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접실의 아이
그가 처음으로 도덕적 결정을 한 것은 다섯 살 때였다.
바르샤바의 고급 아파트 창문으로 건물을 요새처럼 둘러싼 안뜰을 내려다보며, 헨리크 골트슈미트는 외할머니에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외할머니는 헨리크를 이해해주고, 헨리크의 “세상을 바꾸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헨리크는 세상에서 돈을 없애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그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도무지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목표는 분명했다. 자기가 같이 놀면 안 되는 저 아래 수위 아들과 그 패거리처럼 추레하고 배고픈 아이들이 없도록,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아이고 우리 꼬마 철학자.” 외할머니는 건포도 한 알을 손자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생일은 7월 22일인데, 태어난 해는 1878년인지 1879년인지 분명치 않았다. 바르샤바의 저명한 변호사였던 아버지 유제프 골트슈미트가 아들의 출생신고를 차일피일 미루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곤란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중요한 책임을 내다 버렸다고 말했다.” 코르차크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급작스럽게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데, 그때부터 이미 불안정한 조짐을 보인 것일 수도 있고 일부러 신고를 미룬 것일 수도 있다. 바르샤바는 당시 제정러시아의 영토였다(약 백 년 전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3국이 폴란드 땅을 나눠 가졌다). 그래서 아들이 러시아군에 입대하는 것을 미루거나 피할 셈으로 아들의 나이를 허위로 신고하는 부모가 많았다. 아버지 유제프는 첫아들이자 유일한 아들이 태어나자, 출생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국내외 지인들에게는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파리의 랍비장(長)에게서 축복 서한 받은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축복 서한에는 “아드님이 이스라엘의 큰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코르차크는 그 편지를 평생 간직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어린 시절 코르차크의 모습에서 큰사람이 되리라는 확신을 갖기는 어려웠다.
그는 공상에 빠져 있는 아이였다. 몇 시간이고 혼자 놀 수 있었다. 집안은 식구가 많았고 온통 여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외할머니가 있었고, 요리사와 가정부가 있었고, 프랑스인 여자 가정교사 여럿이 거쳐갔다. 바깥은 남자들이 군림하는 세상이었지만,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수납장이며 탁자, 부드러운 소파와 동양풍 카펫이 놓인 우아한 아파트 내부는 “엄격한 여군 부대”가 주도하는 세상이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놀 만한 곳이 거의 없었다. 국립극장 바로 뒤, 세나토르스카 거리에 있는 집에서 조금만 가면 도심에 사스키 공원이 있었지만, 안에는 놀이터도 없고 축구장도 없어 아이들이 뛰놀고 기운을 발산할 공간이 없었다. 수위가 지키는 건물 출입문 근처에서 공이라도 튀기는 아이는 대번 빗자루로 얻어맞았고, 덜커덩거리며 거리를 달리는 빨간 철도마차에 뛰어올랐다 내렸다 하며 노는 아이들은 경찰이 쫓아갔다. 좋은 집 아이들은 안뜰에서 놀면 안 되었기 때문에, 예민하고 과보호를 받는 헨리크 같은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집 안에 앉아 “비밀을 품거나”, 식당 창문에 코를 붙이고 아래 안뜰에서 노는 수위 아들 무리를 부러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지저분한 데다 입이 험하고 머리에 이가 있다고 어머니는 누누이 말했다. 싸움질을 하고, 돌을 던지고, 맞아서 눈을 다치고, 몹쓸 병에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헨리크의 눈에 수위 아들과 그 친구들은 멀쩡해 보였다. 아이들은 종일 신나게 뛰어다니고, 우물물을 마시고, 자기는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잡상인에게 가서 맛있는 사탕을 사 먹었다. 아이들이 하는 욕을 들으면 재미있기만 했고, 밑에 내려가 아이들과 노는 것이 프랑스인 가정교사나 여동생 안나와 따분한 집 안에 앉아 있는 것보다 백번 나아 보였다. “아이란 움직여야 하는 존재”라고 그는 후에 적었다. 아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목을 조르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뜻을 꺾고 기를 죽여 담배 냄새만 남겨놓는 것과 같다”고 했다.
“쟤는 야망이 없어.” 어머니는 여동생의 인형과 숨바꼭질하며 노는 아들을 보며 말했다. 인형을 찾아다니는 아들이 답답한 집 안을 벗어나 전혀 다른 세상에 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인형은 그냥 인형이 아니라, 범죄자에게 붙잡힌 인질이자 숨겨진 시신이었다. 찾아내야만 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아이들의 놀이는 시시한 행동이 아니다. 비밀을 밝혀내고, 숨겨진 물건을 찾아내고, 세상에 찾지 못할 것이 없음을 보이는 것, 그것이 놀이의 목적이다.”
아버지는 몇 시간이고 앉아 장난감 블록을 갖고 노는 아들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저 녀석은 얼간이 아니면 바보 아니면 천치”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짓고 있는 홀로 삐죽 솟은 탑이 훗날 《마치우시 1세 왕》과 그 밖의 작품에 등장할, 부모 잃고 집 잃은 아이들의 쉴 곳을 상징하는 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코르차크는 이렇게 적었다. “분출구를 찾지 못한 감정은 몽상이 된다. 그리고 몽상은 우리 마음속에서 인생의 각본이 된다. 그 해몽 방법만 알면, 몽상은 결국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꼭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이는 주방에서 얼쩡거려도 안 되었다. 그래도 헨리크는 부모님이 외출하면 때때로 주방에 슬쩍 들어가 요리사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요리사 아주머니는 마치 “실크 방석 위의 애완견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을 대하듯 헨리크를 자기가 일하는 탁자 옆 높은 스툴에 앉히곤 했다.
“그래, 옛날얘기를 해달라고? 그러자꾸나.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아 그래, 이런 얘기였지. 자 어디 보자, 그럼 시작해볼까.” 아주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헨리크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그래서 여자아이가 숲을 걷고 있었어요.” 아주머니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전에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하는 것 같았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어요. 나무도 안 보이고, 짐승들도 안 보이고, 돌멩이도 안 보였어요. 사방이 칠흑같이 깜깜했어요. 아이는 너무 무서웠어요. 성호를 한 번 긋고 났더니 좀 덜 무서웠어요. 성호를 한 번 더 긋고 아이는 계속 길을 걸었어요. ……”
아주머니는 언제 이야기를 멈추고 숨 고를 시간을 주어야 하는지, 언제 숨 가쁘게 몰아쳐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리드미컬하게 반죽을 주무르는 손놀림처럼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아주머니의 다정함과 가슴 졸이는 이야기 솜씨는 평생 그의 기억에 남았다. 아주머니는 그가 이야기를 끊고 질문할 때마다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본인의 이야기에나 이야기를 듣는 이에게나 성의를 다했다. 헨리크는 그런 아주머니가 늘 고마웠다. 그가 나중에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을 꽃피우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어준 사람은 바로 요리사 아주머니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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