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냉소와 체념을 주는 것들
1
정치판인가, 도박판인가?
이상한 선거제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만 다가오면 투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말 선거가 꽃이라면 한국은 특정 작물에만 너무 많은 영양분을 공급해서 다양성이 훼손된 꽃밭이다. 선거 개표결과를 정당 색깔로 표현한 지도를 보면 그 사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빨강, 파랑이 거의 전국을 색칠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능력 있고 선거운동을 잘한 결과로 해석하기에는 숨이 막힐 정도이다.
현재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이다. 다른 선거구제로는 중/대선거구제가 있다. 차이점은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느냐, 두 명을 뽑느냐, 여러 명을 뽑느냐이다. 소선거구제는 한 명을 뽑는 선거이고, 상대 후보들보다 한 표라도 더 받은 후보가 당선된다. 소선거구제에서는 한 명이 나와 무투표로 당선될 수도 있고, 두 명이 나와서 절반의 득표율을 놓고 경쟁할 수 있고, 서너명이 나와서 최고의 득표율을 놓고 경쟁할 수도 있다. 여러 사람이 출마해도 한 사람의 득표율이 유독 높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절반의 득표도 못 얻은 사람들이 주로 당선된다. 그럴 경우 절반 이상의 표심은 어떻게 될까?
투표 따로, 의석 따로
이런 선거제도는 후보 개개인만이 아니라 선거 결과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유권자의 표심이 국회 의석에 잘 반영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국회의원 총수는 300명. 2004년에 열린우리당은 선거에서 총 투표 중 38.3%의 표를 얻었지만 의석은 152석을 가져가 다수당이 되었다. 2008년에 한나라당은 37.5%의 표를 얻었지만 153석을 차지해 다수당이 되었고, 2012년에 새누리당은 42.8%의 표를 얻어 152석의 다수당이 되었다. 2016년에는 25.54%의 표를 얻은 민주당이 123석을 차지하고 33.5%의 표를 얻은 새누리당이 122석을 차지해 약 59%를 득표한 두 정당이 의석의 81.67%를 차지했다. 결국 거대 양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은 표를 많이 받더라도 의석을 적게 가져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제20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총 투표의 7.23%를 득표했지만 300석 중 6석밖에 갖지 못했다. 뭔가 불합리하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표를 더 많이 얻은 사람이 당선되는 게 뭐가 문제일까 싶지만, 가령 30%의 득표율을 얻은 사람이 당선될 경우 나머지 70% 유권자의 선택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물론 30%의 득표율로 당선된 사람이 나머지 70%의 뜻을 잘 이어받겠다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국회의원만이 아니다. 소선거구제로 당선되는 도지사나 시장, 군수도 마찬가지이다. 당선되고 나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한다.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문제도 생긴다. 가장 모순이 컸던 2008년 선거 때 한나라당은 지역구 득표 약 748만 표, 정당 득표 약 642만 표로 153석을 차지했다. 이 당시 투표율은 역대 선거 중 가장 낮은 46.1%, 전체 유권자 약 3,779만 명 중 7백만 표, 즉 18.5%의 지지만 얻으면 한나라당은 국회 다수당으로서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대부분의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나머지 81.5% 시민들의 의견은 어떻게 될까?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한국사회는 이런 불공정함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승자독식’, 즉 이긴 사람이 모든 걸 다 차지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어떤 경쟁에서건 패자는 바로 루저가 되고, 관심에서 사라진다. 그러니 이기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된다. 후보로 나서는 사람들은 정당의 지향이나 가치와 상관없이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정당을 택하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불법을 일삼고, 표를 얻을 수 있다면 가치관과 양심도 다 팔아치운다. 이기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으니.
집권여당이나 선거 당시에 인기가 높은 정당의 공천을 받으면 당선될 가능성이 높고 당선되면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으니 한 방에 인생역전을 노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정치 철새’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지언정 효과적인 선택이다. 인생역전이 가능하니 사심이나 사적인 이해관계로 선거에 나오는 사람들도 생긴다. 후보공천과정에서 뇌물을 주고받는 관행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정치가 점점 도박판으로 변한다.실제로 카지노 근처를 기웃거리는 정치인들도 많다
사표심리? 후퇴심리!
반면에 시민들은 이 과정에서 모든 걸 잃는다. ‘사표심리’라는 말이 있다.그럼 당선될 사람만 찍는 심리는 ‘생표심리’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어차피 당선 안 될 사람 찍으면 사표가 되니 될 사람 찍는다는 심리이다. 이렇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과 무관한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면 그 정치인에게만 득이 된다. 대통령 때문에 득표율이나 지지율이 높아져도 자기 자신에 대한 지지율로 해석하는 게 정치인들 아닌가? 어차피 누가 자신을 찍었는지 알 수 없고 알아도 비밀이니 소위 ‘비판적지지’는 쉽게 무시된다.
