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현실
‘나는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로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글들을 마주하면 언제나 생각에 빠지게 된다. 나는 행복한 유년을 보냈는가. 얼른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불행했나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딱 잘라 행복했다고 말하는 이들을 은근히 시기하고 미워하며 시간이 길게 지난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나는 복잡한 유년을 보냈다, 정도로 정리하는 게 맞겠다.
[…] 사람은 추상적인 계획과 구체적인 행동, 추상적인 검토와 구체적인 탐험, 이 두 가지를 통합적으로 운용하는 존재입니다. […]
[…] 소설을 발표하고 예술가가 되어도, 이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별을 직접 보지 않고도, 찬란한 성좌가 하늘에 있다는 걸 확신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별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늘에 있습니까, 내 머릿속에 있습니까? 마음에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
[…] 환상은 환상 아닌 것보다 못하다느니, 현실과 대칭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끌어안겠다고 하는 의지입니다. […]
― 《채널예스》 2012년 3월, 『바다의 편지』 발간에 즈음한 인터뷰 중에서
‘추상과 구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나에게 자주 ‘머릿속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밖에서 말로 행동으로 사건으로 일어나는 일만 현실이 아니야. 요기 요 쪼그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엄연한 현실인 거지. 요 안에 그걸 항상 기억해야 한다. 안과 밖이 어느 게 더 중요한 게 없어. 다 똑같이 중요한 거야.”
아버지는 특유의, 반쯤은 귀여워하고 반쯤은 경고하는 듯한 웃는 얼굴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내 이마 한가운데를 지그시 짚으면서 ‘똑같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하곤 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 한마디에서 어처구니없는 형이상학적 결론을 얻곤 한다. 어린 나는 어쩐지 그 말이 무서웠다.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말은 곧 내가 내내 엄청난 죄를 짓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용서받아서도 안 될 죄인이었다. 등굣길 문방구에 새로 들어온 예쁜 메모지를 훔쳐볼까 하고 생각했던 일이라든지, 내일은 아버지를 용케 속여 꼭 친구네 집에 놀러가야겠다고 계획했던 일이라든지, 싫어하는 누구가 그냥 갑자기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빌었던 마음속 일들이 모두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진짜 현실이라면. 나는 이른 나이에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엄청난 죄를 많이도 지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이인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두 가지 현실을 모두 살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에게는 이것이 가능했다. 그는 예술가였으니까.
구체적 현실을 머릿속에서 재현하는 것까지는 가까스로 내게도 가능했다. 나는 예술가의 딸이었으니 환경적인 편의에 힘입어, 거기까지는 겨우 어떻게 가능했다. 가장 기초적인 방법으로 문화·예술적 체험이 여기에 해당되겠다. 독서도 한 수단이다.
어려운 것은 아버지가 머릿속 현실을 자꾸 구체적 현실로 재현하고자 할 때였다.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필자는 소설을 방법으로 인생을 생각하고, 인생을 방법으로 소설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 「어떤 머리말」 중에서*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가공의, 상상의, 예술의 세계가 지니는 가치와 중요성을 내게 알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미친 여자 널뛰기’라는 말이 있다. 하늘의 별과 마음속 별이라는 아버지의 두 가지 현실이 내게는 ‘미친 여자 널뛰기’였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두 가지 현실은 언제나 엇박으로 혹은 외따로 널을 뛰었다. 예술을 현실처럼, 현실을 예술처럼 한 몸으로 살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나는 복잡한 유년을 보냈다.
*최인훈, 『문학과 이데올로기』(문학과지성사, 2009), 12쪽.
독서 반대의 신념
책읽기를 싫어했다.
아버지는 책을 많이 읽었다. 책 읽는 아버지가 있는 조용한 집이었다. 봄에는 마당에서 봄꽃을 살피고 와서 책을 읽는 아버지가,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며 소파에서 책 읽는 아버지가, 가을에는 인삼차를 마시며 책 읽는 아버지가, 겨울에는 서재의 이불 안에서 책 읽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책을 읽고 또 읽었고 책만 읽었다. 심지어 책을 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앞의 인용문을 다시 한 번 가져와보자.
