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하고 싶어 한다. 무엇을 할 것인지, 타인에게 무엇을 하도록 허용할 것인지 본인이 직접 결정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에 대한 의존 없이 스스로 서고 싶어 한다. 여기서 나온 모든 단어들은 삶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기초적 욕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가 묵살되는 시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짧지 않은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욕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나침반과 같다. 한 인간이 존엄성과 관련해서 겪는 이런저런 경험들은 이 욕구와 정확히 맞물린다. 남에게 의존하거나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들, 무력함을 느끼게 하거나 존엄성을 해친다고 느껴지는 사건들. 이런 것들을 겪게 되면 우리는 의존과 무기력을 벗어나 잃어버린 자주성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다. 바로 그런 것들을 토대로 존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성에 대한 이런 설명과 믿음이 언뜻 보기에는 분명하고 간단해 보이지만 그것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일들은 실상 간단하지가 않다. 이들은 하나의 거푸집에서 구워낸 것처럼 똑같은 것이 아니다. 독립적이라는 것은 아주 많은, 그리고 매우 다양한 것을 의미할 수가 있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을 다루고자 할 때, 특히 인간이 살아가는 형태와 방식 안에서 이것을 다루고자 할 때는 단순하고 암시적으로만 드리는 몇몇 개념 안에 숨겨진 다양한 실제 상황들을 가시화해야 한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고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에 의존하고 타인은 우리에게 의존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다. 그중 어떤 것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또,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엄을 위협하는 의존성을 경험하는 것일까?
주체 되기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어떠한 종류의 독립성을 추구하며 왜 독립성이 그토록 중요한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기억 표면으로 불러낼 필요가 있다. 그 이야기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것이어야만 하겠다. 대체 어떠한 능력이 인간을 대상이나 물체, 물건 또는 단순한 육체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
우리는 각자가 경험의 중심체다. 우리는 경험을 함으로써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실감한다. 사람이란 내면의 시각과 내면의 세계를 지닌 육체적 존재다. 그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은 신체 감각이다. 몸의 상태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은 물론 욕구, 욕정, 고통, 더위와 추위, 어지러움과 혐오감, 가벼움과 무거움을 느끼는 전형적인 신체감각이 모두 포함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들,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끝으로 느끼는 것들도 들어간다. 그보다 한 차원 더 위에 있는 것은 감정이다. 기쁨과 무서움 또는 질투와 부러움 같은 감정, 슬픔과 우울함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감정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구의 형태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이 감정을 통해 밖으로 표출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소망은 상상, 즉 머릿속으로나 속으로 바라는 것들을 통해 구체화되어 밖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적 차원 위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과거의 기억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품은 희망과 기대의 청사진을 토대로 형성된다는 의미다. 이러한 것들 모두가 합쳐져 우리가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전체적인 그림이 만들어지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과 믿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판단하는지, 어떤 것을 정당하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는지의 기준 또는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를 가르는 경계가 한 사람의 세계관이다.
바로 그렇게 할 때 한 인간은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것, 다시 말하면 의식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의식의 경험을 기반으로 우리의 행위가 형성된다. 그러나 눈 깜박임이나 반사작용같이 단순히 동작에 불과한 무의식적 행위도 존재한다. 이런 행위들은 그동안 내면에서 체득된 것으로, 본인이 그 동작을 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경험에서 발원된 것이 아니기에 그 어떤 표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어떠한 태도는 특정한 행위가 될 때만이 비로소 경험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어떤 행위를 받치고 있는 경험 안에는 그 행위의 동기라는 것이 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느끼고 소망하며 과거의 무엇을 기억하고 상상하고 또 숙고하며 믿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내 행위의 장본인이 되며 내 경험에서 비롯된 행동의 행위자가 된다. 또한 나를 이끄는 동기는 내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행위의 동기를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떤 생각과 희망과 감정 때문에 행동을 하는지 알맞은 말을 골라 언어로 표현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본인의 행위를 남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설명하게 된다. 특정 행위 또는 행동의 일정 부분 원인이 되는 동기를 이야기를 통해서 풀어낸다. 우리는 본인의 삶을 이런 의미에서 설명할 수 있는 존재다. 즉,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중력장의 중심과도 같은 주체라고나 할까. 다르게 말해 동기에 얽힌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기억에 얽힌 이야기, 현재 겪어나가고 있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상상하는 이야기, 또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지 등등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포함된다. 이들 이야기 안에서 자화상, 즉 한 인간이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보고 있는지가 생성된다.
