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세상 밖으로
그러니까
음대에 가고 싶단
말이지?
나는 한국전쟁 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이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로 학교 교실이 부족해 초등학교 때는 아침반, 점심반으로 나눠 2부제 수업을 했다. 학교에 따라서는 저녁반까지 3부제 수업을 하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반을 나눠 수업했는데도 교실은 늘 학생들로 미어터졌다. 한 반에 70, 80명씩 구겨 넣은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 급식 시간에는 미국이 구호물자로 보낸 옥수숫가루로 만든 죽을 먹었다. 점심시간마다 당번이 양동이 하나 가득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죽을 가져왔는데, 맛은 그냥 밍밍했다. 나중에는 옥수수죽이 옥수수빵으로 바뀌었다. 교문 앞에 급식으로 받은 옥수수빵을 쫀드기 같은 불량식품으로 바꾸어 주는 아줌마가 있었다. 가끔 옥수수빵을 ‘불량한 맛’과 맞바꾸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불초 소생인 주제에 초등학교 때는 스스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국가주의의 소산인 국민교육헌장을 열심히 외우며, 그 정신을 뼛속들이 새긴 결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민족중흥은 무슨 개뿔. 우리는 그저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가문중흥家門中興’의 개별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우리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출세해서 쓰러진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을 간절히 소망했다. 그래서 너도나도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 교육만큼은 열과 성을 다해서 시켰다.
내가 어렸을 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 나는 서울 변두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변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일류 중학교에 보내려는 부모들의 교육열이 엄청났다. 여기저기 과외가 성행했고, 학교에서는 매일 시험을 보았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그날 나온 성적에 따라 자리를 배치했다. 말하자면 성적순으로 앞에서부터 뒤까지 쭉 줄을 세운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비교육적인 처사였지만 그때는 선생이나 부모나 학생이나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린 학생들이 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며 공부하는 불상사가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한 우려가 있었는지 한창 입시 공부를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가 발표되었다. 그날이 7월 15일이었기에 우리는 ‘7·15 해방’이라고 불렀다. 그 후 우리는 은행알 추첨으로 중학교를 배정받았다. 학생들이 직접 물레방아처럼 생긴 추첨기를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 번 돌리면 은행알이 나오는데, 거기에 배정받을 학교의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뺑뺑이를 돌려 중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우리 세대를 ‘뺑뺑이 세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중학 입시 폐지는 치열한 경쟁을 3년간 유예한 것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입시는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보다 더 심하게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중 극소수만 일류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머지는 이류 학교, 삼류 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렇게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학교의 등급이 나뉘면서 각자의 인생에도 등급이 매겨졌다.
원래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닌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정말 공부를 안 했다. 천차만별의 아이들을 모아 놓은 중학교와는 달리 고등학교에는 성적이 비슷비슷한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니 공부를 해도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처음 본 중간고사에서 전교 등수 세 자릿수를 기록한 나는 완전히 공부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 뒤로는 소설책만 읽고 살았다.
“그러니까 음대에 가고 싶단 말이지?”
어느 날 아버지가 이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어. 그랬더니 모두 다 꿈 깨라는 거야. 레슨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감당하기 힘들다고. 나보고 빌딩 몇 채 사놓았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더라.”
아버지의 이 말 한마디에 나는 음대 진학의 꿈을 포기했다.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쳤고, 방송국 어린이 노래 경연 대회에서 입상을 했으며, 고등학교 때는 합창반으로 활동하는 등 나름 음악에 소질과 열정이 있었지만 음대를 들어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경제력이라는 장애물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음대를 제외하고는 마땅히 가고 싶은 과가 없었다. 어느 과를 갈 것인가 정하지도 못한 채 예비고사를 보았다. 당시에는 예비고사에도 계열이 있었는데, 나는 예체능 계열이 아닌 일반 계열을 보았다. 그렇게 예비고사를 치르고 대학 입학시험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나는 아버지에게 딱 두 달만 레슨을 시켜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당시 이대 음대 교수로 있던 호주 출신의 선교사 도로시 왓슨 선생을 소개받았다. 왓슨 선생은 아주 저렴한 레슨비만 받고 나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가 하면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이대 성악과 졸업생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내 딱한 사정을 듣고 무료로 레슨을 해주었다. 그렇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이대 교수와 졸업생에게 거의 매일같이 레슨을 받았다. 학원으로 치면 심화 집중 교습을 받은 셈이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입시를 준비한 끝에 음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들어가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첫째, 예로부터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로 유명한 ‘학림다방’에 꼭 가본다. 둘째, 미팅을 열심히 한다. 셋째, 멋진 남자를 만나 멋진 연애를 한다. 넷째, 학교 축제 때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쌍쌍 파티에 간다. 다섯 째, 이대 입구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는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학구열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 위시리스트를 하나하나 실천에 옮겼다. 먼저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앞에 있는 학림다방에 갔다. 그러나 다방에 들어간 순간 실망을 금치 못했다. 여고 시절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림다방이 클래식 다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주 깔끔하고 모던한 곳인 줄 알았다. 벽 하나 가득 유명 음악가들의 연주 모습을 담은 멋진 사진이 걸려 있고, 음악이 흐를 때면 베토벤 비슷하게 생긴 장발의 DJ가 나와 칠판에 지금 나오는 클래식 음악의 제목과 작품 번호, 연주자의 이름을 일필휘지로 쓴 다음 바람같이 유리 칸막이 뒤로 사라지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본 학림다방은 이런 나의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베토벤을 닮은 DJ도 없었고, 속세와 음악의 성역을 가르는 유리 칸막이도 없었다. 실내는 어두침침하고 초라했으며 다소 허무주의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다방 자체가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같았다.