(중략)
비례대표제도가 대안이다
기득권 정치인과 정당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 그래서 도박판처럼 변한 선거, 어떤 대안이 있을까? 사실 이미 대안은 나와 있다. 가장 쉽게는 ‘비례대표제도’이다. 선거에서 각 정당들이 후보명단을 미리 공개하고 시민들은 정당에게 투표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얻은 득표율만큼 의석을 배분한다. 그러면 한 지역의 표를 많이 받지 못한 정당도 전국적으로 골고루 득표를 했다면 의석을 얻을 수 있다.
이 비례대표제도는 이미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기는 한다.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라는 형식으로 비례대표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런데 이때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라 제도가 이상하게 도입되었다. 전국구 국회의원 정수를 전체의 1/3로 정했지만 지역구 득표율 1위 정당에 전국구 정수의 1/2을 우선 배분했다. 즉 비례대표제도는 도입되었지만 다수당의 힘이 더 강해지는 방식이었다.
이 이상한 방식은 1972년 유신헌법이 도입되면서 폐지되고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활되는데 앞서와 비슷하게 전국구 정수를 전체의 1/2로 정했지만 지역구 득표율 1위 정당에 전국구 정수의 2/3을 우선배분하는 이상한 방식이었다. 비율은 조금씩 조정되었지만 이 역시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분했다.
그러다 2001년에 헌법재판소가 정당투표 없는 비례대표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2004년 국회의원 선거부터 정당투표가 실시된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비례대표의석은 56석으로 전체의 18.7%였는데, 2014년 선거구 조정과정에서 비례대표의석이 47석으로 도리어 더 줄어들었다. 비례대표제도가 실시되곤 있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이다.
그 뒤에 비례대표제도의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표적인 대안이 지금의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도’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는 정당 득표율대로 전체 의석수를 나눈 뒤 지역구 당선자수를 먼저 반영하고 나머지를 비례대표 당선자로 채우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 한 정당이 100석을 확보할 수 있는 득표를 했는데, 지역구 당선자가 70명밖에 없다면 나머지 30명을 비례대표로 당선시키는 제도이다. 독일, 뉴질랜드 등이 이런 방식의 선거제도를 이미 취하고 있다.
만약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를 제20대 국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득표율에 비해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으므로 비례대표의석을 추가로 얻지 못한다. 반면에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득표율과 맞추기 위해 각각 58석, 21석을 얻는다. 그러면 더불어민주당 110석, 새누리당 105석, 국민의당 83석, 정의당 23석, 무소속 11석이 되어 총 332석이 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로 바꾸면서 국회의원 총수를 늘릴 수도 있고 지역구 의석을 조정할 수 있으니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투표가 실제 국회 의석으로 반영된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기득권 정치세력들은 당연히 선거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여야를 막론하고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세력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선거제도 개혁을 반대할 것이다. 실제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로의 개혁에 가장 거부반응을 보이는 정당이 자유한국당이고, 개혁을 내세웠으니 피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그 폭을 좁히려 애쓰는 정당이 더불어민주당이다. 두 당을 합쳐서 부르는 ‘더불어한국당’이 가장 한마음을 드러내는 현안이 바로 선거제도 개혁 반대이다.
자유한국당의 힘이 약할 때 더불어민주당은 선거제도 개혁을 차일피일 미뤘고, 제21대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은 2019년 4월 25일에야 연동율을 50%로 낮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도’에 여야4당이 합의했다. 법안을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에 올린 것이고 아직 개혁안이 통과되지 않았으니 선거제도 개혁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뭘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탄핵이 될 줄 알고 촛불 들고 거리로 나선 게 아니었다. 국회가 순순히 탄핵안을 가결할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에게 문자 보내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SNS에 열심히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거다.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킬 때만큼의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힘들고 어려워도 선거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정치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는 녹슨 장애물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집의 세탁기를 분해해서 싹 청소했다. 때를 녹이는 세제를 쓰면 그때마다 끝도 없이 때가 밀려 나왔는데, 분해해서 싹 청소하자 때가 사라졌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한국정치는 조금씩 고쳐 쓰는 게 아니라 한번 싹 분해하여 청소해서 쓰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도 개혁의 바람이 불 수 있다. 선거제도 개혁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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