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막다른 곳에 불시착하는 때가 있다. 내가 왐바 캠프를 떠나던 날이 그랬다. 스승 장 교수를 수행해 한 달간의 캠프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던 날이었다. 왐바의 보노보들을 향해 곧 돌아오겠노라,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땐 수행이 아닌 연구를 위해 오리라 마음먹었다. 박사과정 연구 주제를 단 한 달 만에 바꿔버린 셈이었다.
나는 ‘침팬지가 사회적 털 고르기를 할 때 상대에게 접근하는 방식’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더하여 오랜 기간 침팬지와 함께 살아온 영장류센터 사육사였다. 이러한 경력은 결정을 재고할 만한 요인조차 되지 못했다. 효율성이나 바람직성을 따지지 않고 살아온 자 특유의 감정적 결정이었다. 좀 윤색하자면, 운명적 사랑에 빠진 것이고.
깊고 예민한 감수성, 높은 지적 능력, 생동감 넘치는 몸짓, 풍부한 표정. 그중에서도 겁 많고 수줍은 성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가까이 다가와 탐색하듯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내 안으로 훅 미끄러져 들어오는 검은 눈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마저 잊게 했다. 그들을 향해 그들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 느긋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상대를 관찰하거나, 입술을 오리 주둥이처럼 내밀고 접촉을 구걸하거나, 쉰 목소리로 헐떡거리며 함께 웃거나.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 지상에 이토록 매혹적인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흡사 개안을 한 기분이었다. 골대를 옮긴 이유로 이보다 더 타당한 것이 있을까.
킨샤사 공항에 도착한 후 귀국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환승지인 파리행 항공편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결항됐다고 했다. 탑승 가능한 항공편은 스물두 시간 후에 있었다. 도리 없이 킨샤사 시내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스승은 난데없는 편두통으로 호텔 방에 드러누웠다. 나는 동료들에게 줄 선물이나 살까 하고 호텔을 나섰다가 철 모르는 폭풍우를 만났다.
아직은 건기인 10월 초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였다. 하늘은 맑았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니까 호텔을 나서던 무렵까진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잘못된 장소로만 인도하는 구글 맵에 열 받은 나머지 대기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어느 교차로에 도착해서야 주변이 어둑하다는 걸 깨달았다. 두껍고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점령하고 있었다. 거칠어진 바람은 먼지기둥을 몰고 도로를 내달리는 중이었다.
나는 몸을 빙글 돌려 지나온 길을 살폈다. 여기가 어딜까.
구글 맵은 길을 건너 전진하라, 지시했다. 건너편에 내가 찾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는 것이었다. 의심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일단 건너기로 했다. 이번에도 뱀 장수 천막으로 끌고 간다면 그땐 구글을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겠지, 싶었다. 먹구름 좀 끼었다고 세상이 뒤집히는 건 아닐 테니까.
아무래도 내가 먹구름을 너무 업신여긴 모양이었다. 첫발을 떼자마자 땅울림처럼 묵직한 진동이 대기를 흔들었다. 다음 한 발짝에 천둥이 포효하고 번개가 퍼뜩거렸다. 절반쯤 건넜을 때, 빗줄기가 죽창처럼 내리 꽂혔다. 건너편 인도에 발을 디디자 벼락에 얻어맞은 전봇대가 도로를 가로막으며 넘어졌다. 물막으로 뒤덮인 노면 위에선 끊겨나간 전선들이 불꽃을 흩뿌리며 날뛰었다. 무언가에 열 받은 대자연이 있는 대로 성깔을 부리는 느낌이었다.
거리는 그새 텅 비어 있었다. 행인도, 노점상도, 차량도, 가시반경 안에서 깡그리 사라졌다. 먹빛 하늘 밑으로 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나 홀로 낯선 길 위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꿈결처럼 빠르고 홀연한 변화였다. 도로가 아니라 차원을 건너온 것 같았다. 얼떨떨하다 못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내겐 우산도, 우비도 없었다. 낡은 야구 모자는 언젠지도 모르게 바람이 낚아 갔다. 그 밖의 물건들도 빗줄기와 돌풍과 불벼락을 피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노점상에서 산 파인애플 꼬치, 휴대전화, 여권과 현금이 든 목걸이 지갑 등등.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다면 왼쪽으로 2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슬라브식 단층 건물뿐이었다. 대형 간판이 붙은 걸로 보아 가정집은 아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았다. 홈스틸을 감행하는 3루 주자처럼 가게를 향해 내달았다. 간판 앞에 도착하며 나도 모르게 세이프를 외쳤다. 진심으로 내달았다. 간판 앞에 도착하며 나도 모르게 세이프를 외쳤다. 진심으로 살았구나, 싶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빗물이 줄줄 흐르는 몸, 산발해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칼, 허리띠 위로 풀어 헤쳐진 셔츠…….
