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일본회의의 현재
우파인사가 총결집한 국민회의
일본회의는 1997년 5월 30일, 유력한 우파단체로 알려진 두 조직,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하면서 새롭게 결성되었다.
뒷장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먼저 전자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에 관해 살펴보자. 이 단체는 1981년 10월에 탄생했는데, 이른바 ‘원호元号法制化運動, 일본의 공식연호를 기록방법으로 법제화하려는 운동 ― 옮긴이’ 등을 추진한 단체를 발전시키고 개편한 것이었다.
‘국민회의’ 운영에 깊이 관여했으며, 과거 자민당을 대표하는 우파로 이름을 날린 전 참의원 무라카미 마사쿠니노동성 장관, 자민당 참의원 회장 등을 역임를 방문하여 이 단체의 경위에 관해 물었다. 그는 지난날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선배 저널리스트인 우오즈미 아키라가 쓴 무라카미와의 대담집 《증언 무라카미 마사쿠니: 나, 국가에 배신당하더라도》2007년, 고단샤 간행의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무라카미의 증언을 소개한다.
“천왕 재위 50년1975년의 봉축행사, 그리고 그 뒤 이어진 원호 법제화 운동이 성공하자원호법 제정은 1979년 애써 결집한 조직을 해산시키는 게 안타깝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주제를 추진하는 국민회의를 결성하게 되었고, 재계와 정계, 학계, 종교계 등의 대표가 중심이 되어 약 800명 정도가 모여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를 결성한 것입니다.”
발족 당시 의장에는 외교관으로 유엔 대사 등을 지낸 가세 도시카즈가 뽑혔고, 우파논객으로 유명한 작곡가 마유즈미 도시로가 운영위원장 자격으로 단체를 관리하는 모양새였다. 사무 쪽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은 메이지 신궁의 부대표인 소에지마 히로유키가 맡았다. 얼마 후 마유즈미 도시로가 의장직을 이어받으면서 단체는 한때 일본 우파운동의 중추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가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인 《신편 일본사新編 日本史》를 편찬한 일일 것이다. 교과서 편찬작업은 1986년 국민회의가 주도했는데, 복고조의 역사관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참고로 ‘국민회의’ 활동에 임원 둥의 자격으로 참여한 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이 여러 인물을 만날 수 있다.괄호 안은 주요 직함, 고인을 포함한다
우노 세이치(도쿄 대학 명예교수), 시미즈 이쿠타로(가쿠슈인 대학 교수), 고보리 게이치로(도쿄 대학 명예교수), 에토 준(평론가, 도쿄 공대 교수), 고야마 겐이치(가쿠슈인 대학 교수), 무라마쓰 다케시(쓰쿠바 대학 명예교수), 가세 히데아키(외교평론가), 무라오 지로(역사학자),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회장 등 역임), 이부카 마사루(소니 명예회장), 이시이 고이치로(브리지스톤 사이클 상담역), 쓰카모토 고이치(와코루 창업자), 다케미 다로(일본의사회 회장), 오다무라 시로(전 행정관리 사무관, 다쿠쇼쿠 대학 총장), 나카가와 야스히로(쓰쿠바 대학 명예교수), 모모치 아키라(일본대학 교수), 오하라 야스오(고쿠가쿠인 대학 교수)…….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의 신구 우파인사들이 총망라된 면면이라 하겠다. ‘국민회의’는 말 그대로 학계, 재계, 종교계, 정계의 우파란 우파는 모두 결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직이다.
우파계 종교의 결집, 일본을 지키는 모임
한편, 후자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국민회의’에 앞서 1974년, 주로 우파계 종교단체가 중심이 되어 결성했는데 이른바 ‘종교 우파조직’이라 할 수 있다.
