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신을 믿지 않으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없는 걸까?
최근에 아버지가 치아 관리를 받으러 치과에 갔을 때, 상냥한 치과조무사 브리트니가 날씨며 그녀의 남자친구가 새로 구입한 페인트볼 총, 카다시안네 식구들 소식 등을 떠들어 댔다. 그러다 어쩐 일인지 종교 이야기까지 꺼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자 그녀는 왜 안 다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라서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그럼 회당에는 나가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안 나간다고 하자 그녀는 또 왜 안 가느냐고 캐물었다. 아버지는 무신론자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 속에서 반짝이던 빛이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그녀는 풀이 푹 죽어 버렸다.
“하지만 신을 안 믿으면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녀가 생각에 잠겨 치과 기구들을 공중에 든 채로 물었다.
“글쎄. 지미니 크리켓Jiminy Cricket, 만화영화 「피노키오」에서 요정의 명령에 따라 피노키오의 양심 역할을 하는 캐릭터 ─ 옮긴이 기억해요? 내 양심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브리트니는 지미니 크리켓이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아버지에게 양심이 있다는 점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종교도 없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있어야만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양심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덕성이 종교적인 믿음과 참여에서 생겨난다는 생각은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이들에게는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종교가 없으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억측이 생겨났다. 무종교인이나 무신론자는 비도덕적인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을 브리트니 같은 사람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인디애나 주 테일러 대학교의 제임스 스피겔James Spiegel 교수도 그의 저서 『무신론자 만들기』The Making of an Atheist에서 무신론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성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또 대법관 안토닌 스칼리아Antonin Scalia는 최근에 “무신론자는 악마의 소망을 더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뿐만 아니라 ‘들어가며’에서 소개한 것처럼, 다양한 전국적 조사에서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신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개인적인 도덕률의 결여와 연결 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본인에게 종교가 없거나, 종교가 없는 친구나 친지들을 둔 사람들 중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고수하는 사람은 없다.
종교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도덕성
종교가 없는 사람은 비도덕적일 것이라는 편견이 없어도 자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수 있다. 본질적으로 무종교적 도덕성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적인 나침반도 없이 어떻게 개개인이 도덕적인 삶의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을까? 브리트니의 놀람이 말해 주듯 신이나 신의 심판, 천국이나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무종교인들은 어떻게 윤리적 행위와 품위, 선량함을 구축할 수 있을까?
이 의문들에 대한 답변은 조지 제이콥 홀리요크George Jacob Holyoake의 말로 시작할 수 있다. 1851년에 ‘세속주의secularism’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홀리요크다. 그는 잉글랜드 버밍햄 출신으로 사립학교 교사에 강연자, 작가, 잡지 편집인으로 일했다. 또 무신론자이기도 했는데 기독교에 적대적인 것처럼 들리는 연설로 6개월간이나 옥살이를 했다.
홀리요크의 주장에 따르면, 세속주의는 종교에 반대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보다는 현세 중심적 에토스에 바탕을 둔 개인적이고 긍정적인 성향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자연, 삶과 실존, 지금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삶을 이끌어 주는 믿음과 원칙에 입각한 이상이 바로 세속주의다. 1896년에 출간된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속주의는 현세와 관련된 의무 규범으로서 순전히 인간적인 고려 사항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주로 신학이 모호하거나 불충분하며 신뢰할 수 없거나 믿음이 안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세속주의의 근본 원칙은 세 가지다. (1)물질적인 수단들로 현세의 삶을 향상시킨다. (2)과학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섭리providence다. (3)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음 생에 보답이 주어지든 안 주어지든, 현세의 선은 좋은 것이며 이 선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말은 더없이 멋지다. 그런데 무엇이 ‘선’일까? 종교가 없는 현대인들에게 이 답은 아주 간단하다. 선은 바로 황금률이다. 선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들을 대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세속주의적 도덕의 기반이다. 타인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타인들을 돕거나 지원해 주면 자신도 그런 지원이나 도움을 얻을 것이라는 점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종교 없는 사람들에게 도덕성은 섹스를 자제하거나, 알코올을 피하거나, 권위적인 인물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내세의 결과가 두려워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타인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에 더 가깝다. 무종교적 도덕성은 모두 공감에 의한 호혜라는 황금률의 기본적이고도 간단한 논리에서 직접적으로 자연스럽게 비롯된다.
