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
우리 사회는 수사학을 대체로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얄팍하고 기만적인 언어와 동의어, 그러니까 ‘실제 내용’의 반대말이라고들 생각한다. 이 점에서는 아직까지도 플라톤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수사학이 논리적 대화의 적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물론 나치처럼 수사학을 이기적으로 악용하고 비이성과 증오를 부추기는 자들이 많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클렘페러는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전체주의적 증오 발언이라는 극단적 사례에서도 수사학을 단순히 표면적 현상으로 치부하여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 언어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지문指紋이며, 해석하는 법만 알아낸다면 발언자의 정체를 ─ 그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 식별하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수사학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보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연설회장이 아무리 소란하고 연사가 아무리 목에 핏대를 세우더라도 소음 주위의 의미 있는 침묵, 즉 생략과 ‘말하지 않는 것’에 귀를 쫑긋 세어야 한다. T. S. 엘리엇의 희극 「칵테일 파티」에서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 말한다.
그저 당신을 관찰하기만 하고서도,
또는 마음껏 얘기하시게 내버려두고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고,
말씀하시지 않는 것까지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창배 옮김, 『T. S. 엘리엇 전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01, 336쪽〕
약간의 편견과 선입견을 떨치기만 하면 된다. 나는 대학에서 현대 정치 수사학을 가르친다. 첫해에 학생들에게 논쟁 연설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학생이 대답했다. “예, 있어요. 하지만 일반적 논변만 사용했어요. 수사학은 전혀 안 썼어요.” 이 단어를 내뱉을 때 학생의 목소리에 묻어난 경멸감에서 오늘날 사회가 수사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영국이어서 그런 탓도 있다. 수사학과 의사소통 관련 학위 과정이 흔한 미국에는 이 주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저 학생은 수사학을 쓰지 않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수사학을 (가장 기본적인 용어를 써서 설득의 기술로 정의한다면 ‘일반적 논증’에 수사학을 동원하지 않고서 상대방을 설득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수사학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변호사가 사건을 완벽하고 논리적으로 파악하고는 있지만 배심원에게서 무죄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누가 변호를 의뢰하겠는가?
게다가 우리는 수사학을 으레 공적 현상으로 생각하지만 ─ 실제로도 이 책은 수사학의 공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 수사학은 한편으로 사적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시각적으로, 언어적으로, 심지어 (SNS를 통해) 가상적으로 자신의 인격을 외부로 투사한다. 정치인이 유권자의 말투를 흉내 내듯 우리도 실제 집단이든 가상의 집단이든 동료 집단의 말투를 무의식중에 흉내 낸다. 수사학은 정치적 논쟁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집안에서 논쟁할 때에도 우리는 과거를 언급하고 (“지난주에는 내가 집안일 했으니까 이번 주는 당신 차례야!”) 추상적 정의에 호소하고(“그건 정당하지 않아!”)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성격을 부여한다(“또 게으름 피우고 있네. 만날 이래!”). 어떻게 말하고 쓸 것인가에 대한 감感은 주위 사례에서 얻는다. 책이나 신문을 읽으면서, 텔레비전에서 정치인 연설이나 강연을 보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친구나 가족이나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우는 것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선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흐릿하다. 대화와 연설은 역학관계가 사뭇 다르지만, 방송 인터뷰는 사적 대화의 관습을 나름의 방식으로 차용한다. 정치인은 (사적인 속성으로 여겨지는) 개인의 성품을 공공의 영역에서 활용하여 정치적 행위를 유도하기도 한다. 이렇듯 개인적 수사학은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바탕이며, 이 정체성은 정치적 언어와 공적 언어의 토대가 된다.
알든 모르든 누구나 어느 정도는 수사학을 접하며 산다. 연설을 하지도 듣지도 않는 사람이라도 수사학과 무관할 수는 없다. 이 책의 목적은 수사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이미 딴 사람들이 훌륭하게 옹호했으니까). 수사학이 현재 쓰이고 있는 행태를 모조리 옹호하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비열하거나 한심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자신의 무지를 감추려고 수사학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득시글거린다는 사실에 눈감아봐야 이로울 것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다만, 이 책은 수사학의 긍정적 측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바탕은 수사학이 시민사회의 주춧돌이자 민주적 절차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민주적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설득력 있는 공적 발언을 주고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신뢰와 사회적 결속을 다질 수 있다. 따라서 끊임없이 우리를 폭격하는 메시지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다면 수사학이 선인의 손에서든 악인의 손에서든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함으로써 모든 시민이 이익을 얻을 것이다. 이 책은 타인의 수사학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키우고, 원한다면 자신의 수사학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서구 수사학 전통 위주로 독자에게 소개한다.
