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게코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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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월 25일 오후, 도쿄의 하늘은 불길할 만큼 어두컴컴했다. 도시는 이미 폭설로 뒤덮였지만 눈이 한층 더 쏟아질 것만 같았다. 사흘 전에는 30센티미터가 넘는 폭설로 54년 만에 기록을 갈아치웠다. 교통이 마비되는 바람에 영화관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관객을 위한 임시 숙소가 되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도쿄는 동양보다는 서양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일본은 옛 봉건적인 유산을 대부분 씻어내고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이면서 서구화된 나라로 바뀌었다. 전통적인 기와로 지붕을 인 황궁에서 불과 100~200미터 떨어진 곳에 현대적인 4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천황의 집무실과 함께 모든 궁궐 업무를 처리하는 궁내성 건물이었다. 넓은 궁궐 뜰을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돌담과 해자 건너편은 동서양이 뒤섞인 풍경이었다. 시카고의 스카이라인 못지않게 서양적인 데이코쿠 극장과 다이이치제일 빌딩을 포함해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두 블록 떨어진 자갈이 깔린 거리에는 게이샤의 집과 초밥 매점, 기모노 가게,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조그만 상점들이 문간의 커튼을 펄럭이며 색등을 내걸었다. 구름이 짙게 낀 날씨에도 화려한 모습이었다.
궁궐 옆으로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아직 완공되지 못한 국회의사당은 주로 오키나와의 석재를 썼기 때문에 이집트 건물처럼 보였다. 위풍당당한 의사당 건물 뒤로는 고위 관료들이 관저로 사용하는 널찍한 주택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총리 관저였다. 그 집은 두 채의 건물로 이뤄졌는데, 하나는 서구식 사무용 공간으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활동했던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자연과 건축의 조화를 추구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 옮긴이의 초기 양식으로 지어졌고 살림집으로 쓰는 공간은 종이처럼 얇은 벽에 다다미 바닥과 미닫이문으로 된 일본식 구조였다.
하지만 겉으로 평화로운 도쿄의 이면에는 눈으로 덮인 거리를 삽시간에 뒤덮을 만한 불안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궁궐 뜰 한쪽 끝에는 제1(보석)사단 병영이 있었다. 제1사단 지휘부는 이미 육군성의 소좌에게서 군사반란이 있을 거라는 비밀정보를 보고받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소좌는 일단의 과격파 군인들이 황실 고문 몇 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는 말을 한 젊은 장교에게 들었다고 했다. 용의자들은 감시를 받았고 공직에 있는 중요 인사들에게는 급히 경호원들이 붙었다. 또 총리 관저의 출입문마다 철판을 덧씌웠고 창문은 강철봉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시청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경보 시스템을 설치했다. 하지만 ‘겐페이타이헌병대, 겐페이는 시민들을 통제할 권한을 지니고 무장 경찰 역할까지 했다.’와 일반 경찰은 자신들이 간단하게 상황을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강한 동기가 있다고 한들 소수의 반란군 무리가 무슨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겠는가? 또 곧 반란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생각도 있었다. 거사가 있을 것으로 지목된 날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토록 방심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황궁을 경비하는 엘리트 부대 내에서도 반란의 기운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반항의 기미가 너무나 뚜렷해 이들 부대는 며칠 내로 만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정도다. 또 정부를 향한 경멸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는데, 한 부대는 기동 훈련을 받는 체하다가 수도 한복판에 있는 경시청을 향해 일제히 열을 지어 소변을 내갈기기도 했다. 제멋대로 구는 장교와 사병 중에 1400명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6시, 동이 트기 직전에 공격조는 도쿄의 몇몇 고위 관료 관저와 경시청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 공격을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 향락을 좇는 시민들은 재미를 보기 위해 어두운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도쿄의 브로드웨이이자 5번가라고 할 긴자는 낭만적인 바깥세상의 상징이 된 지 오래였고 부티크와 커피숍, 미국 및 유럽풍 영화관, 서구 스타일의 댄스홀, 레스토랑이 즐비한 네온 등으로 번쩍이는 도원경이었다. 한두 블록 떨어진 아카사카 구역에서는 남녀 모두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옛 일본’ 구역도 환락의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이샤들은 연극배우 같은 분장과 번쩍이는 의상에 인력거를 타고 버드나무가 늘어선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다녔다. 다소 어두운 가로등 사이로 경찰들이 들고 다니는 전통적인 홍등은 은은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빛을 발했다. 풍경은 마치 생생하고 매력적인 목판화 같았다.
