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글
노명우 | 사회학자,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추천사를 부탁하는 이메일을 받고, 그야말로 ‘찰나’의 속도로 승낙했다. 그러나 원고를 읽기 시작하자 내가 추천사를 쓸 ‘자격’을 갖췄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학술서의 추천사라면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으로 쓸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추천사는 전문 지식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격을 요구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한 ‘격’을 갖추었느냐는 자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을 내리지 못했다. 따라서 이 글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추천사 형식으로 쓴 반성문에 가깝다.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한 사람의 삶을 태연하게 비평한다면, 주제넘은 행동일 것이다. 자격은 없지만 나의 주제는 알고 있기에 비평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을 경청에서 찾았다. 나는 임상철이 〈빅이슈〉의 구매자에게, 그리고 이 책의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경청하기로 했다.
책 속에는 임상철의 인생 궤적을 말해주는 단편적인 정보가 흩어져 있다. 그 정보의 조각들을 모아봤다. 1967년에 그는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구 공장에서 일했고 조형물 회사에서 조수 겸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IMF 구제 금융 사태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1998년 그는 서울역으로 갔고 약 십팔 년 동안 홈리스로 지냈다. 우리는 흔히 서울역 앞에서 마주치는 술에 취한 사람을 전형적인 홈리스로 간주하지만 홈리스의 전형은 없다. 모든 홈리스가 길거리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임상철은 때로 피시방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고, 24시간 사우나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고, 노숙인 쉼터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홈리스 자립잡지 〈빅이슈〉를 판매하는 ‘빅판’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이 판매하는 잡지에 자신의 인생을 담은 글을 끼워 넣었다. 그는 이렇게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육 년여 동안 빅판으로 활동했다.
사회학자로서 빅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길거리에서 빅이슈를 판매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아, 빅판이 저기 있구나’라고 혼잣말을 하며 아마 다른 사람은 빅이슈 판매원을 부르는 ‘빅판’이란 명칭을 모를 것이라 단정하기도 했다. 매번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빅이슈〉를 구입하며 스스로를 양심 있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해왔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출간하고 〈빅이슈〉와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기에 꽤나 알고 있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빅판의 기능만을 알고 있을 뿐임을 깨달았다. 시청역과 광화문역 부근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빅판을 기억하려 해도 빅판이 흔드는 〈빅이슈〉만 기억날 뿐 인간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 사람을 인간이 아닌 빅판이라는 기능 범주로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임상철은 ‘기능인’이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말해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기능을 수행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세상에 보내는 편지들로 타인에 의해 마음대로 대상화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표현한다. 빅판의 기능만을 알고 있는 나에게 그는 편지로 타인에 의해 마음대로 대상화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표현한다. (중략)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잡지를 판매하며 살아가는 임상철입니다. 반갑습니다. 〈빅이슈〉란 잡지와 홈리스로 생활한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분과 만나게 되어 조금은 서글픈 생각에 쓸쓸하기도 합니다.
저는 꽤 긴 세월을 홈리스와 빅판빅이슈 판매원으로 살아왔습니다. 십팔 년 정도를 홈리스로 지냈고, 육 년여의 시간을 빅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빅이슈〉를 팔면서 여러 곳을 떠돌다가 노숙 생활 중 다쳤던 다리의 나사 제거 문제로 한 달 정도 휴식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는 홍대입구역에서 〈빅이슈〉를 팔았습니다.
저는 스스로나 남들이 느끼기에 아름답지만은 않은 잡지 판매 일에 대해 ‘왜 긴 세월 하고 있지?’ 하며 스스로에게 자주 묻습니다.
‘창피함을 내동댕이친, 자존심이 없는 존재라서?’
‘뜬구름 같은 자립이란 단어를 위해서?’
‘다른 일은 하기 싫은 게으른 자라서?’
제 마음을 독자분들과 나누고 싶은 소통의 바람, 또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큰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바람이기에 ‘독자분들이 이 잡지를 왜 살까?’하고 궁금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길거나 짧은 인생의 여정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저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순간의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한 어린 시절, 원가를 부르며 지냈던 보육원, 조각가이자 조형물 제작자로 살고 싶었던 짧은 젊은 날과 외환 위기 이후 인력 사무소를 전전하며 근근이 버텨온 십팔 년여의 홈리스 생활, 현재의 빅이슈 판매원 생활, 그리고 앞으로 살고자 애를 쓰고 있는 미술가로서의 삶까지도….
추구하는 삶과 좌절하는 삶 사이에서 과거의 불행을 밑거름으로 삼지 못하고 망각해버리는 인생이 될까 두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나갈 생각입니다.
