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훈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그동안 글을 쓰면서 한자를 사용하거나 병기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훈의 시대》에서는 그 시작부터 ‘훈訓’이라는 한자의 뜻을 인용해 둔다. 이 단어가 서사 전체를 면면히 이끌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성격과 범위를 밝히고 규정할 것이다. 별것 아니게 보여도 이것은 무척 중요하고 소중한 작업이다. 많은 작가(연구자)들이 서론에서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의 지면을 할애해 핵심이 되는 단어의 의미와 활용 범위를 밝혀두곤 한다. 그래야 책임질 수 있는 언어로만 서사를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지루한 부분이니까 가볍게 훑거나 몇 페이지만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 별 문제는 없다.
· 훈訓: ①가르칠 훈, ②가르침 훈, ③이끌 훈, ④새길 훈, ⑤새김 훈, ⑥따를 훈
· 자원字源: 言+川. ‘言언’에는 ‘말’이라는 뜻이 있고 ‘川천’에는 ‘따르다順’는 뜻이 있다. 그래서 訓은 ‘(타인을) 말로 이끌어 따르게 하는 일’이고 ‘가르쳐 깨우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책에서 사용하려는 ‘훈’은 어렵거나 추상적인 개념어가 아니다. 하나의 음으로 떼어두니 무언가 생소하지만, 사실 우리 곁에 언제나 있어온 친숙한 단어다. 그것을 그 용례의 범위를 벗어나 무리하게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훈은 다음과 같은 단어로 주로 활용된다.
· 훈계, 훈련, 훈시, 훈육, 훈화, 가훈, 교훈 등
훈계訓戒: “그는 거짓말을 한 아들에게 한동안 훈계를 늘어놓았다.”
훈시訓示: “담임교사는 학생들에게 교칙을 잘 지킬 것을 훈시했다.”
훈육訓育: “나를 교육한 것은 학교지만 훈육한 것은 아버지였다.”
훈화訓話: “월요일 아침이면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있었다.”
훈련訓練: “선수들은 하루에 8시간씩 고된 훈련을 받았다.”
가훈家訓: “우리 집의 가훈은 ‘화목’이다.”
교훈敎訓: “사람은 실패에서 더욱 큰 교훈을 얻는 법이다.”
용례를 살펴보면 ‘훈’은 가정, 학교, 군대, 회사,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상 공간에서 개인을 가르치는 데 주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훈은 ‘―해야 한다’는 지침을 전달 혹은 강요하는 ‘계몽의 언어’인 동시에 ‘자기계발의 언어’다. 특히 어느 집단에 소속된 한 개인에게 위계적이며 명시적으로 다가간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에게, 회사에서는 사장이 임직원들에게, 국가에서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단어로, 문장으로, 서사로, 계속해서 훈을 내보낸다. 취학을 앞둔 어린 시절부터 노동할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훈을 수용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겪는다. 예컨대, ‘정직’이라는 훈이 개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가정(부모→자녀): “거짓말을 하면 안 돼. 정직하게 살아야 해.” 하는 ‘훈계’
학교(학교→학생): “정직”이라는 ‘교훈’
학교(교장→학생): “정직한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는 ‘훈화’
학급(교사→학생): “(교장 선생님의 말씀처럼)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하는 ‘훈시’
회사(회사→직원): “정직한 제품 생산”이라는 ‘사훈’
한 개인이 가정, 학교, 회사 등 생애주기에서 거의 반드시 거쳐야만 할 모든 공간의 언어는 ‘훈’이라는 형태로 전달된다. 그것은 그대로 한 시대가 개인에게 품은 욕망이다. 일상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강요되는 그 훈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가훈이든 교훈이든 사훈이든, 일상 공간의 훈들은 한 개인의 몸을 만드는 데 부단히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결국 그 주변을 둘러싼 그 언어가 그의 격을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훈은 다음과 같은 개념의 언어다.
‘훈’은 1)집단에 소속된 개인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언어이고, 2)지배계급이 생산, 해석, 유통하는 권력의 언어이고, 3)한 시대의 욕망이 집약된 욕망의 언어다.
이후의 몇 페이지는 미완성으로 남은 박사 논문의 일부를 ‘훈’이라는 개념에 맞추어 그 문장을 다듬고 각주를 삭제하는 등의 작업을 해서 차용한 것이다. 풀어서 쓴다고 해도 논문만큼 재미없는 글쓰기는 세상에 없으니, 2부로 곧장 넘어가도 괜찮다. 다만 《나는 지방대 시간 강사다》라는 글을 쓴 사람이 대학에서 어떤 시기의 무엇을 연구했는지 궁금하다면 간단하게나마 읽고 넘어가도 좋다.
훈은 그 시작부터 교육의 한 원리로 등장했다.