반란에 가담한 군인들의 동기는 사리사욕이 아니었다. 이전에 여섯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던 무리들처럼 ― 이들 반란은 모두 실패했다 ― 이들 역시 무력과 암살로 사회 정의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는 전통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특별히 ‘게코쿠조하극상’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말은 모든 계층에 반란이 만연했던 15세기에 사용되었다. 당시는 지방 영주들이 쇼군봉건시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일종의 총사령관. 쇼와 천왕 히로히토의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 시대까지 천황은 허울뿐인 국가 지도자로서 쇼군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쇼군은 다시 천황의 명령을 무시하던 때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기 시작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물결로 전제 정권들이 붕괴되었고 이에 일본 젊은 세대들 역시 극적인 영향을 받아 앞장서서 변화를 외쳤다. 여러 정당이 출현하고 1924년에는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한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정치를 게임이나 손쉬운 돈벌이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이 너무 많았고, 이 와중에 마쓰시마 홍등가 스캔들, 철도 스캔들, 한국 스캔들 등 여러 추문이 폭로되었다. 국회의사당은 뇌물 수수와 부패 문제로 난장판이 되었다.
일본의 서구화에 뒤따른 인구 폭발은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홋카이도와 혼슈, 규슈, 시코쿠4개의 주요 섬을 모두 합해도 캘리포니아 면적보다 작다는 이미 8000만 명의 인구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국가 경제는 한 해에 거의 100만 명씩 증가하는 인구를 흡수할 여력이 없었다. 농산물 가격의 폭락으로 아사 직전에 몰린 농민들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수십만 명의 도시 노동자가 직장에서 쫓겨났다. 이런 상황은 좌익 정당과 노동조합의 설립 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에 맞서 민족주의 단체들이 진압에 나섰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는 사회주의 강령에 제국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쓴 열렬한 혁명가이자 민족주의자인 기타 잇키였다. 개혁을 외치는 그의 논문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은 급진적이면서도 동시에 천황 숭배 사상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혁신을 외치는 모든 일본인에게 호소력을 보였다. 그는 “일본인은 서구의 참담한 예를 따르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재계, 정계, 군부 권력자들은 제국의 권력을 빙자해 부당하게 사적 이익을 취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7억 형제들은 우리의 보호와 지도력이 없으면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
“동서양의 역사는 내전의 시대가 막을 내린 봉건국가의 통일에 대한 기록이다. 이 시대의 국제 전쟁이 끝난 뒤에나 올 수 있는 평화는 봉건적인 평화여야 한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국가를 지배할 가장 강력한 국가의 출현으로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기타는 “국민과 천황 사이의 장벽을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국회와 내각의 벽을 허물라는 얘기였다. 투표는 집안의 가장으로 제한할 것과 아무도 100만 엔그 당시 미화 50만 달러에 해당 이상의 돈을 모으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주요 산업은 국유화하고 여자는 집에서 “전통 예술인 꽃꽂이나 다도를 배우도록”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가정의 빈곤과 정재계의 부패에 분개한 수백만 명의 예민하고 이상주의적인 청년들이 그의 주장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뿐 아니라 이 모든 사악한 세력과 싸우면서 서양의 지배로부터 동양을 해방시키고 일본을 세계로 선도하는 국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양에서라면 청년들은 노조 활동가나 정치 선동가로서 배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특히 영세농이나 자영업 출신은 육군이나 해군 장교로 복무하는 것이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단 군에 들어가자 이들은 빈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들이 떠나버린 집안에서 남은 가족은 굶어 죽기 직전이라는 얘기가 적힌, 고향에서 온 편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동료들을 봤기 때문이다. 젊은 장교들은 상관과 정치인, 조정의 관리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직접적인 행동과 암살을 요구하는 덴켄토天劍黨 같은 비밀 조직에 가입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제적인 혁신과 영토 확장을 주장하는 사쿠라카이櫻會 같은 단체에 가입했다.
1928년경 이런 소요는 절정에 이르렀고, 군부 내에서 두 명의 비범한 남자가 이런 주장을 직접 실행에 옮김으로써 한층 더 불을 붙였다. 한 명은 이시와라 간지 중좌였고 또 한 명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였다. 이시와라 중좌는 총명하고 영감이 번뜩이는 데다 현란한 아이디어가 샘솟듯 하는 유형이었고 이타가키 대좌는 냉정하고 생각이 깊은 조직의 달인이었다. 두 사람은 완벽한 팀을 구성했다. 이시와라가 머릿속에서 구상을 하면 이타가키가 실현하는 구조였다. 두 사람은 관동군 소속의 참모 장교였다. 관동군은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워싱턴을 합친 것보다 더 광활한 황무지인 만주에서 일본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1905년에 파견된 군대였다.
두 장교는 만주가 일본의 빈곤을 해결할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만주를 황무지에서 문명화되고 번영된 지역으로 탈바꿈시키면 국내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인구 과잉인 조국을 위한 돌파구가 되리라 내다본 것이다. 일본의 전체 경작지 중 3분의 2가 5000평방미터 이하의 소규모 영세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는 일본이 산업국가가 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있었다. 천연 원료의 원천이자 완성품의 시장 역할 말이다. 하지만 이시와라와 이타가키의 생각에 이 모든 것은 일본이 만주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전에는 불가능했다. 만주는 중국 군벌인 장쭤린張作霖 대원수에 의해 느슨하게 통치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철도 주변의 주둔권과 광업, 농업, 상업에 관여할 권리만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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