주체로서 겪는 경험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력이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내면의 이력보다도 우리의 사상과 감정과 소망과 미래에 대한 환상을 더 많이 드러내 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은 어둠 속에 싸인 숨겨진 동기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고,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인생은 이러한 동기들을 인식해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줄기차게 그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숨겨진 동기 중에는 파헤치지 않고 영원히 어둠 속에 묻어놓는 편이 더 나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주체로서의 특성은 무의식적이고 드러나지 않은 동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아 발견의 범위를 내면으로 넓혀나가는 시도를 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하나의 주체로서 갖는 자화상은 현재 우리의 모습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모습도 해당된다. 주체가 가진 능력에는 스스로를 평가 대상으로 삼고 행동과 경험이 만족할 만한 것인지, 즉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 내쳐야 할 것인지 자문하는 일련의 과정도 포함된다. 현재 존재하는 모습과 되고 싶은 모습 사이의 갈등을 체험하는 것, 되고 싶은 대로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도 주체가 가진 본질이다. 그러므로 주체로서의 인간은 내적 검열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자신의 행위와 사고, 희망, 공상을 금지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이 능력의 원천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이 능력의 원천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능력이다. 주체적 인간은 내적 갈등을 안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의 행위와 경험을 존중할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 자문할 줄 알아야 한다.
주체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에 끌려가는 것처럼 그저 앞만 보고 터덜터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문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주체적 인간은 의심의 여지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볼 뿐 아니라 계획을 갖고 자신과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영향을 미쳐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온갖 경험의 희생양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떨어져서 새로운 사고와 희망과 감정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고 그 방향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함께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적 정체성을 갈고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초보적이고 개략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이 책의 페이지 수가 더해지면서 계속 세밀하고 풍부해질 것이다. 우리가 존엄성과 관련해 겪게 되는 일들은 주체로서의 우리 모습과 아주 밀접하게 엮여 있다.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 주체로서의 삶도 동시에 위협받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위협과 그에 대한 방어라는 사건을 경험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주체로서 겪었던 경험들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가게 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로 목적 되기
주체로서의 인간은 단순히 이용당하는 존재가 되길 원치 않는다. 내가 아닌 타인이 정해놓은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수단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존재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또는 존재 안에 목적을 담은 자기 목적적 존재로 받아들여지고자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단순히 불쾌한 정도를 벗어나 무시받는 대상이 된다거나 더 나아가 짓밟힌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존엄성을 앗아 가려는 시도로 체험한다.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존엄성이 얼마나 크게 좌지우지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닌 우리 존재 자체가 목적으로 취급되고자 하는 당연한 권리를 기대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여행을 하다가 1년에 한 번 열리는 어느 큰 장터에 들르게 된 나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난쟁이 멀리 던지기 대회였다. 힘센 사내가 난쟁이를 들어 올리더니 온 힘을 다해 힘껏 던져 물렁물렁한 매트리스 위에 패대기치는 것이었다. 난쟁이는 패드와 손잡이가 달린 보호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모여든 군중은 난쟁이가 던져질 때마다 매번 즐겁게 환호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그날의 기록은 4미터였다. 나는 그 난쟁이가 난쟁이 멀리 던지기 세계 선수권대회에도 참가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람을 멀리 던지는 세계 대회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최고법원 차원에서 이 경기를 다룬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대법원은 난쟁이 던지기 대회를 금지시켰고 유엔에서는 항소심을 기각했다. 사유는 두 기관 모두가 같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장터에서 경기를 지켜본 내 머릿속에 제일 처음 든 생각도 같았다. 인간을 갖고 저런 짓을 하면 안 된다. 던져지는 사람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대단합니다. 그렇죠?” 내 옆에 서서 구경하던 남자가 다른 참가자들보다 좀 더 좋은 기록을 낸 참가자를 보고 크게 외쳤다. “거부감이 듭니다. 용납이 안 돼요.” 내가 말했다. “왜요?” 남자는 짜증이 난다는 듯 이렇게 반문했다. “누가 억지로 강요한 것도 아니잖소. 난쟁이도 돈을 받고 하는 거고, 일단 엄청 재미나지 않습니까!” “저 사람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일이오!” 나도 성이 나서 되받았다. 박수 치며 환호하는 군중 한가운데서 그런 엄숙한 말을 한다는 것이 실로 이상했다. 홍수에 휩쓸려 들어갔다가 겨우 물 위로 머리를 들어 올려 숨을 들이마시는 느낌과 비슷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등을 돌리고 가려다가 이렇게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존엄성이란 게 대체 뭐요?”
