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가슴과 머리, 동양과 서양
“희정?”
헤이즐은 테이블 맨 끝에 앉은 대학원생의 이름을 불렀다.
“뭐 하고 싶은 말 없어요?”
한국에서 온 희정은 현재 스탠포드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지도교수인 헤이즐은 이번 세미나에 학생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희정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없습니다.”
이번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헤이즐은 말했다.
“가만히 앉아서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 아시안 학생들은 혼자서 사고할 능력이 없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해요?”
이 말은 한 유명한 기사에서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아시아 학생들이나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들을 비판했던 대학교수의 이야기를 언급한 것이다. 그 기사에서 교수는 그러한 학생들은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익히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때 다른 학생들은 손짓을 주고받거나 의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희정이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말이랑 생각은 같은 게 아닙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아무도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고, 결국 토론은 다른 주제로 넘어가야만 했다.
이후 희정은 그 주의 연구 보고서를 헤이즐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언제나 그렇듯 희정의 보고서는 깊이 있으면서도 간결했다. 하지만 정작 헤이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메일 맨 아래쪽에 있는 희정의 새로운 서명 문구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높은 상호의존성에도 아시아 학생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사실 많은 교사가 이들의 과묵함에 당황하곤 한다.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린브룩 고등학교 교장인 게일 데이비슨Gail Davidson 역시 마찬가지다. 린브룩의 전체 학생 수는 1,700명이 넘는데, 그중 아시아계 학생들이 80퍼센트를 차지한다. 공립학교인 린브룩은 경쟁 학교들에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일단 캘리포니아 주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보여 주는데다 미국 교육부에서 푸른 리본상을 받았으며, 미국 전체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뉴스위크〉 평가에서도 금메달을 받았다.
데이비슨은 이렇게 말한다. “학생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모든 객관적인 기준에서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사들은 학생들이 수업 중에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걱정합니다. 더 넓은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학생들은 의사소통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이러한 동서 간의 충돌, 즉 학생들이 얼마만큼 말을 많이 해야 하는가 하는 입장 간의 충돌은 어린이집에서 시작해서 박사 이후 과정까지 전 세계 수많은 학교에서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많은 교사는 아시아의 상호의존성이 하버드에 진학하는 데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추아의 딸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이렇게 질문을 덧붙인다. “왜 아시아 학생들은 말을 별로 하지 않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가? 왜 그 아이들은 자신보다 부모의 기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적응하려고 왜 그렇게 애를 쓰는가?” 사실 이 질문은 서구에서 교육받은 대다수 교사의 머리와 가슴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서구 교사들은 또한 아시아권 학생들이 실제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기술은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일부는 서양인의 독립적인 특성이 학교와 비즈니스 세상에서 동양인들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헤이즐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아시아건 학생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서구 학생들에게는 불리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의 자아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서로 다른 교육 방식의 비밀을 벗겨 보고자 한다. 많은 아시아계 사람과 서구 세상에서 성장하고 있는 이들 자녀들의 입장에서 주의 깊게 듣고, ‘올바른’ 방식대로 따라 하고,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보편적인 학습 태도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 즉 동양이 강조하는 상호의존적인 자아로 성장하는 바람직한 자세다. 반면 서구의 교사들과 학생들의 시선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스스로 방식을 선택하고, 자신의 존재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사람, 즉 서구가 강조하는 독립적 자아로 성장하는 바람직한 태도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서로 다른 입장 뒤에 숨은 진정한 의미와 의도를 이해해야만 학교와 직장에서 받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자아가 지난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서로 다른 두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다.
말하기 또는 듣기
희정은 미국에서 6년이나 살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라는 교수들의 지적에 매번 적잖이 당황한다. 하지만 그녀는 설익은 논쟁이 아니라 심오한 숙고로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배웠다. 위대한 유교 사상가 노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많은 유럽계 미국인 동료와 달리 희정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를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 지식과 연결하는 작업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희정은 자신이 교실에서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새내기 문화심리학자로서 희정은 자신을 당황하게 한 상황들이 종종 훌륭한 연구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래서 그녀는 왜 미국인들이 교실 속 침묵에 그다지도 참을성이 없는지 연구하기로 했다. 희정의 다소 혁명적인 가설은 이렇다. ‘유럽계 미국인들은 말을 하는 것이 생각에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반면 한국인을 포함한 많은 다른 동아시아인들은 말이 오히려 생각을 방해한다고 믿는다.’
