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체성의 뿌리
2013년체제론의 행방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이 8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뜸을 들이던 안철수 교수가 지난주 출마를 공식화함으로써 주요 후보의 윤곽이 드러났고, 이렇게 되자 정국은 사실상 선거전에 돌입한 셈이 되었다. 지금은 박근혜ㆍ문재인ㆍ안철수 세 후보 모두 조심스러운 탐색의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한 터라, 이번 대선이 1987년 12월처럼 허탈한 결과에 이를지 아니면 2002년 12월처럼 대세론을 뒤엎는 기적을 만들어낼지, 예측을 불허한다. 각 언론기관들이 발표하는 여론조사도 새로운 이슈가 생길 때마다 지지도가 출렁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어떻든 이제 분명해진 사실은 야권 후보가 가시화되는 것을 계기로 여당 후보의 안정적 우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탐색전이란 게 원래 그런 건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후보들마다 주로 책잡히지 않을 세부적 정책들을 내놓는 데 주력할 뿐이고 올해 선거를 통해 구성될 새 정부의 근본 성격과 국가발전의 기본방향에 대해 원대한 구상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번 다루었던 백낙청 교수의 『2013년체제 만들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 책에 개진된 백 교수의 문제의식은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이룩된 우리 사회의 개혁체제 즉 ‘87년체제’가 직선제 개헌과 6ㆍ15선언의 도출 같은 중대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 후반부터 말기 증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결국 이명박 정부와 같은 퇴행적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퇴행을 결정적으로 바로잡을 기회가 바로 금년의 총선ㆍ대선인바, 단순히 1987년 또는 2000년의 성과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해서는 그런 단기적 목표의 달성도 기대하기 어렵고, 따라서 그것들을 획기적으로 뛰어넘는 담대한 원願을 설정함으로써만 87년체제를 극복하고 나아가 한반도 현실의 전면적 비약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크게 업그레이드될 한반도 현실의 모습을 백 교수는 ‘2013년체제’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러나 ‘2013년체제’론의 호소력은 아쉽게도 4ㆍ11총선의 패배로 급격하게 소진되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의 대선전을 더 지켜보아야 드러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2013년체제’라는 용어도 또 그 용어에 함축된 정치적 구상도 오늘의 공론장에서 핵심 쟁점의 지위를 잃었다고 여겨진다. 총선 승리를 발판으로 추진될 예정이었던 개혁의 프로젝트가 첫 단추부터 어긋나버렸다는 것이 정직한 판단일 것이다. 백 교수 자신도 총선결과를 ‘잘못 예측한’ 데 따른 자기반성을 겸하여 변화된 정치정세에 대응하는 개혁진영의 자세에 관해 좀더 근본적인 성찰을 시도하고 있고, 그것이 ‘변혁적 중도주의’에 대한 새로운 검토로 나타났었다.(「2013년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 『창작과비평』 2012년 가을호 참조) 하지만 변혁이나 중도와 같은 ‘추상수준이 높은 개념’을 매개로 진행된 일종의 내부적 성찰이 일반 대중과의 소통에 한계를 가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우리가 갖고 싶은 나라
생각건대 현시점에서 핵심적인 것은 ‘2013년체제’라는 개념의 시효 자체나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용어의 현실적합성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론가에게는 개념의 선택이 사고의 정밀성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실을 설명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수준 높은 이론작업이 대중적 호응 여부를 떠나 이 세상 어느 일각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런 작업과의 연결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수 국민들 가슴속에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국가현실의 근본적 개선을 견인할 수 있는 간명한 실천적 언어가 제시되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맨 뒤에 붙은 「나의 소원」이라는 글이다. 다들 아는 유명한 문장이지만, 그래도 한 대목 음미해보기로 하자.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백범학술원 총서② 『백범일지』, 나남 2004 재판, p.441)
그림처럼 아름다운 나라의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기 묘사된 국가상國家像이 지나치게 막연하고 단지 이상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백범이 이 글을 썼던 1947년의 구체적 상황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백범은 그때까지 70평생 오로지 독립투쟁에 매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간고하게 지켜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해방 후 외국 군대가 점령한 조국땅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1947년쯤에 이르면 남한에서는 임시정부의 집권가능성이 사라지고 한반도 전체로서는 민주ㆍ자주ㆍ통일정부의 수립이 사실상 무산된 상태였다. 이 과정에는 백범 자신의 정치적 오류도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위의 문장은 바로 남북분단의 비극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씌어진 것인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어조가 조금도 절망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글은 노년의 가장이 자손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들려주듯 담담하고 지혜롭다. 