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황금기를 뒤로한 채 저물어가는 거제 중공업, 누가 떠났고 누가 남았나.
프롤로그
조선소로 가는 길
조선소의 아침은 언제나 국민체조와 함께 시작된다. 아침 근무는 8시부터이지만, 조선소 사람들의 아침은 7시에 시작된다. 조선소 각 구역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하루 종일 착용할 안전벨트·안전화·안전모를 챙긴다. 7시 45분, 국민체조 음악이 나온다. 모든 사람들이 동작을 따라 하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 주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안전 구호를 외친다. “철저한~ 안전 점검 좋아!” “안전 점검~ 좋아! 안전 점검~ 좋아! 안전!”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도크로, 안벽으로 향한다. 쾅쾅 소리가 야드를 채우기 시작한다. ‘골리아스’갠트리 크레인은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를 내며 1,000톤이 넘는 블록을 들고 부지런히 레일을 탄다. 도크 안에선 용접 불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반짝거린다. 며칠 전 명명식을 거친 2만 TEU급 컨테이너선 한 척은 오늘 시운전을 앞두고 있다. 뿌우뿌우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선박은 남해안 일대를 누빈다. 이 배는 앞으로 태평양과 인도양을 거쳐 유럽으로 향할, 덴마크의 해운 회사 머스크 라인MAERSK LINE의 컨테이너선이다.
석양이 내려앉을 무렵에도 조선소의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 다음 날 작업을 위해 미리 블록을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블록은 ‘트레인스포터’라는 개조된 트레일러로 움직인다. 1미터가 미처 되지 않아 보이는 낮은 운전석이 수백 톤 블록에 깔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 그러나 수십 대의 트레인스포터는 야드 안의 교통 규정을 지키며 요리조리 육중한 블록들의 이동을 완수해낸다. 설계동에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의장설계 엔지니어들은 내일 현장에 나가기 전 도면을 다시 챙겨보고 규정을 공부한다. 행여나 용접하는 노동자들의 작업하는 자세가 불편할까 걱정이다. ‘아래 보기’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옆 보기’는 괜찮지만 ‘위 보기’ 자세로 해선 안 된다. 용접 불꽃으로 화상을 입을 수도 있고, 용접의 품질도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고민을 마치고 나면 10시가 넘는 게 다반사다. 회사에서는 8시, 10시로 야근 코드를 정해뒀고 오늘도 10시가 됐다. 김 과장은 퇴근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아이와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모두가 떠난 듯한 야드 안에는 아직도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다. ‘돌관 작업’이 시작됐다. 오늘은 밤을 새우고 내일 오전에 좀 쉴 생각을 한다. 몇 명이 더 들어가야 할까, 악전고투로 애를 쓰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옥포의 골목은 불야성을 이룬다. 횟집에 앉아 있는 사람, 삼겹살집에 앉아 있는 사람,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이 모두 회사 사람이다. 그들이 입은 작업복에는 부서와 이름이 쓰여 있다. “와, 너희도 회식이냐?” 만나는 사람마다 깔깔대면서 인사를 나눈다. “잠깐 들러서 한잔 더 하고 가.” 고향 선배, 학교 선배가 붙드는 일은 부지기수다. 술이 불콰하게 취한 노동자 한 명은 브랜드 신발을 모아 놓은 가게에 들어가서 딸내미 신발을 산다. 취향은 모르겠으나 아빠가 사준 건데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 외국인들이 자주 간다는 ‘스포츠바’에서는 네덜란드에서 온 선박 엔지니어들과 호주에서 온 플랜트 엔지니어들이 다트 대결을 하고 있다.
거제고와 해성고 앞에는 학생들을 기다리는 스쿨버스가 즐비하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학생들을 귀가시키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이 버스는 아침에는 아빠가 출근하기 위해, 점심에는 엄마가 회사 문화센터를 가기 위해 탔던 버스다. 엄마 아빠를 태웠던 차는 아이를 귀가시키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친다.
조선소의 하루는 이미 술이 떡이 된 아빠가 들고 온 신발 상자를 받고 투덜대는 딸의 잔소리로 끝이 난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위기
2002년 스웨덴의 코쿰스Kochums 조선소는 도시의 랜드마크였던 골리아스 크레인 한 기를 단돈 1달러에 현대중공업에 매각한 적이 있다. 한국인들은 유럽 조선산업의 한 시대가 지나갔음을 ‘말뫼의 눈물’이라는 말을 빌려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말뫼의 눈물’은 한국 조선산업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기로 스웨덴은 지상 최고의 복지국가이고, 퇴직수당으로 먹고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나라이다. 코쿰스 조선소가 문을 닫은 이후로 말뫼는 어떻게 되었을까?
2017년 1월 영국을 한 달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북부 잉글랜드의 리버풀 그리고 뉴캐슬을 찾았다. 글래스고의 클라이드 강변에 있는 고반Govin 조선소도 찾았다. 모두 1960년대를 재패했던 영국의 조선소들이다.
