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태일과 김윤동
전태일, 그는 1970년 11월 청계천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스로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해 당시의 척박한 노동 현실에 경종을 울렸다. 그 사건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사실상 기점이 되었고, 이후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소외된 노동자들의 고통과 진실을 대변하는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그는 나보다 세 살 위였다. 그가 스스로의 몸을 불태웠을 당시 나는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하고 있었다. 분신 사건이 있던 11월에도 나는 아마 한두 번은 그곳 청계천의 헌책방을 찾아 헌책을 기웃거렸을 것이다. 물론 그 길모퉁이에서 어느 이름 없는 재단사가 비극적으로 죽어갔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어쩌면 그가 불타 쓰러졌던 자리 위를 무심코 걸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죽음을 안 것은 아주 오랜 시간 후, 어쩌면 10년도 더 세월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글, 탄원서, 메모 쪽지 등을 읽으며 나는 감동과 수치에 몸을 떨었다. 그의 글을 읽고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은 행적을 재구성해본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삶 속에 고통스럽게 그러나 너무나도 명확히 편성해 넣었던 것이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상상력의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죽음을 향해 감연히 나아가는 그의 마지막 행적에서 2,000년 전 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한 사나이의 마지막 행적을 읽곤 했다. 완전히 같은 차원은 아닐는지 몰라도 또 어느 누구도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 거기에 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김윤동, 그는 유명인이 아니다. 그냥 오늘날을 사는 평범한 한 시민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이종사촌 형이다. 나보다는 대략 열 살 정도 위로 청계천에서 장사를 하며 평생을 살았다.
옛날 청계천 헌책방에 책을 사러 갈 때, 나는 으레 형님의 가게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가게는 겨우 서너 평 정도밖에 안 되어 내게 앉을 자리를 권하기 위해서는 형님과 형수님 두 분 중 한 분은 일어서야 했다. 츄리닝 같은 것을 팔기도 하고 잠바 같은 것을 팔기도 했는데, 품목은 자주 바뀌었지만 대체로 영세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값싼 의류였다. 가게는 늘 매캐한 포르말린 냄새에 절어 있었다. 아침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소매상들을 상대하느라 캄캄한 꼭두새벽에 문을 열어야 했다. 험하고 고생은 되었지만 경기가 좋으면 고생한 만큼 돈을 벌기도 하는 것이 청계천의 장사였다.
언젠가도 헌책을 사러 갔다가 가게에 들러 윤동이 형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어쩌다 화제가 전태일에 미치게 되었다. 그때 윤동이 형이 갑자기 정색하더니 “전태일이 그놈 여기 청계천 바닥에서 장사하는 사람치고 그놈 욕 안 하는 사람이 없어” 하며 뜻밖에 전태일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오래되어 그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대충 요지는 전태일이 무슨 대단한 노동투사처럼 떠받들어지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뜩이나 어려운 청계천 바닥을 더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두 노동자들 피나 빨아먹는 악덕업자로 만들었다는 취지였다.
그날 우연히 전태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후 내게 풀리지 않는 화두로 남게 되었다. 전태일의 글과 행적이 나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파문을 형성했다면 윤동이 형의 말은 그 옆에 또 하나의 파문을 그려준 것이다. 두 파문은 번지면서 서로 겹쳐지고 서로 방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전태일 못지않게 윤동이 형도 나의 세상 체험 중 어떤 특정 영역에 걸쳐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동이 형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서울에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서울에 가면 네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모가 있으며 시간이 되면 만나 인사를 드리라고 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이모와 이종형은 당시 동대문 바로 옆의 좁은 골목 안에서 조그만 의류 가게를 하고 있었다. 아직 종로5가로 옮기기 전이었다. 콧구멍만 한 가게 안쪽에 방 한 칸이 달려 있었고 그 단칸방에 이모와 형님 내외, 어린 두 딸이 같이 살고 있었다. 밤에 잘 때 이모는 그 방에서 가게 천장 위로 공간을 내어 억지로 튼 다락 위에서 주무셨다.
