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디지털 시대 아이들은 이미지 언어로 소통한다
(…)
요즘 아이들을 디지털 시대 원주민들이라 부른다. 이 아이들은 디지털 세계의 본질인 가상 세계, 이미지 기호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자연, 있는 그대로의 현실 세계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당연히 이 디지털 시대 원주민들과 이전 세대들 사이에는 세상과 관계 맺고, 세상을 읽는 사고 체계가 분명 다를 것이다.
뇌스틀링거가 들려주는 아래 말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마음에 새겨두면 좋겠다. 나도 이 문장은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어 보았다.
그녀뇌스틀링거는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독서 능력 저하라는, 곧 머릿속에서 그림을 만드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엄청난 문제에 주목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까닭은 아마도 매체가 점점 더 시각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각적인 매체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상상력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완성된 그림을 편안하게 실어 나른다. 그녀는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막연한 독서 장려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동적인 독자가 되도록 장려하는 것임에 주목한다.
‘독자 장려’의 한 방법으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끊임없이 TV 보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학교가 대안을 제공하라고 권한다.
“독서 능력 저하는 상상력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해요. 읽은 단어가 정확하게 머릿속에서 연상되지 않는 거죠. 그림이 언어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거의 확실해요. 여가 시간에 수많은 그림들을, 특히 움직이는 화면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편리한 오락의 한 방식이에요. 그리고 자주, 오랫동안 이러한 오락에 젖어 들면 텍스트를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내는 능력은 녹이 슬지요.”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73~74쪽)
‘그림이 언어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말이 가슴을 탕하고 친다.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는 사람들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핵심 열쇠 말이다. 그림도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매사 지나칠 때 문제가 일어난다.
디지털 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하다. 좀 비유적으로 말하면 아이들의 오감을 꼼짝 못 하게 사로잡아 버린다고 봐도 좋겠다. 여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어릴수록 디지털 기기에서 나오는 다량의 이미지 기호 요소들은 아이들의 인지구조를 완전히 장악해 버려 일상생활의 평범한 사물 이미지들에는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한 아이들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강력한 자극에 길들여진 아이는 섬세하고 미세한 수많은 존재들이 내는 소리와 색의 떨림들을 이해하고, 감각이 같이 반응하며 공명하기가 쉽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기에서 나오는 강력한 이미지에 빠져 살며 인지구조에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은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디지털 기기가 지배하는 세상을 되돌릴 수는 없다. 또 디지털 기기 자체의 문제만도 아니다. 그 어떤 문명의 이기든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도 되고 악도 될 것이다.
학부모 강연을 하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힐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책을 읽기 싫어하면 굳이 책을 읽힐 필요가 있느냐,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일을 먼저 하게 하고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즐겨본 아이들은 몸의 에너지가 좋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폭발적으로 책을 읽을 것이다.”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일이 단순히 지식의 양을 늘리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변해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좀더 섬세하게 감각을 동원하여 마음을 나누는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면 디지털 기기에서 나오는 이미지 세계에 길들여지기 이전에 스스로 몸의 감각을 깨우고, 그걸 자기 언어로 표현하는 언어 인지 능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디지털 기기에서 나오는 이미지 세계를 자신 몸에 받아들여 그 이미지를 다시 재해석하여 자신의 언어로 재생산해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가 대세를 이어갈수록,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내는 문학의 의미가 오히려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언어 이미지는 밖에서 주어지는 영역이 아니다. 마치 밤새 꿈을 꾸고, 꿈 이미지를 언어로 받아 적는 행위와 같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머릿속에서 화면이 돌아간다. 그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내적인 이미지를 작가는 언어로 받아 적는다. 꿈 이미지를 언어로 받아 적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는 이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언어로 이루어지는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의 머릿속에서는 장면 장면이 그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는 행위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겉으로 보면 조용히 책을 읽는 정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책은 읽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매우 능동적인 장면 연출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시도 때도 없이 디지털 영상물을 보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 디지털 이미지의 세례를 받을 때 생기는 인지구조의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이름난 예술가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어릴 때는 먼저 책을 읽히고, 그다음에 애니메이션을 보게 하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들도 어릴 때에는 책을 많이 읽으면서, 디지털 이미지의 세계를 같이 즐긴 것이지, 디지털 이미지의 세계에만 빠져서 책과 먼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요즘은 방송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판타지물이 많고, 이런 판타지물이 천만 관객이 넘게 보는 대중들의 장르가 되었다. 그야말로 SF·판타지 시대가 도래하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판타지나 SF는 현실 도피의 문학이라고 폄하하곤 하였는데, 어떻게 몇 년 사이 급격하게 사람들의 시각이 바뀔 수 있었을까?