글래스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조선산업의 마지막 순간은 1970년대 초반 클라이드 강변 조선단지 노동자들이 벌인 ‘현장 검거work-in’ 투쟁이다. 당시는 전부 지원이 끊기고 ‘자구안’을 통해 최소 6,000명의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노동자들은 야드를 지키겠다고 일어섰다. 노동조합은 정부의 보조금을 지원받을 때까지 일터를 지키겠다며 출근했다. 노동자들의 자주관리가 시작됐다. 노동자들의 이런 투쟁에 비틀스의 존 레논과, 유명 코미디언인 빌리 코놀리 등 명사들의 지지 선언과 후원이 줄을 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시민들의 후원도 이어졌다. 투쟁은 성공적이었다. 영국 정부는 1억 파운드의 공적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그 후, 고반 조선소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1960년대까지 세계를 재패했던 고반 조선소 도크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사택과 공동주택이었을 주변 동네는 전혀 정비되지 않은 채 낙서로 가득 차 있었다. 리버풀과 뉴캐슬의 사정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 1위 조선산업 국가의 조선소들은 버려진 채 희미한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다. 일을 하던 사람들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제 몫을 찾지 못하고 사라져만 갔다.
한국은 1960년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경공업을 성장시켰고, 1970년대부터는 중공업을 집중적으로 성장시켜왔다. 전태일이 일하던 봉제 공장부터 울산의 대공장까지 많은 일터가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졌다. 2018년 현재, 반도체와 스마트폰, 자동차로 대표되는 한국의 제조업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산업의 흥망성쇠와 국가 경제를 종종 연결 지어 생각하곤 한다. 태극기가 올림픽 시상대에 올라가는 장면과 삼성전자가 매출과 영업이익 신기록을 세우며 스마트폰, 메모리 반도체 부문 세계 1위에 등극하는 장면을 중첩해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산업화 경제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경제위기 장면이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산업 경쟁력을 국가 경쟁력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은, 극적으로 입장을 바꿔 ‘좀비 기업’을 빨리 청산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조선산업이 바로 그 청산해야 할 대상이었다.
2010년대 중반, 매출 50조 원을 벌어주던 수출 대기업이자 10만 명을 직접고용하고 십수만 시내하청 노동자와 수십만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던 제조업의 선두주자인 조선산업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전도되어 “기회는 위기”로 돌아왔다. 2013년, 현대 중공업이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직원 2,000명을 감원하고, 사업 구조를 재편한다고 했다. 이듬해, 삼성중공업이 ‘노란봉투’권고사직·희망퇴직 신청서를 돌린다는 소문이 조선산업계 전체에 파다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전조에 불과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2010년대 조선산업에는 호재가 없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경기가 상승하고 ‘중국 경제의 부상 → 해운 물동량 증가 → 선박 건조량의 증가’로 이어지는 호재가 있었다. 따라서 중소 조선업체들이 증가했다. 통영의 SPP 조선, 성동조선해양 등이 확장 기조로 치고 올라오고 있었고, 진해 대선조선을 인수하며 화려한 M&A를 통해 재계 12위까지 올라온 STX조선해양은 세계 4대 조선소에 이름을 올렸다. 1990년대에 일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LNG 운반선 기술을 독점해 ‘고부가가치선’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빅 3’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는 거침없이 순항했다. 하지만 2008년 경제 위기로 인해 해운 물동량이 줄자 수주량이 급감하고, 조선소들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일본의 기술력’과 ‘중국의 인건비’ 사이에 끼어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 시절 대형 조선소들이 찾은 ‘기회’는 바로 해양플랜트 수주였다. 유가가 상승하는 국면에서 ‘빅 3’는 낯선 고객들과 조우했다. 원유 시추, 운반, 정제를 담당하는 기능을 제외한 플랜트의 몸체인 헐hall 부분의 건조 계약을 따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박 건조와 해양플랜트 건조가 유사하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유가 시대에는 해상에서 원유를 캐야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다는 오일 메이저주요 석유회사들의 사업 계획이 밑바탕에 깔렸다. ‘빅 3’는 드릴십, 고정식 플랫폼, 리그선, 해양원유생산설비FPSO 등 다양한 품목의 제품들을 수주하기 시작했다. 애초 전체 제품군 중 10% 내외를 차지했던 해양 부문의 비중은 2013~2014년을 경유하며 70%까지 올라갔다. ‘최고의 조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양플랜트 시장을 선도하고 석권한다는 비전이 주요 언론 산업면 기사를 채웠다. 전국의 많은 조선공학과의 이름이 ‘조선해양플랜트공학과’ 혹은 ‘조선해양공학과’로 바뀌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때다. 그러나 ‘기회’의 꿈을 안고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해양플랜트는 ‘위기’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과 함께 조선산업계 ‘빅3’ 중 하나로 불려왔던 대우조선해양이하 ‘대우조선’은 2015년부터 위기에 휩싸였다. 이때 새로 취임한 정성립 사장은 취임사와 기자회견을 통해 “본업에 집중하고 기존의 부실을 떨어내겠다”고 했다. 취임사를 통해서는 “사업 다각화로 인해 우리의 자원이 분산되지 않도록 우리의 본업인 상선, 특수선, 해양플랜트 분야로 힘을 최대한 모으고 그 외의 분야는 과감하게 정리하겠”다고 다짐했다. 2015년 5월 25일 기자간담회에서는 기존의 부실도 2분기 실적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회계 감사에서 정 사장이 밝힌 것 외에 숨어 있던 다른 ‘부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우조선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위기의 파도로 빨려들어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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