간판을 읽는 수고 따윈 하지 않기로 했다. 뭘 파는 곳인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출입문이 잠기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지. 문고리에 걸린 프랑스어 안내 팻말 역시 무시해버렸다. 프랑스어를 모를뿐더러, 영업 종료 팻말이라면 안 읽는 쪽이 나았다. ‘못 봤다’라는 대답이 필요할 때에 대비해서.
나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전이 됐는지 실내가 어두침침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겠지, 싶어 잠시 문 앞에서 기다렸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쓱쓱 문지르고 물걸레가 된 머리털을 비틀어 짜며 1부터 10까지 헤아렸다. 그사이 어둠이 눈에 익었다. 동네 편의점만 한 공간이었고, 오만 가지 물건들이 들쭉날쭉 쌓여 있었다.
출입문 옆에 걸린 대형 뻐꾸기시계, 실내를 세로로 가르며 길게 놓인 통나무 테이블, 그 위에 진열된 동물 형상 조각품, 대리석 공예품, 조명등, 탈, 장신구. 벽 삼면은 크고 작은 유화들로 덮여 있고, 벽 아래 굽도리를 따라 작은 항아리들이 겹겹으로 몸을 포개고 있었다. 구글님이 알려주신 그 기념품점이 아닌가 싶었다.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익스큐즈 미.”
공손한 목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공손한 자세로 답을 기다렸다. 장신구 같은 소품을 몇 개 고를 생각이었다. 선물도 사고, 그를 빌미로 폭풍우도 피하고. 운이 좋아 영어가 통한다면 우산이나 우비를 빌릴 수도 있겠지.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주인이 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계 안의 뻐꾸기가 알을 낳을 때나 돼야 돌아오려는지, 원.
“헬로.”
좀 전보다 덜 공손하게 주인을 불러봤다. 응답 대신, 가게 안쪽에서 수상쩍은 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짤막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생쥐가 찍찍대는 것 같기도 하고, 강아지가 끙끙 앓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문짝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확인차, 출입문을 돌아봤다. 잘 닫혀 있었다.
나는 가게 안쪽으로 한 발짝 더 들어섰다. 중앙 테이블 너머에 놓인 책상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책상 뒤편에 나 있는 작은 문도 보였다. 책상 옆에 놓인 상자를 발견했다. 크기가 책상의 절반 정도나 될까. 마술사의 상자처럼, 검은 비닐 덮개가 덮여 있어 안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애니 바디?”
세 번째로 주인을 불렀다. 십 대조 할아버지도 깨워 일으킬 만한 쩌렁 쩌렁한 소리였다. 사나운 부름에 놀라 누군가 뛰쳐나오기를 바랐다. 주인 없는 가게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억울한 의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대응을 해온 건, 이번에도 주인이 아니었다. 좀 전의 수상쩍은 소리였다. 가청음역 밖으로 솟구치는 가늘고 날카로운 고음, 얼음판 위를 선회하는 스케이트 날처럼 빠르게 미끄러지는 리듬. 나는 귓바퀴에 고인 빗물을 손끝으로 훑어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확인용 질문을 던졌다.
“후스 데어?”
제대로 된 응답이 왔다. 크고 또렷하면서 노래하듯 길게 이어지는 소리였다.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밝히는 소리였다. 불과 반나절 전에 왐바를 떠난 나로선 못 알아차리기가 더 어려운 소리였다. 그제야 깨달은 바, 실내엔 강렬한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짙어서 강렬한 게 아니었다. 익숙해서 강렬한 냄새였다. 끊일 듯 말 듯 지속되는 저 소리처럼.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