‘수사학’이라는 용어는 글과 말(웅변술)을 아우른다. 이 책에서는 웅변술을 주로 다루겠지만 글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어쨌거나 연설은 쓰인 글을 읽는 경우가 많고, 연설을 실제로 듣기보다는 문자로 접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말은 말이 행해지는 주위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청중과 독자에게 전달되는 기술적 수단과 별개로 오로지 언어와 텍스트로만 수사학을 이해할 수는 없다. 텍스트 분석과 더불어, 수사적 메시지가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 어떻게 수용되는지에 대해 ‘정치학의 상징적 의식儀式 차원’(정치학자 앨런 핀레이슨Alan Finlayson과 제임스 마틴James Martin의 표현)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책에 깔려 있는 전제는, 발화의 ‘의미’를 알아내려면 텍스트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전달되고 중개되고 수용되는 상황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극적 구성, 신체성, 기술을 배제하고 언어와 사상에만 주목해서는 수사학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역사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이 책의 주제는 수사학의 역사가 아니다. 이 책은 학제간 연구의 관점에서 수사학, 언어학, 정치학, 문학 이론의 개념을 두루 차용한다. 물론 역사적 사실도 담겨 있다. 수사학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언어를 사회적 ․ 정치적 ․ 문화적 맥락 안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불변의 수사학 법칙 같은 것이 있다는 주장에 다소 회의적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같은 삼절문三節文 기법은 천년 넘도록 매우 효과적인 조합으로 부동의 명성을 누렸지만, 이것이 두뇌의 타고난 속성을 반영하는 것인지 그저 오래된 문화적 습관인지는 분명치 않다. 수사학 법칙을 맹신하다가는 수사학의 성패를 좌우하는 다른 요인들을 간과할 우려가 있다.
특히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정치 체제의 차이다. 영국 하원에서 연설하는 것은 미국 상원이나 유럽 의회나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연설하는 것과 다르다. 설령 체제가 비슷하더라도 연설 문화가 사뭇 다른 경우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처럼 다수제 민주주의(웨스트민스터 모델)를 채택했지만 영국 의원 저리 가랄 만큼 신랄한 정치적 모욕의 전통이 있다. 시간에 따른 변화에도 유의해야 한다. 영국 총리 W. E. 글래드스턴의 장황한 웅변조 연설은 19세기 말엽에만 해도 호평받고 열성팬도 거느렸지만 한 세기 뒤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
무엇보다 수사학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생각을 생성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논쟁을 벌이다보면 연설가rhetor(이따금 ‘speaker'와 'writer' 대신 이 단어를 쓸 것이다)는 자신의 입장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때가 있다. 친숙한 생각도 새로운 맥락에서 발화하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어느 한 입장을 취하여 찬성측과 반대측의 수사를 두루 다루다보면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말하고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따라서 수사학은 기존의 견해를 알기 쉽게 풀어낸 일련의 진술도 아니요, 그 진술의 뒤에 숨은 ‘참뜻’을 포장하거나 은폐하는 표면적 현상도 아니다. 수사학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에 대한 통제권이 생각보다 작은지도 모른다. 클렘페러가 처했던 것보다 더 자유로운 상황에서도, 지배적인 수사학 문화는 우리의 공적 발언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심지어 사적 생각에도 침투한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때 실은 지배적 수사학 문화가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제1장에서는 고전기부터 19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수사학의 역사를 살펴본다. 제2장에서는 윈스턴 처칠이 ‘수사학의 발판’이라 부른 핵심적 수사학을 설명한다. 이 방법들은 고대에도 잘 알려져 있었으며 현대에도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다. 제3장에서는 ‘수사학과 수사술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기본적 문제를 논의한다. 제4장에서는 앞의 이론적 설명을 바탕으로 현대의 수사학 현상을 들여다본다. 수업에 활용하거나 독자 개개인이 ‘사고 실험’의 토대로 삼을 수 있는 짤막한 수사학 연습도 실려 있다.
제3제국의 언어
“히틀러는 뉘른베르크에서 소년들에게 연설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다. ‘함께 노래하라.’ 모든 조치의 목표는 집단주의 속에서 개인의 귀를 멀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디오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여느 기술과 달리 새로운 것은 내용과 철학이 아니라 양식이다. 인쇄물은 탄압받고 있다. 웅변, 구두 표현은 원시적이나 고차원적이다.”
빅토르 클렘페러가 1934년 9월 14일 일기에서
나치의 수사학에 대해 남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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