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출산의 수수께끼
1926년 8월, 임신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면서 『빔메르뷔 티드닝』 수습기자의 전도양양한 커리어는 돌연 중단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험담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콧대 높은 숙녀들은 길거리에서 아스트리드 에릭손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결혼 전 이름을 마주치면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다. 『빔메르뷔의 반항아』라는 책에는 나이 든 스몰란드 여성이 그 당시 임신한 시골 처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드러나 있다. “타지로 도망가서 출산하든지, 마을에 남아서 가족의 수치가 되든지.”
아스트리드가 임신한 아기의 아버지는 학교 친구나 동네 농장 일꾼이나 타지에서 온 세일즈맨이 아니라 『빔메르뷔 티드닝』의 소유주이자 편집장인 레인홀드 블롬베리였다. 그는 1919년 첫 아내와 사별한 뒤 재혼했는데, 그의 일곱 자녀 가운데 몇 명은 아스트리드 에릭손과 같은 또래였다.
농업 공학을 전공한 레인홀드 블롬베리는 여러 해 동안 고틀란드에서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 1912년 큰 화재가 난 후 재산을 정리하고 스몰란드의 쇠드라 비로 이주해서 목공 회사를 인수했다. 1913년에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빔메르뷔 티드닝』 신문사와 인쇄소를 매입했다. 그해 레인홀드는 스토르가탄 30번지의 집을 사서 여섯 자녀와 임신 중인 아내 엘비라를 데리고 이사했다. 7년 후 집 한쪽에 신문사 편집실도 마련했다.
1920년대 레인홀드와 그의 신문사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부동산, 토지, 시멘트 공장, 삼림 등 다양한 곳에 투자했는데 주력 사업은 신문사 운영이었다. 그는 『빔메르뷔 티드닝』 편집장으로서 이 작은 마을에서 돈벌이가 되는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고, 손대는 일마다 솜씨를 발휘했다. 또 스몰란드의 작가 클럽과 신문 발행인 협회 회원이 되었고, 『빔메르뷔 티드닝』을 지역사회와 지방자치단체의 유용한 게시판으로 만들면서 마을 상인들의 광고를 게재했다. 정치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해서 시의회 의원으로 여러 차례 선출되었다.
이 유력한 사업가는 열일곱 살 수습기자와 사랑에 빠졌고, 아스트리드가 직접 경험한 적은 없으면서 책에서 읽거나 누군가한테서 들어 봤음 직한 애정 공세를 펼쳤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카린 뉘만의 추측에 따르면 1926년 3월 임신 후 6개월째에 접어들면서 아스트리드가 그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로맨스를 이어 갔다. 남자를 사랑하거나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꼈던 아스트리드가 열정적인 구애를 받았던 것이다. 레인홀드가 아스트리드의 “영혼과 몸”에 격렬한 관심을 드러내는 편지까지 보내면서 애정 공세를 펴자 아스트리드는 그에게 홀딱 반했다기보다 매우 놀랐다.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무엇보다도 이 관계에서 느낀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위험성에 매혹됐다. 아스트리드는 책으로도 출판된 1993년의 TV 인터뷰 「스티나 다브로브스키가 만난 일곱 명의 여성」에서 이 사실을 솔직하게 밝혔다. ‘소녀들은 철없는 짓을 하기 마련이지요. 내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첫사랑에 몹시 설레고 흥분했어요.“
그것은 도덕과 관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관계였다. 그 당시에 아스트리드는 성적으로 미숙했고, 레인홀드는 이혼 압박에 시달리는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빔메르뷔 티드닝』 편집장은 존경받는 네스의 에릭손 가족과 친분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긴밀하게 협력하며 함께 일한 적도 많았다. 1924년에는 에릭손 부부와 함께 온 마을을 사흘 동안 들썩이게 만든 농업의 날 행사를 추진했다. 이듬해 사무엘 아우구스트가 50세 생일을 맞았을 때 레인홀드는 신문 지면에 이런 기사를 실어서 경의를 표했다. “에릭손 씨가 볼일이 있어서 가끔 본지 편집실에 들를 때면 자신을 ‘교구 농부’라고 소개한다. 농업인으로서 손대는 것마다 성공하며 행복과 이익을 거두는 그는 명예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그의 농장은 다른 농장들의 모범이며, 다른 어떤 교구에서도 그와 견줄 만한 목축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전기 작가를 위한 메모
아스트리드와 직장 상사의 스캔들 정황은 명확하지 않다. 그 시기 레인홀드 블롬베리는 아내 올리비아와 별거 중이었다. 아스트리드가 3월에 임신하고, 9월에 스톡홀름으로 이사하고, 12월에는 코펜하겐에서 아들 라르스를 낳은 이 파란만장한 해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중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별로 없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생전에는 라르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과 블롬베리 일가의 일부, 그리고 몇몇 빔메르뷔 마을 사람들은 실상을 알고 있었다. 아스트리드는 주로 ‘라세’라는 애칭으로 불린 아들 라르스를 배려해서 그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싶어 했다.
“난 스스로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이 뭔지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아이를 원했고, 아이의 아버지는 원치 않았습니다.” 전기를 쓰려고 여러 해 동안 수없이 자신을 인터뷰하고 스몰란드의 고향 집도 함께 방문한 마르가레타 스트룀스테트를 위해 1976~77년에 아스트리드가 준비한 메모 노트에는 이토록 직설적인 표현이 담겨 있다. 속기로 작성된 메모 노트에는 이토록 직설적인 표현이 담겨 있다. 속기로 작성된 메모 중 일부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록물 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마치 전기 작가가 쓸 문장을 대신 써 준 듯한 부분도 있다. 아스트리드는 책의 한 챕터라고 해도 좋을 자전적 글을 짤막하고도 깔끔하게 써서 스트룀스테트에게 전했는데, 제목이 없는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스트리드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인생에 급격한 변화를 촉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임신한 거예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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