필자는 소설을 방법으로 인생을 생각하고, 인생을 방법으로 소설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소설을 방법으로 인생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의 체감으로 그것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 그럴 만큼 가치 있는 현실적인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거쳐야 할 계획과 점검의 과정이 끝도 없이 길고 복잡했다.
일상적인 모든 일들을 깊이 있고 추상적으로 진지하게 다각도로 분석해서 장단점을 검토하다 보면, 실행에 옮기는 수고를 감수할 만큼 예술적·추상적·문화적·환상적·소설적 가치가 있는 구체적 현실의 일들은 많지 않았다. 어렵게 어떤 일을 결정했다가도 종국에는 다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이 뒤집히곤 했다. 두 가지 현실을 산다지만, 저울은 대개의 경우 추상의 세계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이유와 또 다른 몇 가지의 이유로 나는 결혼 전에 단 한 번도 ‘가족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여름 휴가철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해운대의 소식을 TV 뉴스로 접하며 바글바글하게 모여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쯧쯧 혀를 찼고, 겨울에 해돋이를 위해 동쪽 바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추울까 하며 아버지와 함께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다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아들만 셋이라 나를 딸처럼 귀여워해주시던 이모부가 여름에 휴가여행을 떠나면서 나를 데리고 가주신 덕분이었다.
남편은 결혼 초에 처가에서 이런 일을 접하면 크게 당황했다. 처가의 가풍에 상당히 적응된 이후에도, 아버지가 이틀 전에 돌연 당신의 회갑 모임을 취소하겠다고 할 때에는, 한 달 전부터 예약해둔 장소에 취소 전화를 하면서도 영문을 몰라 했다.
고심 끝에 내린 아버지의 결론에 따르면 호텔에서 치르는 회갑연은 당신의 추상적 현실의 틀 안에서 그다지 아름답거나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해 생신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차린 생일상으로 가족 모두와 함께 식사를 한 후,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어제 저녁에는 최인훈 댁엘 갔다. 김치수, 김주연, 정현종과 동행이었다. 전에도, 그렇기는 하였으나, 친척과 친구가 곁에 없다는 데서 생기는 고독함이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로서는 독서로써 그것에서 피해 갈 수 있겠지만, 그의 가족들은?
― 김현, 『행복한 책읽기』문학과지성사, 2012, 133쪽 중에서
그의 다른 가족들에 대해서는 따로 확인해야 하겠지만, 그의 딸인 나는, 독서로 인해 고독해지고 그것을 또다시 독서로 피해 가는 굴레는 짊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질려버렸다. 책 때문에 우리 가족은 TV 뉴스 한 꼭지조차 간혹 경도의 욕설까지 난무하는 신랄한 비평 없이는 보지 못하는 것이고, 책 때문에 기준미달이어서 보면 안 되는 드라마가 많은 것이며, 〈뽀뽀뽀〉 시청을 금지당한 채 어린 나이에도 뉴스만 시청하는 것인 데다가여덟살 무렵에 나는 유치하다는 이유로 〈뽀뽀뽀〉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볼 수 없었다, 책 때문에 우리는 식탁에서도 늘 문학과 예술과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All reading and no play makes my dad a dull man.
책 때문에 손발이 모두 묶여버린 것 같았다.
인터뷰어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샤르보니에는 레비스트로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같은 사람은 일상적 경험에 대해 피상적이고 모호한 해석밖에 못 합니다. 그런데 학문하는 인간은 갈수록 많은 힘을 발휘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본래 일반적인 사람에 비교해 학문적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발언이지만, 갈수록 발휘되는 많은 힘에 대해 잘 알지 못한 나는 그가 평가 절하한 ‘일상적 경험에 대한 피상적인 해석’과 ‘우선 저지르고 보는 적극적 실천’을 어린 시절 내내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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