임상철
*〈빅이슈〉는 1991년 영국에서 창간한 대중문화 잡지로 홈리스에게만 판매 권한을 주어 자립을 돕는다. 빅이슈는 자조自助, 사회적 거래, 비즈니스 솔루션을 통해 기회를 창출함으로써 빈곤을 해체하는 것을 미션으로 하는 사회적기업이다.
차가운 겨울
안녕하세요. 홍대입구역 3번 출구 빅이슈 판매원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이제부터 저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제가 파는 〈빅이슈〉 잡지 뒷면에는 A4 용지 두 장 분량의 짧은 수필이 동봉되어 있습니다. 수필을 쓰는 이유는 〈빅이슈〉 특성상 구매하는 분들이 ‘이 사람은 왜 여기서 잡지를 팔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할 듯해서입니다. 모자란 필력이지만 진솔한 마음으로 쓰고 있으니 관심과 응원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꽤 긴 세월을 홈리스로 살았군요. 어찌보면 지금도 홈리스란 이름표는 계속 달고 다니며 살아가는 중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빅이슈 사무실을 찾아가기 전의 일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겨울은 항상 절망을 던져주고 떠나간다. 다시 오겠다면서. 외환 위기가 닥친 서른을 넘어서부터 겨울은 항상 나에게 굶주림의 고통을 주었다. 건기를 맞은 아프리카의 동물들이 굶주리듯 이것은 하루하루의 생계만 유지하면서 삶에 지쳐가는 잡부 인생이 치러야 할 대가다.
오늘도 문방구에서 이력서를 산다. 이력이라고 내세울 것 하나 없지만 취직하려는 청소 용역 업체에서 갖고 오라 하니 써야 한다. 일하고자 했던 거의 모든 곳의 면접에서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듣고 사무실 문을 나서곤 했으니 쓰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흉하게 변색된 나의 오른쪽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면접관과 십 분이 넘어가도록 회사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나는 그들을 이해해줄 수 있다. 어차피 그들도 윗사람에게 괜한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으므로. 스스로의 삶을 점점 찾기 힘들어지는 내가 싫어진다. 더 이상은 이력서를 써서 내고 싶지 않다. 차가운 겨울이다.
내 삶은 고시원에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과 함께 녹아내린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여유로워 보인다. 모두들 웃는다. 마치 대한민국은 행복한 사회라는 듯이. 내일도 텔레비전과 니코틴에서 위안을 찾겠지. 오늘처럼.
겨울은 항상 절망적이었지만 올겨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절망이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빅이슈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빅이슈에서도 안 되면 어디로 가지?
“임 씨, 정신 차려. 당신은 홈리스라고.”
또 다른 내가 소리를 지른다. 나를 한심스레 쳐다본다. 홈리스 아닌 홈리스로 지내려고 했었지만 지금 나에겐 자존심, 창피함 등은 거창하게 들리는 꿈같은 말일 뿐이다. 생존이 우선이다. 절망의 겨울도 보내야 한다. 시간을 버려야 내가 산다. 새로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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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초, 빅이슈 문을 두드릴 때였습니다.
그때는 오른쪽 눈 때문에 인상이 험했습니다.
정말로 살고 싶습니다
예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란 제목의 영화인데 젊은 주인공이 죽음의 위험에 처해 절박해지자 “신이여 이때껏 살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울부짖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때껏 살아오게 해줘서 감사하다니? 십오 년여 전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라 두 번째 글을 드리겠습니다.
새벽부터 승합차를 타고 건설 현장에 도착했다. 인력 사무소 잡부 일은 직업을 매일 바꿀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지만 또한 하루살이 인생으로 삶을 이어나가기에 큰 매력은 없기도 하다.
오늘 하루 동안 나의 직업은 벽돌 곰방이다. 주택 건설 현장에서 벽돌들을 등짐으로 옮겨 필요한 곳마다 미리 배치시켜주는 작업으로, 시간에 관계없이 정해진 양만 끝내주면 되는 일이다.
해야 할 하루 작업량을 보니 아침 일곱 시부터 시작하면 서두르지 않고 하더라도 넉넉잡아 오후 네 시 안에는 끝낼 수 있는 물량이었다. 일당은 타 잡부 일보다 1.5배 더 받지만 일은 고되며 입에서 단내가 나고, 등에선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오전 여덟 시 무렵 건설 현장으로 아침밥이 배달됐다. 현장에 있던 예닐곱 명이 급조한 간이 식탁 주위로 모여든다. 간이 식탁이라야 블록으로 쌓은 자리에 신문지를 깔아놓은 것이 전부다. 소주도 두어 병 같이 와 밥과 반찬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침부터 술 한 잔씩 하는 것은 건설 현장의 오래된 관행이며 (요즘은 큰일 납니다) 일꾼들에게는 윤활유와 같은 역학을 해 활력을 준다. 나도 밥뚜껑에 소주를 따라서 인부들과 그렇고 그런 잡담을 하면서 두어 잔을 반주로 마셨다. 알코올이 온몸을 돌기 시작하면서 하루 일에 대한 짜증은 달아나며 활력이 생겼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벽돌을 등에 지고 이곳저곳 던져놓으며 간이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오전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숨소리는 등에 진 벽돌들의 무게만큼이나 거칠어지고 다리는 근육들이 제각각의 형태로 벌써부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또 다시 벽돌을 지고 외벽 간이 계단 삼 층 정도 높이에 다다를 무렵, 순간 계단이 꺼지면서 온몸이 기우뚱했다. “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슬로비디오처럼 벽돌들과 내 몸이 허공을 휘저었다.
