀이됐다. 이 ‘영속적 발전론Narrative of Perpetual progress’은 문명이 비문명보다 우월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발전’이 옳다는 믿음은 사실상 오늘이 어제보다 낫다는 믿음이므로 발전이라는 개념은 신념의 문제로 탈바꿈하고, 이에 의문을 제기하면 발전지상주의자들의 격분에 맞닥뜨려야 한다. 하지만 영속적 발전론은 공기와 물, 토양을 오염시키듯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세계와의 관계를 오염시킨다. 이런 관점은 천년 동안의 노예제와 수백 년 동안의 식민주의도 합리화한다. 또한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 자신의 동물적인 몸에 대한 수치심과 혐오감, 자연세계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우리가 이뤄낸 이 모든 발전을 당연히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지금을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시대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혹시 우리가 불만이나 절망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절대 이 문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잘못이다. 일을 열심히 안 했거나, 적절한 상품을 사지 않았거나, 딱 맞는 영양제를 먹지 않았거나, 정확한 운동법을 따르지 않았거나, 우리에게 맞는 차를 사지 않았거나, 물을 충분히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에 실린, 전형적인 신홉스주의적 관점을 취한 한 논문은 이렇게 단언했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과 하나가 된 게 아니었다. 자연은 그들을 죽이려고 했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했다.” 봤는가? 자연이 인간을 미워했다는 것이다! 2014년에 나온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Utopia for Realists》은 이렇게 시작한다. “간단한 역사 공부로 시작해보자. 옛날에는 모든 게 지금보다 안 좋았다. 세계 역사의 99%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인류의 99%는 빈궁했고, 굶주렸고, 지저분했고, 두려움에 떨었고, 어리석었고, 병에 걸렸고, 못생겼다.” 못생기기까지?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에 실린 최근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류는 항상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여 전반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켜 왔다. … 과학기술의 발달은 노동자들의 하루 일감을 늘렸고, 이는 생산성 증가로 이어져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 이런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요지도 모두 똑같다. 옛날은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살기 힘들었고 문명화 덕분에 인류의 삶은 점점 좋아졌으며 앞으로도 계속 좋아지리라는 것이다.
문명화 이전 시대에 대한 홉스의 확신은 외부적인 환경뿐 아니라 비문명인들의 정신을 매도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선조들은 형편없고 절망적인 삶을 살았던 형편없고 절망적인 존재였다. 권위 있는 조직의 ‘교육’ 혜택을 입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은 폭력성, 잔인함, 불신으로 물들 거라는 이런 믿음은 학문의 외피를 입었을 뿐 기독교의 원죄설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원죄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수치심, 자기혐오, 의심이라는 일종의 심리적 빚을 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착각은 자기복제와 자기실현self-fulfilling을 한다. 즉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이 잔혹한 짐승과 비슷하다는 세뇌 때문에 그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 사이에 갈등을 부추기는 이론에서 해방되려면 영속적 발전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봐야 한다. 현재의 영속적 발전론은 문명의 혜택을 과장하고 그로 인한 수많은 희생에는 눈을 감으며 합리적인 의구심도 신성모독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1부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실제 삶에 관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을 살펴본다. 이어서 영속적 발전론 같은 잘못된 정보가 낳은 가치관이 현대인의 삶에 어떤 트라우마와 혼란, 고통을 초래했는지를 들여다볼 것이고, 제4부에서는 영속적 발전론보다 더 행복한 결말을 기대할 수 있는, 새롭고 더 정확한 역사 이야기 방식을 소개한다. 우리가 정확한 이야기를 하면 그때는 진정 우리의 미래가 ‘개가 개를 먹는 세상’보다는 ‘개를 닮은 세상’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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