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은 용의 홈타운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히 썬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을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은 한때 어떤 시간의 꿈이었을 거야. 지금 나는 그 흐르는 꿈에 실려가면서 엎드려 뭔가를 쓰고 있어. 곤죽이 돼가고 있어. 시간의 원천, 그 시간의 처음이 샘솟으며 꾸었던 꿈이 흐르고 있어.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달덩이가 자기 꿈을 달빛으로 살살 풀어놓는 것처럼. 시간의 꿈은 온 세상이 공평해지는 거였어. 장대하고 아름답고 폭력적인 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아픈 것들을 녹여 재우며 시간은 흐르자고 꿈꾸었어. 이 권력을 저지할 수 있는 자, 나와봐. 이 세계는 공평해야 된다는 꿈. 아무도 못 말려. 그런 꿈을 꾸었던 그때의 시간도 자신의 꿈을 돌이킬 수가 없어. 시간과 시간의 꿈은 마주 볼 수도 없어.
* 셰익스피어 「쏘네트 65」에서.
해삼내장젓갈
해삼은 이 집 주방이 두렵다. 칼이 무섭고 도마도 무섭다. 건드리면 지레 겁먹고 얼른 뭔가를 내놓는다. 한줄뿐인 내장에 이상한 향을 품었다가 위험이 닥쳐오면 재빨리 내장을 쏟아놓는다. 창자만 가져가시고 몸은 살려달라는 최후의 협상 카드를 내미는 것인데, 인간 세상 협상 대신 내장 빼앗고 해삼 반으로 잘라 양식장에 던져놓는다.
나도 당신이 두렵다. 두려움과 그리움 구별할 수가 없다. 어젯밤 당신 내게 왜 그런 소포를 부쳐왔는가. 우편물이 왔다고 해서 문을 열었는데 거기 묶인 꾸러미 위에 희미하게 당신 이름 적혀 있었다. 당신이 내게 뭘 보낼 리 없는데, 어떻게 내 주소는 알게 됐을까 풀어오려는 순간, 이름 희미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건 대개 꿈 아니면 백일몽이다. 두려움과 그리움은 눈 비비며 같은 구덩이에 산다. 그것들 소포 꾸러미처럼 가끔 날 찾아왔다가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당신들 내게 그렇게 호의적일 리 없지, 내가 내 속을 긁어내 환상의 꾸러미를 만들건 말건, 내장 긁어내 보였다 다시 삼키건 말건. 어쨌거나 해삼, 어느 여름날 새끼줄에 묶어 데려갔다가 흔적 없이 녹아내린 적 있었다. 분하고 원통한 것은 해삼인지 나인지.
그나저나 나는 시 같은 걸 쓴다. 별로다. 나는 시 같은 걸 쓰지 않는다. 그것도 별로다. 한밤중이다. 그건 괜찮다. 바위틈으로 기어들어 부풀리고 굳어져서 아무도 꺼내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러나 다시 내장 빼앗기고 반으로 잘려 던져지는 해삼의 밤이다.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고 찍는 밤이다. 간이고 창자고 쏟아놓고 기다려주마. 이 내장 삭아 젓갈 되면 그 아득한 맛에 헤어나지 못할까. 헤이, 미식가 여러분, 세상이 한판에 녹아내릴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