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에
평소 슈트를 입을 기회는 거의 없다. 있어봐야 일 년에 고작 두세 번이다. 내가 슈트를 입지 않는 건 그런 옷차림을 꼭 해야 하는 상황이 거의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캐주얼한 재킷을 입을 때는 있지만, 넥타이까지 매진 않는다. 가죽구두를 신을 때도 거의 없다. 내가 스스롤 위해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유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딱히 그럴 필요도 없는데 자진해서 슈트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볼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옷장을 열고 어떤 옷이 있는지 점검하다가(그러지 않으면 내가 어떤 옷을 가지고 있는지 잊어버리기에), 사놓고 거의 걸쳐보지 않은 슈트나, 세탁소 비닐에 싸인 드레스셔츠, 매본 자국 하나 없는 넥타이를 바라보는 사이 어쩐지 그 옷들에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서, 시험삼아 잠깐 입어본다. 아직 잘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할 겸 넥타이도 몇 가지 방법으로 매본다. 딤플보조개도 만들어본다. 그러는 건 집에 혼자 있을 때뿐이다. 누가 보면 왜 이러는지 대충이라도 설명해야 하니까.
아무튼 실제로 그렇게 차려입고 나면, 이왕 슈트까지 입었는데 바로 벗어버리는 것도 재미없고, 이대로 잠깐 밖에 나가볼까 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는 슈트를 걸치고 넥타이를 매고 혼자 거리를 걷는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기분이긴 하다. 표정이며 걸음걸이도 평소와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이다. 하지만 한 시간쯤 정처 없이 걷다보면 색다름도 점차 엷어진다. 슈트에 넥타이 차림이 피곤해지면서 목덜미가 근질근질하고 숨쉬기 답답해진다. 땅을 밟는 구두 소리가 너무 딱딱하고 크게 들린다. 집으로 돌아와 구두를 벗고, 슈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후줄근한 스웨트셔츠와 트레이닝바지로 갈아입고 소파에 아무렇게나 편하게 드러눕는다. 말하자면 그저 한 시간쯤의 무해한 ― 적어도 나로서는 특별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는 ― 비밀스러운 의식인 셈이다.
그날,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아내는 중국음식을 먹으러 갔다. 내가 중국음식을 전혀 먹지 않기 때문에(아무래도 중국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 중 몇 가지에 알레르기가 있는 모양이다), 아내는 중국음식이 먹고 싶어지면 친한 여자 친구들을 불러내 같이 먹으러 간다.
혼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조니 미첼의 오래된 레코드판을 오랜만에 들으면서 독서용 의자에 앉아 미스터리 소설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앨범이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었다. 그렇지만 왠지 정신이 산란해서 음악에도 독서에도 영 집중할 수 없었다. 녹화해둔 영화라도 볼까 했지만, 보고 싶은 영화가 한 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자유시간이 생겨서, 뭐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지만, 그게 뭔지 영 떠오르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 많았는데…… 그렇게 하릴없이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그래, 오랜만에 슈트를 입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산 폴 스미스의 다크블루 슈트(필요해서 샀지만 아직 두 번밖에 입지 않았다)를 침대 위에 펼치고, 어울리는 넥타이와 셔츠를 골랐다. 엷은 회색 와이드스프레드 셔츠에 로마공항 면세점에서 산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자잘한 페이즐리무늬 넥타이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나쁘지 않다. 적어도 눈에 띌 정도의 결함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거울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이상하게도 일말의 께름칙함을 머금은 위화감 같은 것이었다. 께름칙함?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것은 자기 경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느낄 법한 죄책감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법에 저촉되지는 않을지언정 윤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사칭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어차피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그런 유의 행위가 가져오는 불편함이다.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남몰래 여장을 하는 남자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심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묘한 이야기다. 나는 애저녁에 성인이 된지 오래고, 해마다 세금신고를 하고 내야 할 금액을 기한 내에 성실히 납부하며, 교통법규 위반 말고는 범죄 이력도 없고,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럭저럭 교양을 갖추었다. 버르토크와 스트라빈스키 중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도 어쩌다보니 알고 있다(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의복은 전부 합법적인 ― 적어도 위법은 아닌 ― 나날의 노동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구입한 것이다. 뒤에서 손가락질당할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죄책감 혹은 윤리적 위화감을 품어야 할까?
뭐,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장고 라인하르트가 코드를 틀리게 잡는 밤도 있고, 니키 라우다가 기어를 넣다가 실수하는 오후도 있다(아마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는 슈트를 입은 채 검은색 코도나 가죽구두를 신고 혼자 거리로 나왔다. 사실은 직관을 따라 집에서 얌전히 영화나 봤으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그런 건 ‘나중에 보니’ 그렇더라는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다.
기분좋은 봄날 저녁이었다. 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대로변에 늘어선 가로수에 푸른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다. 한동안 정처 없이 거리를 걷다가, 바에 들어가 칵테일이나 마시기로 했다. 평소에 가는 동네 단골 바가 아니라, 조금 멀리 나가서 지금껏 한 번도 간 적 없는 바에 들어가 보았다. 단골 바에서는 바텐더가 내 얼굴을 아니까 분명히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슈트에 넥타이까지 다 매시고” 하면서 말을 걸 테고,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으니까(어차피 이유 같은 것도 없으니까).
아직 초저녁이라 빌딩 지하에 있는 바는 한산했고, 마흔 언저리의 남자 손님 둘이 칸막이석에 앉아 있는 것이 다였다. 퇴근하는 회사원인 듯 어두운색 슈트에 수수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다시피 하고 작은 목소리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다. 테이블 위에는 서류로 보이는 것이 놓여 있었다. 아마 업무 이야기를 하는 중인가보다. 아니면 그냥 경마 결과를 예상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조금 떨어진 카운터석에, 되도록 조명이 밝은 자리를 골라 앉고(책을 읽기 위해서다),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 바텐더에게 보드카 김렛을 주문했다.
잠시 후 차가운 잔이 눈앞의 종이 코스터 위에 놓이고, 나는 주머니에서 미스터리 소설을 꺼내 읽다 만 곳을 이어 읽었다. 결말까지 삼분의 일쯤 남아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줄거리가 썩 흥미롭지 않았다. 게다가 도중에 인물들의 관계가 헷갈려버렸다. 그래도 반은 의무적으로, 반은 습관적으로 그 소설을 계속 읽어나갔다.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을 도중에 내던지는 건 옛날부터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재미있는 전개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 실제로 그럴 확률은 매우 낮지만.
보드카 김렛을 천천히 홀짝이면서 스무 쪽쯤 읽어나갔지만 이상하게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독서에 신경을 집중할 수 없었다. 소설이 딱히 재미있지 않아서만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바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도 아니다(쓸데없는 음악이 나오지도 않고, 조명도 적당하고, 독서 환경으로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아까부터 느껴온 막연한 위화감 탓인 것 같았다.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나라는 내용물이 지금의 그릇에 잘 맞지 않는다, 혹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정합성이 어디서부턴가 손상돼버렸다는 감각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카운터 건너편에는 갖가지 술병이 늘어선 선반이 있었다. 그 뒷면의 벽은 커다란 거울이었고, 내 모습이 비쳤다. 가만히 바라보자니 당연히 거울 속의 나도 이쪽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감각에 휩싸였다 ―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그 감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곳에 비친 이가 ― 만약 나 자신이 아니라면 ― 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선택해온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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