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이야기 속에 뜻을 숨기다
공맹의 길, 장자의 길
《장자》 이전의 고전 중에서 《논어》는 약 1만 5000여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맹자》는 3만 5000여 자이고, 《장자》는 6만 5000여 자입니다. 먼저 기존의 유가 문헌들과 《장자》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따져봄으로써 《장자》라는 책에 담긴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장자》는 《논어》나 《맹자》와는 기술 형식이나 문체에서부터 성격이 전혀 다른 책입니다. 그런데 맹자와 장자는 동시대인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따르면 제나라 선왕이나 양나라 혜왕과 동시대 인물로 장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두 왕은 모두 맹자를 만났던 왕들이지만 그다지 뛰어난 군주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뛰어난 군주라고 하면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등을 들 수 있지요. 그런데 제나라 선왕이나 양나라 혜왕은 맹자를 만났다는 사실로 인해 환공이나 문공보다 후세에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맹자를 대우하고, 알아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선왕과 혜왕은 동시대의 뛰어난 군주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의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습니다.
맹자와 장자는 동시대 인물이었지만 맹자는 장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고 장자 또한 맹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상당히 논쟁적인 철학자였는데, 특히 정치적으로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내놓는 사람을 보면 상대가 누구든 절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반면 공자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점잖아요. 위나라의 군주가 공자에게 ‘문진問陣’, 곧 전쟁할 때 진陣 치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자 ‘다음 날 바로 떠났다明日遂行’고 《논어》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공자는 영공의 질문에 ‘제사를 지내는 일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있으나, 전쟁하는 일에 대해서는 배운 게 없다’고 말한 뒤 다음 날 떠났다고 합니다. 이것이 상대방과 뜻이 맞지 않을 때 조용히 떠나는 공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맹자의 경우는 공자와 달라서 상대와 뜻이 맞지 않을 경우 상대방을 바꾸려고 합니다.
물론 공자도 상대를 바꾸려고 노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와 만났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사실 공자는 계강자의 아버지였던 계환자와 뜻이 맞지 않아 노나라를 떠났습니다만 훗날 계환자는 자신의 후계자인 계강자에게 공자를 불러 정치를 맡기라고 유언합니다. 그래서 계강자는 공자를 초빙하여 “백성들이 도둑질을 많이 해서 걱정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당신이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실권자에게 잘 보이려면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공자는 나라를 통치하는 자가 도둑질을 하지 않아야 백성들도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도 통치자를 바로잡으려 했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웃 위나라 임금 첩輒이 공자의 제자 ‘자로’를 통해 공자에게 정치를 자문한 적이 있는데요. 이때 자로가 공자에게 위나라에 가시면 무엇부터 하시겠느냐고 묻자 공자는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잡을 것이다必也正名乎”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명분이란 이른바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를 말하는 것인데 각각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위나라 임금 첩은 이 네 가지 모두에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괴외蒯聵가 위나라로 돌아오려고 하자 거부한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공자의 대답에 자로는 답답함을 금하지 못합니다. 최고 통치자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니 당연히 위나라 임금의 초빙을 받지 못합니다.
이처럼 공자도 통치자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대개는 상대와 뜻이 맞지 않으면 아예 만나러 가지 않거나, 조용히 떠났습니다. 하지만 맹자는 공자와 달랐습니다. 맹자는 군주의 곁에 머물면서 군주가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해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합니다. 아마도 맹자는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기어이 다 하고 마니까요.
후세에 불우한 지식인으로 공자와 함께 맹자를 꼽지만 그것이 꼭 맞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기야 공맹이 모두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지 못했으니까 불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맹자의 경우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등용해줄 가능성이 있었던 제나라를 떠날 때에도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나를 놔두고 그 누구를 등용할 것인가’라는 말을 남기며 당당히 떠나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맹자가 동시대의 사상가인 장자에 대해 논평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의 미스터리입니다. 장자 또한 《장자》의 마지막 편인 〈천하天下〉 편에서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 즉 천하의 도술을 모두 비판하고 있는데, 맹자는 직접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게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활동했던 곳은 천하였고, 장자가 활동했던 무대는 강호였기 때문이지요. 같은 곳이 아니냐고요? 그렇지요. 천하와 강호는 같은 시공간이긴 하지요. 하지만 장자는 그걸 ‘방내方內의 세계’와 ‘방외方外의 세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때 방方은 ‘법法’입니다. 곧 방내의 세계인 천하는 질서가 있는 곳이고, 방외의 세계인 강호는 자유로운 곳입니다. 방내와 방외는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게 장자의 생각인 것이지요. 물론 가끔 공자처럼 방내와 방외를 넘나드는 초절정의 고수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런 예외는 거의 없습니다.
〈천하〉 편에는 ‘추노지사鄒魯之士’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추’는 맹자의 고향이고, ‘노’는 공자의 고국입니다. 따라서 추노지사는 공맹의 학문을 익힌 유가학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장자는 여기서 유가학자들을 평가하면서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아마도 유가의 이념을 이처럼 제대로 표현한 네 글자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내성외왕’이란 안으로는 성인의 덕을 갖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유가의 이상입니다. 유가의 성인으로 떠받들어지는 이른바 ‘요 · 순 · 우 · 탕 · 문 · 무 · 주공’은 모두 고대의 제왕들로 ‘내성외왕’을 실천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공의 시대에 끝이 납니다. 내성외왕의 마지막 인물이라 할 주공은 비록 왕은 아니었지만 조카인 성왕의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외왕’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물이 주나라의 예악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공자나 맹자는 무력武力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왕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맹자는 ‘이덕행인以德行仁’이라는 말로 왕王을 설명하고 있는데, 왕은 무력이 아닌 문덕文德으로 타인에 대한 사랑 곧 ‘인仁’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은 정치적 개념입니다. ‘친親’은 육친을 사랑하는 것이고 ‘인仁’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왕은 ‘인’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맹자에 따르면 이러한 왕과 대비되는 것은 ‘패覇’인데, 이는 ‘이력가인以力假仁’으로 설명합니다. 무력을 동원하여 ‘인’을 가장하는 것이지요.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늘 하는 말이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하죠. 가짜인 거죠. 가짜 평화죠. 맹자식으로 표현하면 이런 게 바로 ‘가인假仁’ 곧 가짜 인입니다.