건물 외벽을 지탱하던 아시바(비계)가 뒤틀리면서 지고 있던 벽돌들과 함께 중심을 잃고 출학을 하였던 것이다. 추락하는 것은 불길하다.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행복한 시간과 불행한 시간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뇌가 갖고 있는 특이하고 신비한 능력이다. 떨어지는 삼 초 정도의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지며 살아온 생이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지나갔고 그 끝에서 나는 갈구하며 절로 기도하였다. 이대로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로 살고 싶습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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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왼쪽 다리뼈 두 군데가 골절돼서 한 일 년을 고생했습니다. 지금도 박혀 있는 철심은 그날을 기억하게 합니다. 당시 생존만을 위해 살던 홈리스라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추락하는 순간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머릿속을 울린 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들개
시간이 빠르게 느껴집니다. 저는 시간에 게으른 자로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지금은 극복하는 자가 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 돼서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홈리스로 지낸 시절을 돌이켜보면 혼자보단 둘이 어울리며 다니는 게 여러모로 좋다고 느껴지는데요. 장마철 날씨와 함께 제가 삼십 대 시절에 알고 지냈던 청년이 생각나 세 번째 글을 드립니다.
나는 인력 사무소를 전전하며 떠돌아다니는 중이다. 생존을 위해 도시를 떠도는 들개라 해도 무방하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친구나 동료들은 내 벗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들은 들개를 거부하니까.
나는 현재 충청남도 천안역 부근 인력 사무소에서 제공하는 숙소를 집으로 정해서 기거 중이다. 여기서 이십 대 후반인 청년을 만났다. 청년은 나하고 친해지길 원하는 듯했다. 숙소에서 같이 지낸다는 것은 뜻 모를 호감을 줄 수도 있어 청년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시간은 초여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장마철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한 날씨는 경험상 인력 사무소 노동자들에게 힘겨운 돈 가뭄의 시간이 될 거라고 나는 알고 있다. 건설 일, 특히 인력 사무소는 비하곤 물과 기름같이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이기도 하다. 올해 장마철에는 특히 새벽에 폭우가 내린 날이 많아서 그나마 예약했던 일도 계속 취소돼 사무실 일거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숙소에 있는 노동자들은 하루하루 날이 가도록 일거리를 얻지 못하고 공치는 날이 많아 수중에 있던 돈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늦은 저녁에 인력 사무소 소장이 불쑥 숙소를 찾아왔다.
“일이 없어서 내일부터 인력 사무소 숙소를 폐쇄합니다. 내일까지 짐들 챙기고 갈 곳들 찾아가세요.”
없는 자인 나는 어느 해부터인가 가진 자가 하는 말에 숨죽이고 순종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돈도 바닥나고 잠자리마저 잃다니.’
낯빛은 절망으로 흐르고….
짐이라고 해봐야 안전화와 작업복 넣은 배낭 하나, 그리고 내 몸이 전부다. 같이 현장 일 몇 번 다녔던 이가 사정을 전해 듣고 찾아와서 숙소에 멍하니 있는 나와 이십 대 청년을 보며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같이 지내자고 한다. 가보니 흡사 공포영화에 나올 듯이 철거하기 전의 폐가였지만 그래도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있고 편히 숨 쉴 수 있으니 고마운 곳이었다.
그 집에서 지낸 지 이틀이 흐른 저녁, 같이 지내자던 사람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트집을 잡고 언성을 높인다.
“도둑고양이가 들락거리면서 똥, 오줌 싸니까 문단속 잘하라고 했는데 왜 안 하냐?”
그러면서 청년을 보며 나가라고 소릴 지르고 욕하기 시작한다. 그날따라 오후부터 내리던 비는 폭우로 변해가며 밤은 점점 거칠어졌다. “이 폭우에 어딜 가냐” 하며 말려도 그는 막무가내로 청년을 몰아세운다. 듣기만 하던 청년은 조금 후 “알았어”라는 침울한 한마디와 함께 시커먼 폭우 속으로 들어갔다. 비와 어둠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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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지금 어떤 삶을 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실한 삶을 살고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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