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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빵
“할머니에게 뭘 갖다 드릴까요?”
“뭔가 좋은 것을 생각해보자.”
데테 이모가 말했다.
“부드러운 흰 빵은 어떠니? 좋아하실 거야 이제 연세가 있어서 딱딱한 검은 빵은 먹기 힘드실 테니까.”
“맞아요. 늘 페터에게 검은 빵을 돌려주면서 너무 딱딱해서 못 먹겠다고 하시거든요. 제가 직접 봤어요.”
하이디가 말했다.
“빨리 가요, 이모. 프랑크푸르트에 얼른 다녀와서 오늘 안으로 할머니에게 흰 빵을 드리고 싶어요.”
-요하나 슈피리, 《하이디》
《하이디》에는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더불어 그곳의 자연에서 나는 음식이 많이 나온다. 막 짜낸 신선한 염소젖, 불에 구운 황금빛 치즈. 그야말로 천연 유기농 유제품들의 향연이다. 무뚝뚝하지만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낌없이 마련해주는 염소젖과 치즈를 하이디는 실컷 먹고 또 먹는다. 대접에 담긴 염소젖을 꿀꺽꿀꺽 소리 나게 들이마시고, 버터처럼 부드러운 치즈를 빵에 발라서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그 장면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지는지 웬만한 ‘먹방’ 뺨친다. 작가가 순전히 먹는 장면을 쓰고 싶어서 이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독자인 나로서는 그림의 떡을 구경하는 입장이니 군침이 돌다 못해 조금은 약이 오르기까지 한다.
물론 《하이디》에서 먹는 장면을 그렇게 자세하게 다룬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주인공들의 행복과 불행을 먹는 모습으로도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이디가 음식을 잘 먹는 것은 그게 맛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음식을 안겨주는 알프스의 자연과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하이디의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하이디는 할아버지와 단출한 식사를 하고, 들판에서 염소들과 어울려 놀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잠자리에 누워 창밖으로 무수히 펼쳐진 별들을 바라보며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 소박하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이 하이디에게는 행복이다.
그러나 어른들 사정 때문에 억지로 그곳을 떠나 도시에서 살면서부터, 하이디는 슬픔과 외로움을 배운다.
도시에는 하이디가 사랑하는 것들이 없다. 할아버지도, 염소도, 향긋한 들꽃도, 바람에 흔들리는 전나무도, 하늘을 찬란한 빛깔로 물들이는 저녁노을도. 오로지 살풍경한 건물들만 빽빽이 늘어서 있는 도시의 삶이 하이디에게는 답답하고 무서울 뿐이다. 어른들은 하이디에게 알파벳 공부를 시키고, 복잡한 식사 예절과 공손한 말씨를 강요하며, 마음대로 밖에 나가 서 뛰어놀지 못하게 방 안에 가두어놓는다. 하이디는 어른들의 구박과 업신여김 속에서 나날이 시들어간다. 밤마다 알프스가 그리워 눈물짓는 소녀에게 식욕이 생길 리 없다. 소설 초반부에서 하이디가 염소젖과 치즈를 먹는 장면들이 그토록 맛깔스럽게 묘사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도시에서의 식사는 지극히 무미건조하게 그려진다. 도시에서만 접할 수 있는 화려한 만찬이나 달콤한 케이크, 음료수 등이 아이의 입맛을 사로잡을 법도 한데, 하이디는 그런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어떤 음식이 차려져도 하이디는 식탁 앞에서 늘 깨작거린다.
다만 딱 한 가지 하이디가 욕심내는 것이 있는데, 바로 흰 빵이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하얀 빵. 하이디는 알프스에서 이웃집에 살던 가난한 할머니에게 그 빵을 주고 싶어 안달한다. 할머니가 평소에 먹던 값싼 검은 빵은 너무 딱딱해서 할머니가 씹어 삼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이디는 흰 빵을 가지고 어떻게든 알프스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고, 아침 식탁에 나오는 빵을 남몰래 하나씩 챙기기 시작한다. 이 빵을 많이 모아야지, 잔뜩 가지고 돌아가서 할머니께 안겨 드려야지, 그러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아무리 폭신폭신한 흰 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딱딱해지고 맛이 없어진다는 것도 모른 채 하이디는 희망에 부푼다. 흰 빵은 하이디가 도시를 떠나야 하는 이유이지만, 한편으로는 하이디가 도시에서의 슬픔과 외로움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길고 어려운 시기에 어떤 음식 하나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힘이란 때로는 어마어마하다.
도시의 고급스러운 흰 빵, 시골의 값싼 검은 빵. 그 두 가지는 《하이디》에서 강렬한 흑백 대비를 이룬다. 갓 구운 흰 빵은 무척 부드럽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으로 등장하는 반면, 검은 빵은 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구태여 설명할 가치도 없을 만큼 시시하고 맛없는 음식이라는 듯이.
하지만 어렸을 때 나는 하이디가 그토록 집착하는 흰 빵보다도 검은 빵에 더 관심이 갔다. 검은 빵이 자세한 묘사도 없이 무성의하게 다뤄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호기심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건 대체 어떤 빵일까? 도대체 어떤 빵이기에 그 많은 명작 동화에서 검은 빵이 가난의 상징처럼 나오는 것일까? 빵이 딱딱하면 얼마나 딱딱하기에 씹기도 힘들다는 것일까? 검은색 빵이라고는 본 적도 없는 나는 검은 빵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책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질 않았다. 《하이디》의 등장인물들이 염소젖이나 치즈를 늘어놓고 그 색깔이며 질감이며 맛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먹방’을 펼치는 동안, 검은 빵은 그 배경에서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뿐이었다.
나는 내가 먹는 우유식빵, 소보로빵, 슈크림빵을 다 맞바꿔서라도 검은 빵이라는 것을 한 번만 먹어보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알프스 시골의 소박한 맛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유럽식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무리 가난이라 해도 한국의 구질구질한 가난과는 무언가 다를 것만 같았다. 김치나 소주 냄새와는 거리가 먼, 건강하고 고소하고 담백한 가난. 어린이책 삽화 속 백인 여자아이들처럼 예쁘고 깨끗한 가난.
이제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철없는 것이었는지 안다. 그리고 검은 빵의 정체가 실은 호밀빵이었다는 것도 안다. 그것이 이름에서 연상되듯 오징어먹물빵 같은 시커먼 색이라기보다는 진한 갈색에 가깝다는 것도 안다. 서울에서 호밀빵을 취급하는 제과점이 어디인지도, 그게 어떤 맛인지도 잘 안다. 원하면 언제든지 손쉽게 사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유럽식 빵 가게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호밀빵을 사먹더라도《하이디》에 나오는 검은 빵은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실제 19세기 유럽 빈곤층이 먹던 호밀빵과 2020년 한국에서 시판하는 호밀빵은 재료나 기법, 보존 환경 등 모든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사실 어린 시절의 내가 맛보고 싶었던 것은 물리적인 검은 빵 자체가 아니었다. 알프스 고원의 전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향긋한 냄새가 나는 마른풀 침대와 천장에 난 창문으로 올려다보는 별하늘, 병약하지만 상냥하고 예쁜 금발 머리의 단짝 친구, 학교에 가지 않고 온종일 염소들과 뛰노는 삶…… 한마디로, 나는 현실의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을 ‘검은 빵’에 대입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가질 수 있는 빵은 이미 내가 원하는 검은 빵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설적이게도, 내게 검은 빵이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문학나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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