장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사실 《장자》 텍스트는 장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후대에 기록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장자의 저술인지 꼭 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 간에 합의를 본 장자 자신의 저술은 〈내편〉, 곧 〈소요유〉 편부터 〈응제왕〉 편에 이르는 일곱 편입니다. 사실 합의라는 것은 일종의 정치죠. 당연히 무슨 절대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제시될 경우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까지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 《장자》 〈내편〉을 장자의 저술로 보자는 합의가 어느 정도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편〉과 〈잡편〉은 장자의 후학들 또는 후세에 장자의 사상을 따르는 이들, 심지어 유학자들까지도, 장자의 견해에 맞닿아 있는 사람들이 저술한 글이 포함되어 있다는 견해가 학자들 간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내편〉을 읽는 것이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외편〉과 〈잡편〉이 재미는 더 있습니다. ‘외 · 잡편’에 실린 내용은 비록 후대에 저술된 것이라 하더라도 장자의 사상과 맞는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장자에 대한 집중된 관심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으므로 여러분이 ‘외 · 잡편’을 접할 때는 장자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접해본다는 생각으로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논어》나 《맹자》와는 달리 《장자》의 경우 어떤 글이 장자의 글이냐는 게 논란이 되는 데는 장자의 신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점도 한몫했습니다. 한마디로 당대에 널리 알려진 유명 인물이 아니었다는 거죠.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공자나 맹자가 불우했다고는 하지만 장자와는 다릅니다. 공자의 경우 노나라에서 쫓겨난 후에도 제나라에 가면 제나라 임금이 공자를 초빙합니다. 그때 제나라 경공이 묻죠.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그럼 공자는 “정치란 국가의 재물을 절약해서 백성을 도와주는 데 있다政在節財”고 점잖게 대답해줍니다. 위나라에 가면 위나라 임금을 만나고 초나라에 가면 초나라 임금이 공자를 부릅니다. 이처럼 공 비록 초라한 행색으로 천하를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권력의 정점에 있는 통치자들 대부분이 공자에게 통치에 관해 묻고 예우를 다했습니다. 이처럼 최고 권력자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누군들 무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맹자의 경우도 맹자를 잘 대우해줘야 학자들에 의해 후대에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있으므로 통치자들이 극진히 예우했습니다. 맹자처럼 말 잘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잘 대우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런 사례로 양나라 혜양의 뒤를 이은 양왕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양왕은 현자를 좋아했던 아버지와 달리 무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맹자를 박대합니다. 그러자 맹자는 양왕을 두고 “멀리서 보면 도무지 임금 같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봐도 위엄이 하나도 없더라”며 혹평을 하고는 “그런데 이런 자가 졸지에 ‘천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고 묻더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맹자》에 나오는데요, 시원찮은 자가 자기 주제도 모르고 감히 천하를 논한다며 비하한 것이죠. 이처럼 형편없는 평가가 수천 년 동안 전해질 줄, 당시 양왕은 아마 몰랐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맹자를 예우했던 제나라 선왕이나 양나라 혜왕은 그래도 《맹자》에 현자를 알아보고 예우한 임금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으니 투자한 비용에 비해 남는 장사를 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공자나 맹자는 ‘정언正言’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었거든요. 공맹의 사상을 공부할 때는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머리에 쥐날 염려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나라 선왕이 이렇게 따진 적이 있습니다. 하나라의 걸왕을 쫓아내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과, 자기의 임금이었던 주紂왕을 치고 새로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의 행위가 정당하냐고요. 한마디로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게 옳으냐고 물은 겁니다. 그러자 맹자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저 제 한 놈 주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임금 죽였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聞誅一夫紂矣 未聞弒君也”고 대답합니다. 그게 어디 임금이냐는 것이지요. 선왕이 움찔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큰 도둑이 작은 도둑을 나무라면 작은 도둑이 큰 도둑의 말을 듣겠냐며 부당한 방법으로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은 계강자를 비판했으니까요. 계강자가 난감했을 겁니다. 이처럼 빙빙 돌려 말하는 법 없이 곧이곧대로 말하는 것이 바로 공맹이 선택한 ‘정언’이었습니다. 이들은 상대가 누구든 조언을 구하면 그저 올바른 말로 응대함으로써 스스로의 도리를 다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처지였을까요? 장자는 공자나 맹자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신상에 관한 정보가 문헌에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는 장자가 송나라 몽蒙 지방 사람으로 칠원漆園이라는 동산을 관리하는 동산지기였다는 간략한 소개만 나와 있습니다. 또 초나라 위왕이 예물을 갖춰 장자를 재상으로 모셔가려 했으나 장자가 이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장자》에도 두어 차례 나오지만 이런 이야기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당시 장자는 절대 한 나라의 재상으로 초빙해갈 만한 인물이 못되거든요. 왜냐하면 ‘무위無爲, 무용無用’의 철학을 주장한 사람이 장자였는데, 어느 군주가 이런 사상가를 재상으로 모셔가겠습니까? 더욱이 전국시대 같은 상황에서는 딱 나라 망하기 십상입니다. 장자가 임금의 초빙을 받거나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는 〈외편〉과 〈잡편〉에 나오는데 신빙성이 거의 없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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