나는 주름살만 조금 더 많다 뿐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분이 이 세상에 또 한 분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할 겨를도 없이 이모님이 좁고 캄캄한 다락에서 주무신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이모네가 천신만고 끝에 그나마 궁둥이라도 붙일 터전을 마련한 결과라는 것을 안 것은 좀 더 지나서였다.
이모는 일제의 수탈이 한창이던 때, 결혼한 남편을 따라 만주로 떠났다. 국내에 남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불확실하지만 미래를 찾아 떠나는 것이 그나마 희망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만주에 도착해 첫아들을 낳고 남편은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역만리 타방에서 혈혈단신 여자가 젖먹이 하나를 키우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모는 한때 아편 장사도 했다고 한다. 만주가 온통 아편에 절어 아편이 담배보다 흔하던 때였다. 그리고 어떻게 다시 국경을 넘어 서울로 오게 되었는지 서울에 와서 무엇으로 호구지책을 삼았는지 역시 모른다. 어쩌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때 민족 대다수의 삶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따라 디들 속수무책으로 떠밀려 가고 있었으니까.
윤동이 형은 간신히 초등학교를 마쳤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형은 그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했다. 공부라도 못했으면 몰라도 6학년 때 반에서 늘 1, 2등을 다투었다니 가난이 왜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대략 열서너 살이었을 텐데 중학교에 가지 못한 윤동이 형은 그때 무엇을 했을까? 나는 물어보지 못했고 형도 말해준 적이 없다. 어쩌면 어린 윤동 군도 전태일 군과 마찬가지로 청계천 바닥에서 시다로 미싱보조로 환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다락방 공장에서 휴일도 없이 일했을지 모른다.
내게는 전태일이나 김윤동이나 다 같이 내 의식에 박혀 나를 자극하고 부끄럽게 하는 가시였다. 그런데 왜 사람 좋은 윤동이 형은 전태일을 그렇게 미워할까? 오랫동안 그것은 혼란스러운 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있던 1970년, 형님은 30대 초반의 나이로 늙은 어머니와 처 그리고 세 명 정도로 불어난 아이들을 포함해 6인 가정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젊은 가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 방에 여섯 명이 시는 악몽과도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쩌면 자신도 다락방 공장을 경영하며 어린 소년 소녀들을 가혹하게 부렸는지도 모른다.
전태일과 김윤동. 나는 이제 그들의 관계를 더 이상 정리하지 않으려 한다. 한 사람은 죽어 어언 40년이 지났고 한 사람은 살아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물론 한 사람은 그 죽음을 통해 무수한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울림을 남겼다. 조영래, 문익환 같은 굵직한 정신들이 그 울림 속에서 태어났고 돈으로 뒤범벅된 이 세상을 그래도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지 않게 하는 데 그가 보내는 울림은 지금도 소금 알갱이처럼 박혀 반짝이고 있다.
윤동이 형은 결코 그렇지는 못했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만년의 이모가 번듯한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입고 서러운 초년고생의 한을 다소라도 푸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아랫도리를 발가벗은 채로 동대문 옆 더러운 골목길 진창을 맨발로 아장거리던 어린 계집아이들도 자라 그중 한 녀석은 인기 있는 방송 작가가 되었다. 그 역시 이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육친에 미친 윤동이 형의 작은 울림의 결과일 것이다.
그 점에서 전태일과 김윤동은 분명히 다르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 고만고만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시장의 서럽고 배고프고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다는 이 동질성은 여전히 남는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동질성이 그들의 서로 다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이 나의 풀리지 않는 화두를 포함하여 점점 하나로 휘덮어가는 것을 느낀다.
줌아웃Zoom out, 어쩌면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바뀌어가는 나의 인식에 가장 유사할 것 같다. 그리고 왜 많은 영화감독이 그들 영화의 가슴 저미는 마지막 장면을 구태여 줌아웃으로 처리하는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화면 속 수많은 정경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까마득히 멀어지면서 이제 전태일과 김윤동은 하나의 점처럼 보인다. 흑백으로 낡아가는 1970년대와 함께. 이제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그 시대의 설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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