서당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을 우리는 ‘훈장訓長’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말 그대로 ‘훈을 전달하는 어른’이다. 서당 설립에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각각의 수준은 크게 달랐지만, 그들은 한 동네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고 두루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회초리로 상징되는 훈장의 권위는 유학이라는 시대의 훈이 부여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 사회가 훈을 전달하는 가장 최전선에 있었고 그에 따라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 서당이라는 전근대적 교육기관의 소멸과 함께 훈장이라는 호칭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그 이름을 바꾸어 여전히 우리 곁에 동시하고 있다. 여전히 훈의 전달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훈을 어떻게 어린 학생들에게 내재화시키는가, 그들을 얼마나 균질한 국가의 일원으로 견인해 내는가에 결국 그 목적이 있다. 그 역할을 맡은 이들은 그야말로 역사적 사명을 띤 존재들인 셈이다. 교사라는 직업이 일반적인 노동자 이상으로 대우받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교사 및 여러 분야의 지도자에게 스승이라든가 은사라든가 하는 다소 과한 수식어를 붙이며 필요 이상으로 존경하는 문화를 가진 국가일수록 전체주의적이거나 후진성을 띠고 있기 쉽다. 스승의날이면 어린 학생들이 준비한 선물이 교탁을 가득 채우고, 선물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것을 개봉하는 시간을 가지고, 선물을 준비하지 않은 이들을 체벌하는 그런 야만이, 불과 199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에도 있었다. 지금은 스승의날에 아예 자체 휴교를 하기도 하고, ‘김영란법’의 시행 이후부터는 선물을 받는 일이 금지되었다는 모양이다. 이전처럼 학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교사는 국가의 훈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로서 여전히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 이것은 한 국가가 얼마나 전체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맞닿는다. 근대의 국민국가들은 국민 개개인을 균질한 몸으로, 그러니까 훈의 수용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갑과을, 강자와 약자, 우승과 열패, 제국과 식민으로 모든 것이 이분되는 시대였고, 국민의 계몽과 개조가 곧 한 국가의 생존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모든 국가가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근대의 국민국가들은 학교를 정비하고 교육령을 공포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인식과 실행이 너무나 늦기는 했지만, 대한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교육학이라는 분과학문 역시 수입되고 연구되기에 이르렀다.
(중략)
2
액체화된 근대, 대리인간이 된 개인들
근대의 시작은 본격적인 ‘훈의 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리는 것이 었다. 시대가 드러낸 욕망의 물결은 개인에게 본격적으로 그 훈을 전달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근대인이 될 것을 요구했다. 성실, 근면, 절제, 위생, 저축, 협동과 같은 단어들이 여러 매체의 논설, 위인전기, 광고 등을 통해 무척이나 반복적으로 개인에게 가서 닿았다. 이전의 훈이 마치 고체 같은 것이어서 개인에게 부딪혀 와서 하나의 산처럼 높이 쌓여가는 것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유동하는 액체로서 밀려왔다. 개인의 몸 역시 함께 액체가 되기를, 그리고 그에 영합해 함께 흐르기를 요구받게 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의 이론을 잠시 빌려오고 싶다. 근대성에 천착해 온 사회학자인 그는 근대의 징후를 “모든 견고한 것들, 이를테면 이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구조와 제도가 녹아버리는 것”으로 파악하고, 개인의 모든 삶의 영역 역시 액체화되었음을 선언했다. 하나의 시대는 한 개인의 삶에 몇 번이고 도래하게 되며, 그때마다 개인의 몸을 계속해서 녹여내는 것이다. 이제 개인의 몸은 단단한 고체라기보다는 그 변화에 함께 완벽하게 녹아들어야 할 유동적인 액체와 상태로서 항시 존재하기를 요구받는다. 이것은 근대인이 되기 위해 개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성’, 즉 유연이라는 속성이 근대 이후의 바람직한 자질로 받아들여진다고 한 것처럼, 지금에 이르러 우리의 몸은 몹시 흐물흐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나와 당신의 몸이 당장 운동이 필요할 만큼 볼품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얼마나 이 시대가 원하는 ‘4차 산업혁명에 어울리는 몸’, ‘혁신적인 몸’, ‘융합을 선도하는 몸’이 되었는가, 다시 또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기 위해 유동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게으르고, 자기 혁신이나 발전이 없고, 폐를 끼치는 존재로 매도당한다. 이러한 욕망에 자신의 몸이 젖어드는 것을 거부한다고 해도 그 몸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해야 하기에, 결국은 액체화된 몸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사실 액체든 무엇이든, 현재 우리의 몸은 전에 없던 상태를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 어떤 단어를 빗대어도 될 것만 같다. 일본의 젊은 연구자인 후지타 나오야는 이런 개인의 몸을 ‘좀비’로 규정하며 《신세기 좀비론: 좀비는 곧 당신이고 나이다》2017라는 독특한 책을 저술했다. 거기에도 ‘리퀴드 모더니티 시대의 공포: 육체로서 좀비란 무엇인가?’라는 장이 등장한다. 이전과는 달리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빠르게 유동하는 영화 속 좀비의 모습이, 액체화된 후기 근대사회의 개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든, 후지타 나오야의 좀비든, 모두가 이 시대의 ‘괴물화’된 우리의 몸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 김민섭의 표현으로 하자면 ‘대리인간’ 정도가 되겠지만, 그 이상 자극적인 무엇을 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런 상태의 개인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바로 ‘훈’이라는 점을 짚어두고 싶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