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연루된 주체와 기억의 책임
한나 아렌트는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집합적 유죄collective guilt’라는 개념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묻는다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로 보낸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논리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게 아렌트의 항변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오로지 그가 한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어야 한다. 그가 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가 속한 인종이나 민족이 무엇이냐에 따라 책임을 물어서는 곤란하다. 인간 개개인의 죄의 유무는 유대인이냐 아리아인이냐는, 그가 속한 집단이 아니라 그 인간 개인이 저지른 일의 내용과 결과에 따라 판정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극히 상식적이다.
그러나 기억 전쟁에서는 ‘집합적 유죄’의 논리로 가해 민족 전부를 단죄하거나 피해 민족 모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집단 심성이 그야말로 완강하다. 독일의 전후 세대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이유는 그들이 독일인 혹은 일본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스라엘이나 폴란드, 한국의 전후 세대는 참으로 떳떳하다. 희생자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강의 도중 학생들한테서도 그런 태도를 발견할 때가 적지 않다. 그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지를 묻는다. 베트남전쟁이 끝나고도 20여 년이 지나 태어난 세대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을 책임질 수 없다고 답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묻는다.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자네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왜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끝난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한 통치에 대한 책임을 묻는가?”
‘집합적 유죄’의 논리적 함정에 빠져 전후 세대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곤란하다는 데 학생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그래도, 무언가 석연치 않다. 전후 세대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이들에게 과거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 면죄부를 부여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하기 때문이다. 죄를 묻기도 면죄부를 주기도 어려운 이 딜레마는 기억 전쟁의 한 축을 구성한다. 해결의 실마리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그 과거를 기억할 책임을 구분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실존적으로 전후 세대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해 책임이 없다. 그러나 그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지금 여기의 문제이니, 전적으로 전후 세대의 책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기억은 전후 세대가 과거에 개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저장된 기억을 원래 그대로 송두리째 빼내는 단순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적인 사회적·문화적 코드 체계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되는 현재 진행형의 작업이다. 과거사를 끄집어내 성찰하고 또 그 성찰의 기억을 지키고 끊임없이 재고해야 할 책임은 전후 세대에게 있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 기억의 책임이 문제로 제기된 것은 지구화의 덕분이다. 트랜스내셔널한 기억 문화의 형성은 ‘내면적 지구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그보다 앞선 1980년대 초에 이미 이웃 국가가 어떠한 기억 문화를 만들고 있고 어떠한 역사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2년 일본의 침략 사실을 축소하고 과거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일본의 교과서 검정 원칙이 수정되고, 〈대일본제국〉 같이 일본의 군국주의적 과거를 미화하는 영화가 나오고, 평화헌법 개정 논의가 공공연히 발화되고, 총리가 16명의 각료를 데리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주변 국가들의 우려가 증폭되었다. 난징대학살을 우발적 사건으로 주변화하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수정주의 역사 교과서와 일본의 우경화를 추동하는 신우익의 대두 등은 파장이 커서 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타이완, 태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홍콩 등지에서도 정부 차원의 강력한 항의와 격렬한 반일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이후 동아시아 공론의 장에서는 일본의 수정주의 교과서 문제나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가 매년 8월이면 연례행사처럼 불거졌고, 이 소식은 한국 신문들의 1면 톱을 장식했다.
이웃의 첨예한 비판과 우려에 대해 일본 우익 역시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들은 한 나라가 자국의 역사 교과서를 어떻게 서술할지는 그 나라가 결정할 문제이므로 주변국들이 일본의 교과서 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일축했다. 일본의 우익들은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의 역사 교과서나 신사 참배 문제 등을 제기하는 것 같은 내정간섭을 중단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기억이 서로 참조하고 간섭하며 얽히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그런 의미에서 1982년은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이 탄생한 해였다.
사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일이다. 일본 정부는 1955~1956년의 교과서 검정 지침을 통해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교과서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해당 지침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은 피하고 태평양전쟁으로 아시아 각국이 서양 식민주의자들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는, 즉 일본의 침략이 아시아의 독립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집필 방향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난징대학살이 일본의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천황의 종전 결단이 강조되는 등 보수적인 권력 집단의 입김이 교과서 서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62년 판 중등학교 ‘새 사회’ 교과서는 1955년 판에서 사용된 ‘침략’이라는 용어를 ‘진출’로 대체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침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1982년 개정된 역사 교과서 검정 지침이 이전 지침들보다 특별히 더 나빠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침략’을 ‘진출’로 대체한 문제도 그렇지만, 난징대학살, 731부대, 강제 징용, 3·1운동, 오키나와의 강제된 집단자살과 관련된 문제들은 실상 1982년에 처음 불거진 것이 아니다.
교과서 서술 방향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1982년이 유독 시끄러웠던 이유는 동아시아 기억 공간의 형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 사회의 역사의식이 특별히 더 나빠졌다기보다는 일본의 역사의식에 대한 아시아 이웃 국가들의 감수성이 더 예민해졌던 것이다. 이전까지 일본의 국내 문제로 치부되던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 교과서가 1982년 이후에는 동아시아의 문제가 된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공식 기억이 일본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에 배치되자, 과거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예민한 동아시아 차원의 기억의 회로를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 국내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트랜스내셔널한 감수성이었다.
(…)
책을 읽고 난 뒤에도 독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답답할 것이다. 책 어디에도 분명한 답이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답을 제시할 의도도 능력도 없었다. BMW나 미쓰비시 같은 재벌 기업만 과거의 범죄와 연루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네 삶도 과거와 연루되었다고 할 때, 그 과거와 ‘연루된 주체’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옳은지 나로서도 아직 막막하다. 과거의 범죄에 ‘연루된 주체’인 저자나 독자 모두 같이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가는 공론의 장이 열렸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안고 글을 마친다.
기억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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