나의 두 번째 위시리스트는 미팅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는 것이었다. 미팅에서 남녀가 만나면 먼저 상대방에 대한 호구조사에 들어간다. “어디 사세요?” “형제는 몇 명이에요?”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이렇게 기본적인 호구조사가 끝나면, 이번에는 상대방의 문화적 소양을 가늠하는 질문으로 넘어간다. 이때 “무슨 책을 감명 깊게 읽으셨어요?”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 대충 이런 질문들이 오간다.
당시에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로맹 롤랑, T.S. 엘리엇 같은 문호들의 책을 읽고 슈베르트, 베토벤, 브람스의 음악 정도는 들을 줄 알아야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통했다. 미팅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좋아해요.”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에 나오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경우를 보면서 영혼의 분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어요.” 뭐 이런 얘기를 해야 수준 있는 사람으로 통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런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미팅에 나오는 친구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근처에 있는 모 대학 남학생과 미팅을 했다. 이 친구가 나름 유머랍시고 ‘방귀’에 얽힌 얘기를 하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말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에는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복학생을 만났다. 마침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나중에 ‘노털스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바람에 끝장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단 두 번의 미팅으로 나는 미팅에 대한 환상을 접었다. 그 후로 다시는 미팅을 하지 않았다.
미팅에 실패했지만 그래도 멋진 남자를 만나 멋진 연애를 한다는 로망은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남학생들과 함께하는 대학 연합 서클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기독교에 관해 공부하고, 방학 때는 지방으로 전도를 가는 기독교 서클이었다. 내가 하고많은 모임 중에서 기독교 모임을 선택한 것은 특별히 신앙심이 깊어서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문화에 푹 젖어 살던 사람으로서의 관성이라고나 할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회원의 대부분은 소위 일류대학 학생들이었다. 같은 연령대에서 대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지금보다 현저히 낮던 당시에 대학에 다닌다는 것, 그것도 일류대학에 다닌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사실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A대와 B대는 하늘과 땅 차이야”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는 친구도 있었고, 그보다 좀 덜 직설적으로 이런 생각을 드러내는 친구도 있었다.
물론 나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했다. 나는 C대와 D대를 무시했으며, 내가 그 대학에 다니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그토록 특별한 카테고리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모임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리는 너무 잘났어”였다. 사실 그들이 잘나기는 했다. 그때 같이 놀던 아이(?)들 중에 나중에 장관이나 차관, 국회의원, 무슨 위원회 위원장, 판사, 대법관, 교수, 의사, 변호사 등이 되어 TV에 얼굴을 드러낸 경우를 많이 보았으니까.
다행히 모임에서 내 이상형에 딱 맞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멋진 연애에 대한 내 로망은 늘 실패로 끝나곤 했다. 일단 남자들이 나를 여자로 봐 주지를 않았다. 당시 나는 나와 비슷한 성향의 친구와 늘 붙어 다녔는데, 선배들이 우리 두 사람에게 붙여 준 별명이 ‘선천성 구제불능성 과대발랄 듀엣’이었다. 이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는 남자들에게 철없는 어린애였지 성숙한 여인이 아니었다.
연애와 관련된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 만난 선배들도 나를 여자로 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들은 나의 고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 꺼이꺼이 울고 있어도 “야. 니가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울지 마. 너한테 심각한 거 안 어울려.” 이러면서 머리를 쥐어박거나 “그게 다 애들이 크는 소리야” 하고 웃어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내 황금 같은 젊은 날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당시 나는 세 명의 남자를 좋아했다. 물론 차례차례로. 하지만 모두 짝사랑에 그쳤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내가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은 지극히 고전적인 방법 즉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연마한 문장력을 십분 발휘해 내가 생각해도 멋진 연애편지를 쓰곤 했다. 내가 읽어 봐도 참 잘 쓴 편지였다. 이 정도면 감동하지 않고 못 배기리라 생각하며 하루에 한 통씩, 어떤 때는 두 통씩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물량 공세를 해도 상대편은 묵묵부답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제풀에 지쳐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고 짝사랑을 끝내곤 했다. 상대방은 가만히 있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한 셈이다.
