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구두를 기다리다
─ 김성일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도로시를 드디어 마주한 오즈의 마법사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제사장의 목소리가 차가운 하늘에 울려퍼졌다. 부족민들은 숨을 죽이고 다음을 기다렸다. 푸른소는 자기 차례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 때문인지, 동지 축제의 붉고 푸르게 빛나는 전깃불 장식 때문인지, 약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무대 아래에 앉은 부족민들 사이에 두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푸른소는 힘을 내어, 연습한 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짜요! 마법 따위는 쓸 줄 몰라요.’”
푸른소는 제단의 괴물 인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괴물은 천장에서 밧줄로 늘어뜨렸을 뿐이오. 저 불덩이도 천뭉치를 기름에 적셔 불을 붙인 속임수라오.”
더운가랑비가 다음을 이어받았다.
“로봇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오즈의 마법사가 가짜였다니! 나는 이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헝겊인형은 뇌를 가질 수 없고, 산고양이는 용기를 얻을 수 없게 되었소.’”
제사장이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도로시 또한 칸사스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낙심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까?”
제사장은 모두가 느낄 길이의 침묵을 두었다가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그렇지 않았다! 위대한 조상 도로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마법사를 질타했다.”
그리고 푸른소가 내내 기다렸던, 붉은구두의 맑고 높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도로시는 이렇게 말했다. ‘마법사여, 거짓으로 세상을 속이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나는 칸사스로 돌아가서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당신이 마법사가 아니라면 누가 나를 그리로 보내 줄 수 있소?’”
부족민들이 잠잠해졌다. 기대감이 손 끝에 만져질 것만 같았다. 푸른소도 숨을 죽이고 다음을 기다렸다.
사실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마법사는 풍선을 타고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도로시는 결국 거기에 타지 못한다. 하지만 남쪽으로 가서 악한 마녀를 물리치고, 그동안 신고 있던 빨간 구두가 마법의 구두였음을 알아채고 용맹한 충견 토토와 함께 칸사스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즈에서 가져 온 보물과 지식으로 이 부족의 기틀을 세운다.
매년 겨울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무대를 만들었고, 제사장과 제자들은 그 위에 올라 부족의 신화들을 이야기했다. 구성은 매년 달랐지만, 칸사스족의 기원을 밝히는 위대한 조상 도로시의 이야기는 빠지는 법이 없었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리던 푸른소는 제사장의 황급한 손짓을 보고서야 자기가 붉은구두의 물음에 대답할 차례임을 깨달았다. 푸른소는 벌떡 일어나 마법사의 대사를 외쳤다.
“마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풍선을 타고 하늘의 구름처럼 여기로 왔소! 당신도 풍선을 타고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이도 어른도 때로는 긴장하여 숨을 크게 들이쉬고, 때로는 소리내어 웃었다.
제사가 끝났다. 발을 구르고 무릎을 치는 환호가 들려왔다. 푸른소를 비롯한 제자들은 제단에서 내려왔고, 제사장은 무대 중앙에 서서 마지막 축복의 말을 했다.
제사를 마치면 으레 그렇듯, 마을 사람들은 제단에서 내려온 제자들에게 한두 마디씩 평가를 해댔다. 푸른소도 거기에 대충 대답을 하고 있는데, 어제 일곱 살이 된 흰고사리가 생일 선물로 받은 나무 창을 들고 뛰어왔다.
“푸른소 선생님!”
푸른소는 달려오는 흰고사리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흰고사리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한 살 더 먹더니 이렇게 무거워졌네! 내일이라도 밭일을 나갈 수 있겠어.”
확실히 좀 무거웠다. 푸른소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흰고사리의 얼굴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선생님. 로봇 기사 말인데요.”
“도로시의 친구 로봇 기사? 그게 왜?”
“로봇은 무섭잖아요. 조상님의 친구였으면 왜 이제는 우리를 괴롭혀요?”
흰고사리의 할아버지가 채집을 나갔다가 로봇들의 손에 죽은 것이 작년이다. 푸른소는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흰고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아직 조상 사라와 로봇 자객 이야기를 모르지?”
흰고사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는 성인식을 마친 젊은이들에게만 해 주게 되어 있다.
“그건 도로시가 우리 부족을 세우고 한참 뒤의 얘기야. 사라의 후손이 언젠가 로봇들을 멸망시킨다는 예언이 있었어. 그래서 로봇 임금은 무서운 자객을 보내 사라를 죽이려고 했지….”
흰고사리가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그래서요?”
“나머지는 나이가 더 들면 해 줄게. 하지만 로봇들이 우리는 미워하는 건 그래서야.”
푸른소는 흰고사리의 얼굴에 전에 본 적 없는 단단함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사라의 후손이니까, 우리 중에 누가 로봇들을 멸망시킨다는 거죠?”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런 예언이 있어. 어쩌면 너일지도 모르지.”