판타지 작가로 유명한 톨킨은 판타지의 세계는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는 세계’라고 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믿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느껴서 알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우리 언어는 이런 점에서 판타지 세계를 아주 멋지게 표현한다. 느껴 본다, 먹어 본다, 맛본다. 이런 식으로 오감으로 느껴야 하는 세계를 본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SF·판타지 장르를 대중들이 즐겨 보게 된 데는 디지털 기기의 발전이 한몫을 하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아주 섬세하게 감각적인 사람들만이 판타지 세계에 들어가 ‘느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디지털 영상 매체 기술이 판타지 세계를 직접 ‘보게’ 해 준다. 그야말로 강력한 디지털 이미지의 세계가 일반 대중들의 인지구조, 사고 체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건강이 악화되어 도시에서는 살아가기가 힘들어 숲속으로 들어가 살았으면 하고 머물 장소를 찾고 있을 때였다. 그때 명리학 하는 분을 만나 물어보았다. 내가 몸이 안 좋아 숲으로 들어가 한번 살아 보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요즘은 명리학 공부하는 사람들을 비과학이니 하면서 몰아치지 않고 음양오행 사상이 바탕이 된 명리학을 학문의 영역으로 인정하면서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역시 이것도 SF·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면서 사람들이 인식 능력이나 사고 체계가 훨씬 깊어져서 주술적인 사유 체계가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듯이 비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과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한 ‘과학의 은유’의 세계란 사실을 알고 삶을 통찰하는 놀이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명리학자에게 내가 처한 삶의 문제를 물어보았더니 내 사주를 먼저 확인하고 나서 이런 처방을 내려주었다. 내 몸이 아주 허약한 상태인데 산속의 숲 안은 음기가 많이 작동하는 곳이니, 가뜩이나 양의 기운이 부족한 사람이 그런 산에 들어가면 음습한 산적 떼를 만나는 것과 똑같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걸 혼자서 감당하려 하느냐고 하였다. 그래도 정 가고 싶다면 처음 그 집에 들어갈 때 빨간 내복을 가져가서 그걸 꼭 입고, 전깃불도 가능하면 며칠만이라도 환하게 켜 놓고 생활을 하라고 하였다.
지인의 도움으로 숲속 마을에 창고를 개조해 놓은 원룸 형태의 방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계약을 하였다. 여름에 입주했는데, 어느 해보다 비가 많이 내려서 새로 개조한 방은 습기가 가득하였다. 건축을 하는 전문가가 바닥 미장을 한 것이 아니라서 방바닥은 울퉁불퉁한데 아직 덜 굳어서 그런지, 습기를 머금어서 그런지, 바닥을 밟으면 물이 장판에 올라와 발자국이 찍혔다. 물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방바닥에 습기가 많아서 도저히 잘 수가 없어 기다란 책상을 나란히 이어 그 위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에서 잠을 자는데, 명리학자가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가뜩이나 습하게 기운이 가라앉은 방에서 마음마저 더욱더 가라앉아 물속으로 들어가 누워 있는 기분이 드는데, 문득 빨간 내복을 입고 앉아 있으란 말이 떠오른 것이다.
처음 명리학자의 말을 듣고, 이사할 때 빨간 내복이 없어서 친구의 내복을 빌려 가지고 왔다. 잠도 오지 않아 이삿짐 속에서 빨간 내복을 꺼내 보았다. 빨간 내복은 묘하게 마음과 몸이 착 가라앉은 사람에게 모습 자체가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것을 입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
목둘레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윗도리를 먼저 입어보았다. 여름에 겨울 내복을 입은 모습도 그렇지만, 여성용이라 옷이 작아 몸에 겨우 들어가고 팔도 거의 팔꿈치 쪽으로 껑충하게 올라가 있었다. 거울을 보았다. 내가 평생에 해보지 않았던 경험이었다. 빨간 여성용 내복 윗도리를 입고 껑충하게 서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매우 초라하고 썰렁하고 우울해 보였는데, 그런데 보면 볼수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빨간 내복은 이상하리만치 밝은 에너지를 올려보내 주었다. 우울했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와 주름이 조금씩 사라지고 펴지고 하면서 굳어 있던 얼굴에 생기가 반짝하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빨간 내복을 입는 것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윗도리를 입고 나니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바지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의 놀이였다.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내가 지금 빨간 내복을 입고 있는 이 행위 자체가 하나의 제의이고 의례이고 문학예술 행위라는 것을 물에 젖을 정도로 습기가 찬 방바닥 기차 책상 위에 여성용 빨간 내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은 볼수록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광대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읽다가 그때 나는 바로 ‘신화와 ‘의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즐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게 아주 작지만 매우 큰 경험이고 깨우침이었다.
‘폐쇄성 폐질환과 불면증과 신경성 장염을 달고 살면서 먹으면 화장실에 달려가 배설을 하기 일쑤인 존재가 산속 마을로 치료를 위해 들어갈 때에는 여성의 빨간 내복을 가지고 가라.’
명리학자가 들려준 이 말은 내게는 하나의 신화적인 주문과 같았고, 스토리텔링이었던 것이다.
의례는 신화를 실제 몸으로 살아 보는 놀이다. 경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놀이다. 빨간 내복을 입고 기차 책상에 앉아 명상하는 자세로 거울을 마주하며 내 모습을 살펴본 그 행위는 하나의 예술적인 퍼포먼스였으며 연기였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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