전 자민당 참의원인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이 단체에서도 ‘국사 대책국장’으로 참여하여 단체의 설립 경위를 잘 알았다. 무라카미의 말에 따르면, 이 단체를 결성한 발단은 임제종 승려인 아사히나 소겐이었던 듯하다. 가마쿠라 엔카쿠지의 주지를 맡기도 했던 아사히나는 정치인 오자키 유키오와 기독교 사회운동가인 가가와 도요히코 등과 함께 ‘세계연방운동’세계를 하나의 연방국가로 건설하려는 운동 ― 옮긴이을 펼친 경력도 있다. 다음은 무라카미의 증언이다.
“이사히나 씨는 본래 평화운동에 열심이었습니다만, 어느 날 이세 신궁을 참배한 후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메이지 신궁의 다테 다쓰미 신관 과 도미오카하치만 궁의 도미오카 모리히코 신관, 그리고 다니구치 마사하부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그 모임이 커지면서 각 종교단체 지도자나 사상가, 문화인이 가세했고 결국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결성된 것입니다.”
무라카미가 말하는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신흥종교단체인 ‘생장의 집生長の家’의 교조다. 1893년 효고 현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0년에 생장의 집을 창설한 괴 인물이다. 전쟁 때는 ‘일본 정신의 현현顯現’을 호소하며 군부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급속히 신자를 늘려나갔다. 전후에는 한때 신자 수가 300만 명을 웃돌 정도로 교세를 자랑했고 1964년에는 정치조직으로서 ‘생장의 집 정치연합’, 약칭 ‘생정련’을 조직하여 정계 진출을 도모하기도 했다.
다음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설립에 크게 이바지한 도미오카 모리히코의 뒤를 이어 도미오카하치만 궁의 신관이 된 사와타리 모리후사가 1985년, 《조국과 청년》같은 해 8월호에 게재한 글도 인용한 것이다. 《조국과 청년》은 생장의 집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우파단체 ‘일본청년협의회’가 발행한 기관지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생장의 집이라는 신흥종교와 신도神道, 일본 고유의 민족종교 민간신앙에 외래종교인 유교·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으며, 신사와 왕실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 옮긴이계 종교단체가 전쟁 후 일본 우파 운동의 원류로서 어떻게 자리 잡아가는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으므로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73년경의 일이었다. 도미오카하치만 궁의 선대 도미오카 모리히코 신관이 신도 이세의 숙소에서 가마쿠라 엔카쿠지의 아사히나 소겐 관장과 함께 묵을 때였다. 그들은 일본의 현재를 걱정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중략)
두 사람이 앞으로 행동을 일으키려 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 메이지 신궁 신사의 경내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다테 다쓰미 신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다테 신관은 도미오카 신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유식자 여러 사람을 찾아뵙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한 이가 바로 생장의 집 다니구치 마사하루 총재였다.
당시 나는 도미오카 신관을 따라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어느 날, 아사히나와 도미오카 두 신관이 하라주쿠 본부로 다니구치 총재를 방문했을 때 나도 함께했다. 두 신관께서는 다니구치 총재에게 방문목적을 교대로 이야기하면서 세상을 걱정하고 종교심의 환기를 논하였다. 정신운동의 필요성에 관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때 다니구치 총재 입에서 강력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생장의 집이 두세 개쯤 사라지더라도 조국 일본이 본래 모습을 되찾기만 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우리는 그런 각오와 굳은 결의로 생장의 집을 거점으로 종교활동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협력해야 할 일일 뿐 아니라 생장의 집 활동 자체가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실로 애국자의 잠언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두 신관은 이후 각자 여러 유식자를 방문하여 설득한 결과, 1974년 4월 2일 메이지 기념관에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발족하게 되었다.
신도 종교의 중심적 존재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신궁. 그리고 전후 일본 우파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이끄는 거대신흥종교 ‘생장의 집’. 양대 진영의 지도자들에게 우파계 종교인이 호소함으로써 두 진영의 두터운 지원을 받으며 발족한 ‘일본을 지키는 모임’. 거듭 말하지만 이 구도는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다.
즉, 일본회의라는 존재의 배후에는 신사본청을 축으로 하는 신도 종교단체와 생장의 집의 그림자가 조직과 인맥에 드리웠고, 어쩌면 자금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위와 같은 사실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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