그로부터 6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이 글이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우리가 갖고 싶은 나라’에 대한 백범의 소망이 그의 가식 없는 애국심의 발로로서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일부 사람들은 애국이란 말 대신 국가관이란 말을 쓰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정보기관에 잡혀가면 수사관들로부터 흔히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욕을 먹었다. 정보-수사기관 종사자들은 때로는 무고한 사람을 고문해서 터무니없는 공안사건을 날조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국가관을 가지고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하는 반면에, 자유니 민주주의니 떠드는 사람들은 안보를 해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잠적한 듯했던 이 낱말이 다시 공론의 자리에 등장하고 있다. 가령, 근자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몇몇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을 겨냥하여 “국가관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국회의원 노릇을 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바로 엊그제는 "국가관이 투철한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체 국가관이란 어떤 내용을 가진 개념인가. 이때 국가란 ‘대한민국’을 가리킬 텐데, 언필칭 국가관을 입에 담는 사람들은 이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생각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헌법적 토대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알고 있는가.
민주헌정의 뿌리에 대한 두 갈래의 탐색
공교롭게도 지난 8월 아주 비슷한 제목의 책 두 권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김육훈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휴머니스트 2012)과 서희경의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창비 2012)이 그 책들이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대한민국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려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부제가 ‘우리 민주주의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이고 후자는 ‘한국 헌정사, 만민공동회에서 제헌까지’이다. 이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자는 구한말부터 대한민국 탄생까지의 한국 근대사에서 민주공화국의 이념이 어떻게 발생ㆍ발전해왔는가를 더듬고 있고, 후자는 같은 기간에 공화주의 이념과 운동들이 어떤 내부적 갈등과 이론적 조정을 거쳐 어떻게 실제의 헌법조항으로 구현되어왔는가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책은 각각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탐색한 자매편 같은 느낌을 준다.(이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은 『민주』로,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은 『헌법』으로 약칭한다.)
이렇게 두 책은 언뜻 보기에 공통의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으나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아주 다른 종류의 저작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한마디로 『민주』가 대중적인 교양서임에 비해 『헌법』은 본격적인 연구서라는 점이다.
『민주』는 처음부터 독립적인 연구나 독창적인 이론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는 있지만 굳이 원문대로 옮겨서 가독성을 떨어트리지 않았고, 대체로 출전을 밝히고는 있으나 학술논문에서와 같은 까다로움을 부리지 않았다. 저자의 목적이 계몽적인 교양서였던 만큼 이것은 옳은 방침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집필에 참고했던 선행 업적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더 깊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타인의 선행 연구에 의존한 부분과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나타낸 부분을 독자들이 구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대중적인 교양서의 경우에도 저서의 신뢰성을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헌법』은 정통적인 학술서이다. 문외한이 함부로 얘기해서는 망발이 되겠지만, 이 책은 우선 ‘제1장 서론’만 읽어보더라도 마치 X레이로 촬영한 신체 내부 뼈조직의 사진이 생명체의 구성원리를 밝히는 데 기여하듯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체제의 형성과 그것의 작동에 헌법 제정의 진화 과정이 어떻게 뼈대 노릇을 했는지 이해하게 만든다. 이 책은 이렇게 고도의 전문성으로 무장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일반 독자들의 현실감각을 자극하고 오늘 우리 삶의 객관적 조건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든다. “헌법의 외양은 딱딱한 법조문일 뿐이지만, 그것이 탄생하고 지속되는 과정은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헌법은 다채로운 의미를 지닌 산 생명체이다.”(헌법, p.32) —헌법(연구)에 관한 이런 관점이 전편에서 관철됨으로써 이 책은 어떤 무미건조한 연구 소재도 유능한 연구자를 만나면 연구실을 벗어나 만인에게 살아 있는 지식과 깨달음을 주게 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내 분수에 넘치는 소리를 한다면 명저의 반열에 들 만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