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 일부)외상 장부
인간이 처음 문자를 만들면서 한 일은
하늘의 음성을 받아 적은 것도
지모신에게 올리는 기도문도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도 아니다
곡물 수확량을 조사한 세금 장부였다
사실, 글이 어두운 시대에 한 동네의 최초
기록은 주막집의 외상 장부 아닌가
힘 있는 인간들 우리가 발 뻗고 사는 꼴을 못 봐
세금 뜯어낼 온갖 지혜를 다 짜내었고
주막집 주모는 외상으로 먹은 자의
용모와 금액을 그려두어야 했다
인간에게 문자가 필요했던 것은 태어나면서 우리가
이 땅에 역사에 외상을 먹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기에 모든 책은 외상 장부 같다
내게 뭔가를 전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 갚을 거냐고 묻고 있다
사랑의 이야기도 혁명의 기록도
내게서 뭔가를 받아내려고 한다
지난 것 갚지 않으면 더는 외상을 주지 않을 것 같다
그 외상 장부가 말의 가락을 담아내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회령
북한 지명이라고는 원산이나 평양 정도만
알던 어린 날에 귀에 익은 지명이 회령이다
그곳엔 두만강 나루터가 있었다고 했다
지도책을 펴놓고 회령을 찾아내었지만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작은 마을과
허허벌판 그리고 얼어붙은 강
나는 모든 게 그 탓이라고 생각했다
열여덟살 아버지가
그때 두만강을 건너지 못한 탓이라고
회령 나루터에서 일경에 체포되면서
아버지보다 내가 더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 강을 건너기만 했더라면 그처럼
폐허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폐허의 젖을 빨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연변에 가서 회령이 건너다보이는
아버지가 못 건넌 그 강가에 가보고 싶었으나
도문 나루터에서 회령 가는 강물만 바라보다 왔는데
나 열다섯에 앞강을 건넜다가 다시
돌아오고 말았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는데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멈춰버렸던가
그 멈춰버린 것들이 물에 비치며 흘러가네
그 전설의 두만강이 고향 강만 같은데
저 강 언제 건너려나
이유
신은 주방에 있다는 세간의 말은
대체로 사실일 것이다
곡식이 익는 들판에 있을 거라는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축복이라면 우선 배를 채우는 일이므로
혀끝의 욕구를 은혜롭게 하는 일이므로
다른 생명들을 제물로 사용할
권리를 확인하는 일이므로
배를 가르고 피가 튀고 뼈를 꺾고
난도질을 하고 산 채로 기름 솥에 던져넣고
고소한 냄새가 영혼을 저 높은 곳으로 고양시키고
주방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느라고
우리는 견디고 또 견디어야 하는 일들이
축복만큼 나날이 풀려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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