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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사용 설명서
(중략)
가장 기억에 남는 법안
나는 17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보좌관으로 일했다. 2004년부터 2020년에 이르기까지 강산이 한 번 반 바뀔 만한 시간 동안 수많은 법을 다루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법안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법이 18대 국회에서 제정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은 2011년 3월에 발의해 4월에 통과되었다. 발의부터 통과까지 한 달 남짓 걸렸으니 제정법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빨리 통과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법안을 실제로 준비한 것은 17대 국회, 즉 2004년부터였다. 실은 7년 만에 통과된 것이다.
애초 우리 의원실에서 발의했던 법의 제명은 ‘홈리스 인권 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었다. ‘홈리스’는 거리 노숙인을 포함한 주거 불안정 계층 전체를 가리킨다. 당시 홈리스를 대상으로 한 복지는 부랑인 복지와 노숙인 복지로 나뉘어 있었는데 기준이 모호했다. 노숙인은 ‘일정한 주거 없이 상당한 기간 동안 거리에서 생활한 사람’, 부랑인은 ‘일정한 주거와 생업수단 없이 상당한 기간 동안 거리에서 배회·생활한 사람’이라고 했다. 홈리스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이 기준에 따르면, 홈리스는 상황에 따라 부랑인도 되었다가 노숙인도 된다.
부랑인과 노숙인은 무주거無住居, 무연고無緣故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한 〈부랑인및노숙인보호시설설치·운영규칙〉에서 ‘생업 수단 유무’와 ‘입소 시설 형태’에 따라 구분하므로 부랑인 복지사업은 중앙 행정부에서, 노숙인에 대한 사업은 지방 행정부에서 담당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 어느 곳에서도 중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고, 그 결과 관련 사업은 비체계적·비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니 중앙 행정부왕 지방 행정부는 어느 쪽도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법적 기반이 없어서 발생한 문제였다.
당시 홈리스 사업에 대한 근거는 〈사회복지사업법〉상의 사회복지시설과 관련한 규정뿐이었다. 미국·영국·일본의 경우 별도의 홈리스 지원 근거법이 존재했으나 우리나라는 독립적인 법률이 없었다. 홈리스 관련 정책은 시설에 격리 수용하는 것이 전부였으므로 시설에 관한 규정만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홈리스 단체 및 전문가들과 함께 법 제정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회의와 간담회를 여러 차례 거쳐 논의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홈리스 단체에서 우려를 표했다. 홈리스를 위한 법을 제정한다고 했을 때 발생할 부정적 여론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노숙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노숙인을 지원하자는 법이 시민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을까? 오히려 노숙인에 대한 반감이 커지지 않을까?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 시설 수용 정책이 더 강화되지는 않을까? 당사자 단체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결국 법을 만들기는 했지만 발의하지 못했다. 현실에서 드러난 문제가 있고, 법 제정의 필요성도,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도 거쳤고, 법안도 작성했으니 의원실에서 독자적으로 발의해도 무방했다. 법안 발의는 의원실 재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의하지 않았다. 당사자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행정부와 동료 의원들을 설득한단 말인가. 의원실의 실적만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17대 국회가 끝나고, 18대 국회가 시작되었을 때 거리 노숙인 사망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매년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이면 서울역 앞에서, 거리에서 죽어 간 홈리스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린다. 그 자리에 참석해 촛불을 들고 있는 내게 물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내 마음을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짜 추모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복지 정책이 제대로 만들어져야 하고, 체계적·종합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법을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단체들과 만났다. 현장의 요구를 가능하면 법안에 온전히 담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사회적 공감대를 확대하기 위한 사업도 차근차근 진행했다. “홈리스법 입법의 필요성 및 입법 과제” 보고서를 발간해 보건복지위원회복지위 위원들에게 배포하고, 보건복지부에도 전달하면서 법 제정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질의를 했다. 국정감사가 끝나자마자 전문가 간담회를 개최하고 공청회를 열었다.
대표되지 않은 시민을 대표하는 일
법 제정 과정에서 함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법적·제도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동등한 시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시민권을 온전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민주주의는 ‘이해 당사자들의 결사체’가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좋아지는데, 약자들은 결사체를 구성하기도 어려웠고, 힘의 균형을 이루는 한 부분이 되지도 못했다. 정치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많을수록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가장 취약한 계층, 가장 소외된 사람들,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배체되었던 사람들이 정책의 수급자에서 주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의료 관련법은 의사·간호사·환자 단체 등이 개입한다. 사회복지 관련법은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관여한다. 이처럼 법안을 제·개정할 때는 보통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반영하지만 취약 계층에 관한 의제는 당사자 의견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전문성을 우선하는 사고와 당사자 대표 조직의 부재가 결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노숙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계층인지라 정책 입안 과정에 이들의 의견이 전달된 통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사자가 보이지 않으면 정책은 ‘온정주의’로 다뤄지기 쉽다. 복지가 권리로서 보장되기보다 시혜적인 차원에서 제공되는 데 그친다. 시혜와 동정으로 ‘만들어 준’ 법이 아니라 함께 논의해 ‘만들어 가는’ 법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이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목표였다. 그래서 법 제정에 앞서 당사자와 함께할 방도를 고민했고, 택한 방법은 서명운동, 청원 제출, 당사자 대회 등이었다.
노숙인들에게 청원 서명을 받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거리 생활자가 줄어드는 추운 겨울이었다. ‘홈리스 1천 명 서명운동’을 시작했는데, 5백 명만 받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홈리스 단체 회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설명을 거듭하며 발로 뛴 결과, 목표로 했던 1천 명을 뛰어넘어 1,531명이 청원 서명에 동참했다. 대부분 쪽방촌·고시원에 거주하는 분들, 거리에서 생활하는 분들, 일용직이거나 국민기초생활 수급자분들이었다. 2011년 2월, 서명인 전체의 이름으로 청원을 제출했다. 3월에는 국회 앞에서 ‘홈리스 지원법 제정 청원인 대회’를 열었고, 홈리스 당사자 80여 명이 모였다.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던, 보이지 않도록 격리되었던 사람들이 제대로 된 법안을 만들어 달라고 국회 앞에 모여 발언을 했다. 수백, 수천, 수만 명이 움직이는 이익 단체와 비교한다면 많지 않은 인원이지만 그 어느 단체보다 강력하고,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80인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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