본질적으로 사리에 맞고 실천하기 쉽다는 면을 생각할 때, 황금률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게다가 황금률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서 기독교의 유명한 도덕적 가르침들보다도 먼저 생겨났다. 말로 표현된 것은 분명히 더 오래 전이겠지만, 황금률을 글로 가장 먼저 남긴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었다. 기원전 6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파피루스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또 고대 중국에서도 공자기원전 551~479년의 가르침 가운데 황금률이 있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네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 “친구에게 요구할 것이 있으면, 먼저 친구를 대할 때 그 요구를 적용해 보라.” 또 고대 그리스에서는 탈레스Thales, 기원전 624~546년경가 이렇게 말했다. “타인들에게서 발견한 허물을 스스로 행하지 않을 때 가장 착하고 바르게 살 수 있다.” 이소크라테스Isocrates, 기원전 436~338년는 “화를 돋우는 타인들의 행위로 고통받아도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행하지 말라.”고 했다. 기원전 1세기에 살았던 고대 이스라엘의 랍비 힐렐Hillel은 “그대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 모든 구절들은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들보다도 먼저 나왔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가르침들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렇게 해 주라.”마태복음 7:12,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해 주라.”누가복음 6:31
불교에서부터 이슬람교, 자이나교, 바하이교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황금률의 다른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황금률을 종교적으로 표현한 가르침들 가운데 어느 것도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공감 능력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공감 능력은 어떻게 발달시킬 수 있을까? 그저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가면 된다.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지혜롭고도 재치 있게 말했다. “직접적인 도덕적 가르침도 큰 도움이 되지만 간접적인 가르침이 훨씬 더 좋다.” 다시 말해, 설교나 강의, 잠잘 때 들려주는 이야기 등은 확실히 타인들을 배려하도록 가르쳐 준다. 하지만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은 실제적인 삶의 경험이다. ‘간접적’이지만 이것이 도덕성을 훨씬 효과적으로 키워 준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공감 능력을 배우고 이해하고 발달시킨다. 물론 도덕성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일상의 상호작용에서 배우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사려 깊고 공정하며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자란 아이는 역시 사려 깊고 공정하며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또 안정적이고 안전하며 힘을 북돋아 주는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타인들을 친절하고 섬세하며 인간적으로 대하는 능력이 발달한다.
어떤 철학적 증거나 이론적인 주장도, 논리적인 금언이나 성서의 이야기도, 신학적인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 『신이 필요 없는 윤리학』Ethics Without God의 저자인 카이 닐센Kai Nielse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도덕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이론적 믿음체계라기보다 (…) 어린 시절의 양육 방식이다. 훌륭한 도덕적 역할모델을 가질 정도로 운이 좋았다면, 다시 말해 친절하고 지혜롭고 이해심이 있는 부모를 만나 기본적 욕구들을 안정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안전한 조건에서 성장했다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특성들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많다.”
많은 무종교인들에게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신에 대한 믿음 없이 어떻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같은 질문들은 거의 무의미하다. 이런 질문들 속에는 특정한 이론이나 논리적 증거, 이데올로기, 믿음, 신성한 존재에 대한 믿음 등을 기초로 순전히 인지적이고 지적인 방식에 따라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 없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도덕성은 경험적이고 본능적이며 자동적인 것에 훨씬 가깝다. 또 그들의 성장 방식과 자라면서 보아 온 것들, 이런저런 사상이나 이론, 믿음, 금언, 교리가 아니라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흡수한 것들과 더 연관되어 있다.
많은 무종교인들과 도덕성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도덕성이 어디서 생겨나고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그 대답들 속에서 나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철학적 견해와 일화들을 들었다. 또 개인적인 견해들도 많이 접하고 이런저런 책이나 영화들도 열정적으로 추천 받았다.
특별히 두드러졌던 두 가지 사례를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다. 하나는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의 밀턴 뉴콤비라는 남자의 대답이고, 다른 하나는 매사추세츠 주에서 온 소냐 와이스라는 여성의 이야기였다. 이들이 무종교적 도덕성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 내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이건 ‘도덕을 아웃소싱하는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이런 표현을 쓴 사람은 46살의 밀턴이었다. 무종교적 도덕성에 대한 밀턴의 생각은 이랬다. 도덕성의 기초를 신에 대한 믿음에 두는 사람이나 도덕성이 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덕을 아웃소싱’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밀턴 같은 무종교인의 생각에 따르면, 도덕성은 본질적으로 상황에 대한 사색과 평가, 대안들에 대한 이해, 일어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수용을 토대로 한 결정과 선택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 옳고 그름, 공정과 부정, 연민과 잔인성에 대해 항상 내면의 도덕적 나침반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지키며,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 소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도덕성인 것이다.
그러나 신을 도덕성의 원천으로 삼으면, 내면의 도덕적 나침반을 참조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냥 신이 방향을 알려 주리라고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길로 인도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숙고라는 힘든 일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높은 권위자에게 고분고분 따르는 것, 자신이 아닌 외부의 다른 곳에서 도덕적인 인도를 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많은 무종교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이것은 중대한 포기다. 윤리적인 의무를 심각하게 외면하는 것이자 도덕적인 결정을 철저히 미루는 태도인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책임 회피와 다르지 않다. 무종교인의 도덕성은 이런 책임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고, 타인을 대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누구도 아닌 본인 스스로가 결단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야말로 많은 무종교인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도덕성이다.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스티븐 로Stephen Law는 말했다. “외부의 어떤 권위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지 않고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