흰고사리가 환하게 웃더니 허리를 꼬박 숙여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약간 씁쓸했다. 푸른소는 칸사스족의 삼백예순 신화를 모두 암기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아했고,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축제에서 이렇게 역할을 맡을 때도, 평소 스승을 대신해서 신화를 몇 대목씩 읊을 때도, 자신은 신화를 말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가감 없는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해지는 과정에 왜곡도 있었겠거니와, 당초에 자기 부족의 조상들이 정말로 겪었던 일인지, 아니면 다른 부족의 이야기가 흘러들어온 것인지, 지금 알 길은 없다.
그 불신을 느꼈는지, 제사장은 푸른소가 평소 주민들 앞에서 신화를 말할 때 진심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곤 했다. 푸른소가 제사장 자리는 자기가 아닌 붉은구두가 이어받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붉은구두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풍부했다. 푸른소는 그런 감정이 신화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비록 신화의 사실성을 의심하는 푸른소였지만. 붉은구두의 낭송을 들을 때만큼은 그 모든 것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처럼 여겨졌다.
“푸른소야!”
오른아버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올해도 전혀 틀리지 않고 읊었구나. 너처럼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는 아이가 없지.”
칭찬에서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푸른소는 눈썹을 올렸다. 오른아버지가 말했다.
“제사장이 오늘은 네가 늦게 들어올 테니까 먼저 자라고 하더라. 수제자 얘기가 나올 때잖니.”
그 말을 듣고 푸른소는 붉은구두가 있는 쪽을 보았다. 붉은구두는 동네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지금도 곁에서 칭찬과 축하를 하는 사람이 대여섯 명은 된다. 오른아버지가 푸른소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리더니 덧붙였다.
“붉은구두는… 참 잘하지. 그런데 가끔 틀리는 것 같단 마링야. 그럴 때마다 우리는 조금 불안하거든.”
푸른소는 기억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제사장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면 듣는 대로, 마치 머릿속에 그 말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신화를 되풀이할 때에도, 잊어서 더듬거리거나 틀리게 말해 본 적이 없었다.
“계승이야 스승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죠.”
오른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가 끝날 때면 결정이 내리겠지. 내가 보기에 수제자는 너 아니면 붉은구두다.”
그것은 아마 다른 제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왼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붉은구두네 어머니가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 같이 갔어.”
제사장의 제자들은 그 가족들끼리도 가깝다. 항상 뭔가를 상의하고, 같이 음식을 만들고 옷을 짓는다. 푸른소는 제단 저쪽 가장자리를 보았다.
“저는 그럼 스승님한테 가 볼게요.”
“우리는 먼저 자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들어와라. 축제니까 친구들하고도 좀 어울리고.”
푸른소는 삼삼오오 모여서 음식을 먹고 요란하게 떠는 부족민들 사이를 지났다. 아까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했지만. 계승은 중요한 문제였다. 푸른소는 어려서부터 신화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곱씹고 되풀이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운가랑비는 신화를 배우는 것 외에도 어머니를 따라 종종 로봇과의 싸움에 나간다. 붉은구두는 일가가 모두 사냥꾼이라서 활솜씨가 대단하다. 수세자가 되지 못하면, 푸른소는 두 아버지로부터 뒤늦게 바구니 짜는 법을 배우는 것 말고는 수가 없었다.
제단 가장자리, 제자 일곱 명이 모인 곳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제사장이 이미 와서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분위기가 진지한 것을 보면 올해 겨울 축제의 제사를 평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 이야기에 홀리는 바람에 박자를 놓쳐서 한 소리 들을 것이 분명했다.
“스승님.”
푸른소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사장이 음, 하고 대답을 했다.
“푸른소가 왔으니 얘기를 하마. 오늘 밤에 내 뒤를 이을 수제자를 결정할 거다.”
모두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던 듯,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너희는 모두 각자 장점이 있지만, 제일 뛰어난 것은 붉은구두와 푸른소다. 몇 년을 함께 배웠으니, 그건 다들 알고 있겠지? 혹시 자기가 낫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으면 손을 들어라. 선정이 며칠 늦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진지하게 고려하마.”
술 때문에 얼굴이 평소보다 붉어진 저녁해가 말했다.
“푸른소랑 붉은구두는 코흘리개 때부터 신화를 배웠지요. 저는 우리 부족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어서 제사장님께 배었고, 수제자가 될 수 있으면 그것도 좋았겠지만. 어차피 원래부터 농사를 지을 거였어요. 다들 비슷하지?”
동의의 웅성거림에 이어 박수가 들려왔다. 제사장이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수제자가 못 된다고 해서 그간의 배움이 쓸모 없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부족의 영혼이야. 항상 마음에 담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이웃과 후세에게 전하는 일을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푸른소야. 붉은구두야. 너희 둘 중 하나는 태고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횃불을 받게 된다.”
푸른소는 붉은구두를 쳐다보았다. 빨간 머리가 등불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지만, 입술을 굳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붉은구두도 자기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지?
“둘은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 나머지는 밤새 먹고 마시고 놀거라. 겨울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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