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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명씩 차례대로 들어갔다. 몇 시간 동안 복도에 서서 기다리느라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 기다란 원목 식탁이 있었고 식탁에는 이미 우리를 위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포갠 채 가만히 있었다. 내 앞에는 하얀 도자기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나는 허기를 느꼈다.
다른 여자들도 각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나까지 모두 열 명이었다.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긴장한 듯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는 여자들도 있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자들도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앳된 소녀는 손끝의 굳은살을 물어뜯어 앞니로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안면 홍조기가 있는 소녀는 볼이 발그스레했다. 그녀도 허기를 느꼈다.
이제 겨우 오전 11시밖에 안 됐는데 우리는 모두 배가 고팠다. 시골 공기 때문도, 버스 여행 때문도 아니었다. 배 속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밀려오는 허기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수년 동안 허기와 두려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음식 냄새가 솔솔 풍기는 접시가 코앞에 놓이자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머리가 울리고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안면 홍조가 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나와 같은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내 앞에는 버터로 볶아 맛을 낸 줄기콩 요리가 놓였다. 결혼식 이후 버터를 입에 댄 적이 없었다. 구운 파프리카 향이 코를 자극했다. 음식이 넘칠 정도로 가득 담긴 접시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맞은편 소녀의 접시에는 완두콩과 쌀로 만든 요리가 놓였다.
“먹어!” 방 한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유보다는 강하고, 명령보다는 부드러운 어조였다. 우리들 시선에 담긴 욕구를 읽어낸 듯했다. 우리는 입을 살짝 벌렸다. 호흡이 빨라졌다. 다들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하지 않았으니 그대로 일어나, 고맙지만 오늘 아침 집에서 키우는 닭들이 관대하게도 달걀을 많이 낳았다고, 오늘은 달걀 하나면 충분하니 차린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어보았다. 나까지 꼭 열 명이었다. 적어도 최후의 만찬은 아닌 것이다.
“먹으라니까!” 구석에서 다시 한 번 명령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줄기콩 하나를 흡입하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부터 손끝, 발끝까지 피가 한꺼번에 확 돌더니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성경 구절을 되새기는데 파프리카가 다디달게 느껴졌다. 주께서 내게 식탁보도 없는 원목식탁에 상을 차려주셨다. 열 명의 여인들을 위해 아헨 지방에서 만든 도자기 그릇 열 개를 식탁 위에 올려주셨다. 행여나 베일이라도 쓰고 있었다면 침묵의 서약을 한 수도원 수녀들처럼 보였겠지.
처음에는 다들 음식을 조금씩 입속에 집어넣었다. 어쩌다 초대받은 그 사람의 점심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억지로 삼키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음식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이 음식은 애당초 우리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순전히 우연히 이 음식을 먹게 된 거다. 음식은 식도를 따라 미끄러져 배 속에 뚫린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음식물로 채우면 채울수록 구멍은 점점 더 커졌고 구멍이 커질수록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디저트로 나온 아펠슈트루델(여러 겹의 페이스트리 안에 사과와 건포도를 채운 디저트)이 너무나 맛있어서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맛있어서 파이를 점점 더 큰 조각으로 잘라서 입속에 욱여넣고 쉴 새 없이 씹어 삼켰다. 그러다가 목이 메는 바람에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을 가다듬었다.
어머니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죽음에 대항하는 것이라 했다. 어머니는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에 그런 말을 했다. 당시 나는 베를린 브라운슈타인스트라세 10번가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히틀러는 없었다. 어머니는 교복 앞치마 끈으로 리본을 묶어준 뒤 내게 책가방을 건네면서 점심 먹다가 음식이 목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주곤 했다. 집에서 나는 도통 입을 다물지 않았다. 가끔은 입에 음식을 잔뜩 넣은 채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너무 수다스럽다고 했다. 나는 지나치게 비극적인 어머니의 말투와 걸핏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위협하는 훈육 방식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져 숨이 가쁘도록 웃곤 했다. 어머니는 생존을 위한 모든 행위는 결국 인간을 죽음의 위험에 노출시킨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삶은 위험한 것이며 세상 어디에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식사가 끝난 후 나치 친위대원 둘이 식탁으로 다가오자 내 왼쪽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제자리에 앉아!”
