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아 두껍아
1995년 여름에 멀리 낙동강이 아련하게 내다보이는 구 만덕동으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덕포시장통 시끄럽고 번잡한 주택가에서 살다가 산 중턱으로 이사를 오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습니다. 육년 쯤 지난 어느 날 반장이 찾아와서 환경개선지구로 지정받는 일에 동참하라고 했지만 도장을 찍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 년 뒤에 동네 전체가 재개발 지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개인적인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괜찮게 지은 집이었고 사람 살기 좋은 동네였습니다. 담장 낮은 우리 집은 늘 대문이 열려있었고 여름철이면 할머니와 소꿉놀이하는 아이들일 집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놀았지요. 그때만 해도 만덕동은 사람들로 넘쳐나던 동네였습니다. 33번 버스 종점은 출퇴근하는 젊은이들로 붐볐고 노인들은 골목 평상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소일거리를 즐겼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뿐인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상계봉 아래 학교를 하나 더 지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 만덕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 오백 명이 한꺼번에 상학초등학교로 옮겼고 입학하는 코흘리개들이 백 명이 넘었습니다. 만덕동은 지역의 가치와 발전을 결정짓는데 큰 요소인 지하철 역세권에 있으며 고속도로 진입이 수월한 곳입니다. 게다가 공항과 철도역이 십 분 거리에 있으니 변두리라 해도 살기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만덕동은 아파트 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30층 높이의 건물들이 모두 들어서면 남해고속도로에서 부산으로 진입하는 차 안에서 더 이상 상계봉 우람한 자태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5년 전 누군가의 발상으로 시작된 이 재개발 계획은 결국 공기업인 토지주택공사가 의도했던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반항과 눈물 어린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헌 집 주고 새집을 받는다며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기를 든 주민들 간의 갈등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싸움은 애당초 골리앗과 다윗의 양상이었고 주민들의 손에는 작은 돌멩이조차 하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싸움을 포기하고 다시 집 지을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부산에는 118개 지역의 주택가가 재개발과 재건축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으니 땅을 구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보상가 통지문을 받은 이틀 뒤 마을 복판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집회가 열렸던 밤을 잊지 못합니다. LH공사 측 직원과 추진위원장의 설명을 들을 것으로 여기고 처음으로 참석한 자리였는데 그쪽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이상한 집회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백여 명의 주민들 속에서 몇몇 할머니들이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삼십 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는데 전세방을 구하기도 힘든 보상금을 가지고 어디로 가란 말이냐고,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습니다.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새로 지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니 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된 십 년 동안, 개축은 물론 재산권 행사를 못해 고통받는 주민들의 어려움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상금 지급 시기를 두고 밀고 당기는 몇 년 사이에 북구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배 이상 올라서 집은 집대로 없어지고 입주할 돈이 모자라서 오갈 데 없다는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내 관심밖에 있던 일이었습니다.
공개입양과 기부 천사로 알려진 영화배우 차인표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반지하 창고에서 놀다가 창문에 머리가 끼어서 꼼짝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깜깜한 지하실 안에서 목이 막혀 죽을 지경에 놓여있는데 옆에 있던 형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울음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서 구출해 주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 내어 울 수 없는 이들이 많으니 자신은 그저 그들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것뿐이라고요, 그것은 옳고 그름이나 이념을 떠나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요, 놀이터 귀퉁이에 서 있는데 가슴속에서 자꾸만 뭉클뭉클 움직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울어라, 그들 대신 울어주어라.”
나는 그 소리에 떠밀려 사람들의 물살을 헤치고 나가서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저는 만덕1동 821-2번지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그동안 저는 이 동네를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오늘로 그 마음을 접겠습니다. 끝까지 남아서 주민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내가 남아 있는 자체가 이들을 위해 울어주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다음 날부터 환경개선지구지정 자체를 철회하라는 서명 운동과 함께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 집에 살겠다.”
라는 슬로건을 건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보름 만에 70%를 넘는 주민들이 보상가 통지문을 반납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금은 집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메이커와 평수로 가격을 환산하고 얼마나 고급 자재로 인테리어를 잘했는가에 만족합니다. 대형건설 회사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돈이 되는 곳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발의 논리를 들이댑니다. 돌아보면 ‘용산참사’라는 비극은 개발을 통해 이익을 보려는 자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들이 내포되어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불합리한 도시재개발 관련법과 제도들입니다.
집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편하게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프랑스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집에는 혼魂이 있다.”고 하였고 고대 희랍의 철학가 헤라클레이토스는 “거처居處는 인간의 신이다.”라고까지 말했지요.
부산은 지금 주거형태의 다양함이나 도시 전체의 미적 조화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층수를 헤기 어려운 아파트 일색의 건축물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나는 118개의 주택가가 차례차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이 도시를 상상하면 무서워집니다. 단절과 통제가 상상을 뛰어넘는 획일화된 주거 공간,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살기를 희망합니다.
며칠 전 구미에 있는 어느 원룸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주검이 두 달 만에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주택구조가 달라지면서 이웃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사람끼리 주고받는 것보다 텔레비전이나 휴대폰으로 전해 듣는 시대입니다. 그들 부자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하지 못했던 우리는 소통 부재의 건축물에 대해서 한 번쯤 이의를 제기할 정신마저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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