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손가락
· 권순남
세벽이면 들어가는 부엌
세월 따라 변해버린 냄비가
나를 반겨준다
손잡이 떨어진 냄비
옆구리 쿡 들어간 냄비
점박이 냄비
예쁜 딸이 사준 냄비
꽃 그림 미느리 냄비
죽 늘어놓고
마디마디 굽은 손가락으로
손녀처럼 피아노를 쳐보고 싶다
아들아
굽은 손가락으로
어미가 시를 쓴다
편지
· 곽곡지
자고 일어나니 해가 떴다
해 뜬 기분이 너무 좋아!
열아홉 살 때
받아 본 연애편지
봉토를 뜯었다
사진 한 장 그리고 꽉 찬 글자들
뭐라고 썼는지 우짜라는 것인지
글 모르는 나는 답답해서 울었지
엄마한테 들키면 맞아 죽을 것이고
누구한테 보일 수도 없던 내 편지
읽을 수 없던 내 첫사랑
애만 태우고 끝나고 말았다
열아홉 처자가
여든두 살 할머니가 되어
공부를 하니 해 뜬 기분이야
해 뜬 기분이 너무 좋아!
“보소, 이제야 내 당장 답장 할 수 있구만은
너
.
.
.
무 늦었지요?”
80살 가시나의 가족
· 오정이
자음 ‘ㄱ’과 모음 ‘ㅏ’를 공부했다
선생님이 ‘가’ 글자로 낱말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나는 공책에 ‘가시나’ 썼다
선생님이 보며 ‘가시나’ 불렀다
내 나이 80살에 ‘가시나’로 불러 주어
소녀가 된 것 같다
총각 ‘ㄱ’이 처녀 ‘ㅏ’를 만나 옥동자 ‘가’를 낳는다는
문해교실 선생님!
힘들게 공부할수록 태어나는 아이들
한글은
혼자 사는 80살 가시나의 가족이 되었다
기분 좋아요
· 이숙녀
글을 모를 때는
까막눈
글을 알고 나니
밝은 눈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은
102동 1004호
아들 집 주소는
창원시 상남동
마을버스 1번 타고
시내버스 109번 환승하고
아들 집 찾아간다
알고 나니 기분 좋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