여자는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머리핀이 헐거워지는 바람에 양 갈래로 땋은 머리 한 쪽이 가볍게 흔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입 다물고 앉아 있어라! 음식에 문제가 있었다면 독이 체내에 빠르게 퍼질 것이다!”
나치 친위대원은 우리를 한 명씩 응시하며 반응을 관찰했다. 우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친위대원은 다시 한 번 방금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던 여자를 향해 말했다. 던들 드레스 차림의 여자는 아마도 친위대원들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거다. “한 시간만 기다리면 되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가 말했다. “한 시간 후면 다들 자유의 몸이 될 거다.”
“죽은 목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동료가 덧붙였다.
순간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안면 홍조가 있는 소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죽여 울었다.
“그만해!” 소녀 옆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 여자가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다른 여자들도 모두 울고 있었다. 여자들은 배부른 악어처럼 눈물을 흘려댔다. 어쩌면 그것도 소화과정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이름이 뭐죠?” 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홍조 띤 소녀는 내가 자기한테 말을 거는지도 몰랐다.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건드리자 그녀는 흠칫하며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모세혈관이 죄다 터져 있었다. “이름이 뭐지?” 내가 다시 묻자 소녀는 허락 없이 말하는 게 불안한지 고개를 들고 구석을 쳐다봤다. 하지만 친위대원들은 딴짓을 하고 있었다. 정오가 다 돼서 배가 고팠거나 소녀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듯했다. “레니, 리니 빈터.” 소녀는 우물거렸다. 질문처럼 들렸지만 실은 자기 이름을 말한 것이었다. “나는 로자야, 레니.” 내가 말했다. “조금만 참으면 모두 집에 돌아가게 될 거야.”
(중략)
“나가야겠어.” 레니가 속삭였다. 그녀의 속삭임을 들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레니 옆자리에는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에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 여자가 앉아 있었다. 눈빛이 서늘해 보였다.
“쉬잇!” 나는 레니의 손목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이번에는 레니도 흠칫하지 않았다. “20분만 참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나갈래.” 레니가 고집을 피웠다.
갈색 머리 여자가 레니를 째려보았다. “조용히 하지 못해?” 그녀가 레니를 밀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외쳤다.
“무슨 일이야?” 나치 친위대원들이 내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순간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제발.” 레니가 말했다.
친위대원 한 명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레니의 팔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더니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뭐라고 했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레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어디가 안 좋은가?” 다른 친위대원이 물었다.
던들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또다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독을 먹은 거야!”
레니가 구역질을 하자 다른 여자들도 일제히 일어났다. 친위대원은 레니가 바닥에 먹은 것을 게워내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했다.
친위대원은 급히 뛰쳐나가 주방장을 불러내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총통이 옳았다. 영국 놈들은 총통을 독살하려고 한다. 여자들은 서로 껴안거나 벽에 기댄 채 울었다. 갈색머리 여자는 두 팔을 허리에 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코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레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받쳐주었다.
여자들은 모두 손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경련이 일어서가 아니었다. 포만감이 익숙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우리를 한 시간도 더 넘게 가둬뒀다. 신문지와 젖은 천으로 바닥을 닦아냈지만 그래도 시큼한 악취가 났다. 레니는 죽지 않았다. 나중에는 더 이상 몸을 떨지 않고 식탁에 엎드려 한쪽 뺨을 팔에 베고 내 손을 잡은 채 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배에 가스가 차고 속이 부글거렸지만 지친 나머지 불안함도 잊고 말았다. 그레고어는 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나치는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나치를 추종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나는 하얀 셔츠 칼라 아래 까만 스카프를 매는 것이 싫어서 독일소녀동맹에 가맹하기 싫었다. 나는 모범적인 독일 시민이 아니었다.
측정할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이 흘러 음식물이 완전히 소화돼 경계태세가 해소되자 친위대원들은 레니를 깨웠다. 그들은 우리를 일렬로 세운 뒤 버스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더 이상 속이 부글거리지 않았다. 위가 음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내 몸은 총통의 음식을 흡수했다. 이제 총통의 음식은 피를 타고 내 몸속에서 순환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무사했고 나는 또다시 배가 고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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