5월에는 축제가 열렸다. 이대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메이퀸 대관식’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이대 메이퀸은 재색을 겸비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스코리아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세상 모든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대관식이 열리는 날이면 운동장에 《선데이 서울》을 비롯한 주간지, 일간지, 월간지 기자들이 대거 몰려와 메이퀸의 얼굴을 찍으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카메라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 정상적인 대관식 진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자 학교에서 묘책을 하나 냈다. 이대에 들어간 학생들은 1학년 교양체육 시간에 ‘이화 체조’라는 것을 배우는데, 묘책이란 메이퀸 대관식이 열리기 바로 직전에 1학년생들로 하여금 이 ‘이화 체조’를 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체조를 마치면 2천 명에 이르는 1학년생들이 운동장 가장자리로 우르르 달려가 빙 둘러 인人의 장막을 친다. 기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안으로 쳐들어가는 기자들이 있었다. 사회자가 계속 “기자 여러분. 나중에 사진 찍을 시간 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나가 주세요”라고 부탁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메이퀸은 학생들의 투표로 뽑힌 과 퀸 중에서 선발한다. 언젠가 우리 과 퀸으로 뽑힌 선배로부터 메이퀸 선발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일단 과 퀸이 되려면 학점 3.0 이상에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이런 기본 조건을 갖춘 학생 중에서 과 퀸을 뽑는다. 그리고 이렇게 뽑힌 과 퀸들이 나중에 대강당에 모여 간택의 절차를 밟게 된다. 대강당 무대에 서서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데, 이때 반팔 흰색 티셔츠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스커트를 입어야 하며 앞머리를 위로 올려 이마를 훤히 드러내 보여야 한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한 후에 종이 한 번 울리면 우향우, 또 한 번 울리면 좌향좌, 또 한 번 울리면 뒤로돌아. 이런 식으로 전방위적인 신체검사가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메이퀸이 선정되면 나머지 과 퀸들은 시녀가 된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처럼 웃기는 일도 없다. 여왕에 시녀라니. 같은 학생들을 신체적 조건의 우열에 따라 신분을 나누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반인권적인가. 당시에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어떤 과에서는 아예 과 퀸 선발 자체를 보이콧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들이 계속 누적되어 오다가 내가 대학 3학년인가 4학년 때 결국 이대의 메이퀸 선발 제도는 폐지되었다.
밤에는 학생회관에서 쌍쌍 파티가 열렸다. 나도 친구가 하루 만에 조달해 준 연대생과 쌍쌍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에서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척 유치한 게임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던 것 같다. 여하튼 지금 기억에 남는 건 게임과 노래는 양념일 뿐 파티의 주메뉴는 블루스였다는 것. 그때 춘 블루스를 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블루스를 빙자한 남녀 간의 과도한 신체 접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음대에 다닐 때, 나는 음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같이 어울려 다닐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집에서는 나에게 딱 등록금만 지원해 주었으며 용돈이라는 것은 따로 없었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엄마에게 찔끔찔끔 타 쓰는 식이었는데, 돈을 받지 못한 날에는 그냥 달랑 차비만 가지고 학교에 갔다. 점심은 거의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그러니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같이 어울리려면 함께 레스토랑에 가서 밥도 먹고 다방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한번은 같은 과 친구가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한다고 친구들을 초대한 적이 있다. 과대표가 선물을 산다고 5백 원씩 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돈이 없어서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대 입구에 있는 양장점에서 옷 한 번 맞추어 입는 것이 소원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가려면 길 양쪽으로 쭉 늘어선 양장점 앞을 지나야 한다. 학교를 오갈 때마다 옷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학가라지만 책방은 정문 앞에 있는 ‘이화서점’ 달랑 하나. 나머지는 모두 양장점이었다. 당시는 이대 입구가 패션의 1번지였다. 패션 1번지답게 쇼윈도에 걸려 있는 옷들이 하나같이 세련되고 예뻤다. 유명 연예인들이 모두 이대 입구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었다. 한번은 등굣길에 고급 세단에서 내리는 젊은 시절의 김자옥을 본 적도 있다.
음대 친구들은 이렇게 비싼 이대 입구 양장점 옷을 잘도 맞추어 입었다. 그것도 한 벌이 아니라 몇 벌씩. 나는 그런 친구들이 부러웠다. 엄마 앞에서 나는 이대 입구 양장점에서 옷 한 벌 맞추어 입는 것이 소원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이런 내가 안돼 보였는지 어느 날 엄마가 정말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 옷을 맞추어 주었다. 지금도 양장점에 맞춘 옷을 찾으러 갔던 날이 생각난다. 옷을 찾아서 양장점을 나오는데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도대체 이까짓 옷이 뭐라고, 가난한 엄마를 졸라 기어이 돈을 받아 냈을까. 나는 내 주제넘은 욕망이 한심하고 서러웠다. 그래서 연습실로 들어와 펑펑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옆방에서 연습하던 피아노과 아이들이 들어와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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