난쟁이 던지기는 투포환 경기나 망치 멀리 던지기 같은 것이다. 난쟁이 던지기에서는 사람의 몸이 던져지는데, 위의 경기와 같이 얼마나 멀리 던지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사람이 뭔가를 던지기 위해서는 쇠공이나 망치처럼 부피와 무게를 지닌 물건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난쟁이를 던질 때도 다르지 않다. 난쟁이는 더도 덜도 아닌 덩어리, 즉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던져지는 순간, 그 이외의 다른 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난쟁이가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것, 누가 자신을 들어 올리고 내던지는 것을 자신의 특정한 방식으로 느낄 수 있는 신체를 가진 존재라는 것, 그 느낌이 무력감과 혐오감과 공포라는 것, 이 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린다는 것, 그 자신도 환호하는 군중과 이 행사가 가진 특성과 난쟁이로서의 자신이 가진 기술에 대해 생각할 줄 안다는 것, 이런 사실들은 경기 참가자와 관중에 의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어차피 금방 잊힌다. 이제 난쟁이 던지기 대회에서 느껴지는 분노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이 나왔다. 사람을 던질 때 그 사람에게서 존엄성이 박탈되는 이유는 그도 하나의 주체라는 점이 간과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물체, 물건으로 격하되고 이러한 인격의 물화物化에 바로 존엄성의 상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극장에서 불이 났다고 해보자. 사람들은 모두 앞다퉈 출구로 줄달음칠 것이다. 다른 관객들을 옆으로 밀치고 끌어내며 밟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마치 앞길을 가로막는 물건처럼, 그저 치워내야 할 덩어리로만 보일 것이다. 이렇게 대형 사고가 일어났을 때, 타인도 자기처럼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은 개인에게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잔인한 일이지만 이것은 망가진 존엄성이 가진 잔인함이 아니다. 몸집이 큰 사람이 앞을 헤쳐나가다가 물건을 움켜쥘 때처럼 아이를 움켜잡아 옆으로 던져버리는 행위는 장터에서 열리는 난쟁이 던지기 대회 때와는 경우가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동기가 달라짐에 따라 그에 기인한 상황에 차이가 생긴다. 황급히 대피하는 사람의 동기는 무조건 그 공간에서 나가고자 하는, 단순한 공포다. 타인을 육체적 장애물로 격하시킬 때의 몰인정함은 미리 생각해두거나 계획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잔인성이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내 목숨이 걸렸단 말이다!” 방금 나왔던 덩치 큰 사람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의자를, 그 다음에는 앞사람을 잡아 냅다 던지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장터에서는 그런 변명조차 없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그냥 재미로 던져진다. 박수 치고 즐거워하며 환호하는 관중의 쾌락은 다름 아닌 사람이 물건처럼 던져지는 걸 보는 데에 있다, 라고 표현하면 그 안에 있던 다른 의미가 던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던져지는 물체가 한 인간, 자기 자신들과 다름없는 지각 활동의 주체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는다. 만일 그 사실을 잊게 된다면 재미는 금방 사라진다. 재미로 던져진 사람에게서 왜 존엄성이 박탈된다는 것일까? 하나의 주체인 그가 절박한 이유도 없이 계획적으로 대상이나 물건처럼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대회를 금지한 재판관은 바로 이 점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관중이 재미를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난쟁이를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난쟁이는 던지기 놀이를 할 때 쓰이는 물건이며 대회의 수단이다. 그는 대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간주되며 그렇게 이용된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그는 단지 하나의 장난감,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도 상황을 함께 체험하기는 하지만 그 사실은 전혀 중요치 않다. 그의 생각과 관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뤄진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이 총알받이나 폭탄으로 이용될 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앞에서 말한 난쟁이처럼 단순한 육체라는 수단으로 축소된 존재다. 게임이라는 속성이나 재미, 그리고 구경거리의 요소는 없지만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핵심은 동일하다. 인간이 오직 수단으로만 이용된다는 것이다.
판사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존엄성에 대한 이해였다. 비록 인간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다양하게 이용될 수는 있다고 해도, 단지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만으로 축소될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거나 취급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다른 인간과 목적 지향적이고 기능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해도 이것이 우리를 이끄는 유일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존엄성이 제대로 서려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결국은 당하는 사람 자신에 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난쟁이 던지기 대회에서 우리를 불편하고 화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단순한 노리개로 이용되면서도 정작 난쟁이 본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놀이가 되어버림으로써 그에게 가장 소중한 지위, 즉 자기 목적적 존재로서의 지위가 박탈된다는 사실에 있고, 판사가 고려한 것도 바로 이 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도 존엄성을 잃어버린 존재이다. 최전선으로 투입되는 병사는 총알받이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전장으로 보내진다. 앞으로 달려 나가다가 총알을 맞고 쓰러져 죽는, 그래서 뒤에서 전진하는 병력이 좀 더 쉽게 전진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총알받이 말이다.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야콥 폰 군텐》에서 주인공 야콥은 나폴레옹의 군대에 들어가 러시아로 진군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니고 거대한 기계의 작은 부품이 될 것이다. 부모님, 친척들, 예전에 부르던 노래, 나만의 고뇌나 희망, 고향 생각과 신비함 같은 것은 모두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전투 훈련과 인내의 과정을 거치면서 단단하고 침범 불가능한, 알맹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살덩어리로 만들어질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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