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코끼리 고아원
코뿔소 노든의 말년은 극진한 대우를 받는 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 생각이고, 노든 자신은 한시도 쉬지 않고 붙어 있는 인간들과 그의 몸을 찔러 대는 바늘들, 그리고 그렇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노든을 보러 왔다. 그들은 노든을 졸졸 쫓아다니며 노든이 언제 무엇을 먹는지를 확인했고, 노든의 기분이 어때 보이는지 살피고, 노든이 기운이 없을 때에는 다시 기운이 나도록 약을 주었다.
그들은 노든이 얼마나 먹고 얼마만큼 잠을 자는지를 알았고, 너무 춥거나 덥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알았다. 사람들은 노든에 대해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들이 노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노든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온 세상이 노든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노든의 처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슬픈 것은 노든 자신도 그의 처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코끼리 코였다. 노든이 눈을 떴을 때 긴 코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노든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다른 식구들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 긴 코들이 노든의 첫 가족이 되어 주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곳에는 나이 든 코끼리들이 몇몇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어린 코끼리들이었다. 어린 코끼리라고 해도 코뿔소인 노든보다는 덩치가 훨씬 컸다. 코끼리들은 먹는 일, 씻는 일, 서로를 돌보는 일…… 거의 모든 일에 코를 사용했다. 반면 코뿔소인 노든은 사용할 긴 코가 없었다. 파리를 쫓을 때 펄럭일 큰 귀도 없었다. 노든은 그저 자신이 어리기 때문에 코와 귀가 덜 자란 줄로만 알았다. 코끼리들이 늘 그렇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너만 했을 땐 그랬어. 조급해하지 마.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빨리 나이를 먹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노든의 코와 귀는 자라지 않았다. 대신 뿔이 있을 뿐이었다. 노든은 어렴풋이 자신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노든의 코나 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리가 따르던 할머니 코끼리는 이렇게 말했다.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노든은 한참이 지나 뿔이 어느 정도 자라났을 때쯤 그곳이 코끼리 고아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족을 잃은 어린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곳이었다.
왜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뿔소 한 마리를 보호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노든의 삶에서 가장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노든은 허기질 일도 없었고. 위험과 마주칠 일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언제나 코끼리들이 함께 있었다. 코끼리들은 긴 코가 없는 노든에게 코로 흙이나 물을 뿌려 주고, 높이 자란 나뭇가지를 꺾어 주기도 했다. 노든은 코끼리들과 함께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먹고, 강에서 목욕을 하고, 날이 저물면 서로 등을 맞댄 채 잠들었다.
노든은 자신이 코뿔소의 겉모습을 가진 코끼리라고 생각했다. 코끼리는 강했다. 마음만 먹으면 바람보다 빨리 달려서 상대를 받아 버릴 수도 있었고, 물소 열 마리보다 무거운 몸통으로 상대를 깔아뭉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면 그것은 곧 싸움으로 번졌고, 싸움은 죽음을 부르는 일이었다. 코끼리는 스스로의 목숨도, 남의 목숨도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코끼리들의 지혜였다. 노든은 현명한 코끼리들이 좋았다.
한번은 늘 고아원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까마귀가 노든과 닮은 코뿔소들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노든은 자신과 닮은 존재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까마귀의 말에 따르면, 그들도 노든처럼 아카시아잎을 먹고, 진흙을 몸에 바르고, 코뿔을 나무 기둥에 긁는다고 했다.
노든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그들을 궁금해했지만 이내 그 모든 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코뿔소보다 코끼리가 훨씬 더 친근했고, 언젠가 멋진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볼 때면 자연스럽게 늠름한 코끼리가 그려졌다. 코뿔소로 태어난 그는 그렇게 코끼리로 살아갔다.
하지만 코끼리 고아원이 모든 코끼리의 안식처인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 코끼리처럼 코끼리 고아원에서 평생을 보내는 코끼리도 있었지만,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코끼리도 있었다. 바깥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사람들은 어린 코끼리가 어느 정도 자라거나 부상에서 회복하면 사방이 철망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데려가 탕! 탕! 탕! 큰 소리를 내면서 찌릿찌릿한 막대기로 찌르고 무섭게 굴었다. 그러다가 다시 상냥하게 돌아와 방금 전까지 괴롭히던 코끼리에게 먹이를 건넸다. 그러면 바깥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코끼리는 겁을 먹고 도망가는 연기를 했고, 고아원에 남고 싶은 코끼리는 망설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먹이를 먹었다.
사람들은 겉에 드러난 것만을 보고 믿는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바보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테스트로 코끼리를 시험했지만, 코끼리는 언제나 심사숙고 끝에 스스로의 앞날을 직접 선택했다.
노든에게도 선택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든은 늘 선택의 날이 오면 고아원에 남는 쪽을 택하리라고 생각해 왔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낸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새로 들어오는 어린 코끼리들을 도와주면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자꾸만 머뭇거리게 되었다. 그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노든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에게는 긴 코 대신 뿔이 있었고, 왜 자신에게 뿔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전에 까마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고아원 밖으로 나가 다른 코뿔소들을 만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든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고아원에 남는 것을 주저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는 코끼리답게, 지혜롭고 현명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무모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되뇌었다. 마음을 다잡은 노든은 할머니 코끼리에게 고아원에 남겠다고 말했다. 할머니 코끼리가 기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테스트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노든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코끼리 고아원에 남고 싶은 마음과 바깥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코끼리답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그가 코끼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와닿았다. 코끼리로 태어났으면 모든 게 쉬웠을 것이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코끼리들이 긴 코를 천천히 흔들며 노든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다음 날, 테스트가 끝나고 사람들은 노든을 바깥세상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떠나기 전, 코끼리들이 코끝으로 노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를 잊지 마.”
“몸조심해.”
“그동안 고마웠어.”
“때가 오면 또다시 만나게 될 거야.”
고아원에 있는 코끼리 하나하나가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노든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다. 노든은 코끼리들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했지만, 당시에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그때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늘 아쉬워했다.
나는 언젠가 노든에게, 그때 고아원을 나오기로 한 선택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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