그녀는 뉴욕 출신의 백인 대학원생인 리처드와 함께 자신의 직감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 리처드는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에 활동했던 토론 모임에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서 이렇게 주장했다. “말하기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 때도 있죠.”
희정은 우선 아시아 학생들과 면담을 나누어 보았다. 일본에서 온 대학원생 아키코는 말이 곧 생각이라는 미국인의 믿음에 보인 희정의 부정적인 견해에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속담을 들려주었다. “혀는 불행의 씨앗이다.” “자신의 입을 소중한 도자기처럼 지켜라.”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다. 그건 두 번 듣고 한 번 말하라는 의미다.” “꽥꽥거리는 오리가 먼저 총 맞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희정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검증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말하기와 생각의 관계에서 “침묵 속에 있을 때 최고의 사고가 가능하다.”라는 동양적 믿음과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생각도 하는 사람이다.”라는 서구적 믿음을 담은 다양한 주장들로 설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에서 그 주장들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해보았다. 그 결과,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군에서 미국인 대부분은 말하는 것이 생각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한국인들은 말하는 것이 생각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에 더 많이 동의했다.
물론 말이 생각을 돕는다는 미국인들의 믿음이 꼭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말이 생각을 방해한다는 동아시아인들의 믿음도 선입견일 수 있다. 미국인들과 동양인들 입장에서 말이 사고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희정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비언어적 지능 검사인 레이븐 검사Raven Progressive Matrices를 실시했다. 이 검사에 참여한 피실험자들 중 절반은 유럽 쪽 배경을, 절반은 동아시아 쪽 배경(한국, 중국, 베트남, 일본)을 갖고 있었다. 모든 학생은 절반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나머지 절반은 ‘소란스럽게 생각하면서’, 다시 말해 문제 해결 과정을 소리 내어 말하면서 검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희정은 유럽계 미국인들은 말하면서 문제를 풀었을 때 더 좋은 점수를 기록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같은 상황에서 더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서 문제를 풀었을 때는 유럽계 미국인 학생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침묵은 곧 생각 없음’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그들에게 침묵이란 신중한 사고 과정의 표현인 셈이다. 즉, 헤이즐의 주장이 틀렸던 것이다.
(…)
충격 완화
동과 서. 그리고 독립성과 상호의존성. 물론 이러한 구분은 다분히 애매모호하다. 예를 들어 일본은 중국, 한국, 베트남, 인도와는 다르다. 미국 역시 프랑스나 영국, 호주와는 다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미국 중서부 남성들의 상호의존적인 자아는 남부 여성들의 상호의존적인 자아와 다르다. 그리고 서민층에 해당하는 유럽계 미국인들의 상호의존적인 자아는 중산층 일본인들의 상호의존적인 자아와 다르고, 기독교를 믿는 사업가의 독립적인 자아는 불가지론을 믿는 서부 사람들의 독립적인 자아와 같지 않다. 이들 집단은 앞서 살펴본 독립성이나 상호의존성 특성들을 대부분 드러내기는 하나, 다섯 가지 측면을 모두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독립성이나 상호의존성의 모습을 실질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문화 사이클의 여러 다른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이 정말로 중요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어떻게 대답하는지 살펴본다면, 이러한 애매모호함 속에서도 어떤 패턴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두 자아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에이미 추아가 어렵사리 배웠던 것처럼 특정 문화의 관습을 다른 문화에 떨어트려 놓았을 때, 그것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추아의 둘째 딸 루이사는 언니 소피아가 성공을 거두었던 방법을 거부했다. 그래서 추아는 자신의 책에 소제목을 이렇게나 길게 달았던 것이다. “자녀 양육에서 중국 부모들이 서양 부모들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책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쓰라린 문화의 충돌, 허무하게 사라지는 영광의 달콤함, 13살 아이 앞에서 얼마만큼 겸손해질 수 있느냐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의 독립성이나 상호의존성을 적절하게 조합함으로써 자아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다. 서양인들은 어떻게 상호의존성을 개발하여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 대비할 수 있었을까? 동양인들은 어떻게 독립성을 강화하여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욱 잘 협력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충돌이 어디서 빚어지고, 어떻게 그 충격을 완화할 수 있을지 설명하는 비교적 간단한 시스템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시스템이란 다름 아닌 다음 장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문화 사이클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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