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 20주년 기념 판본에 부쳐
이 책의 독자들도 알다시피 현대의 중동은 1차 세계대전1914~1918 뒤에 형성되었다. 이전에는 서아시아의 정치 풍토가 지금과는 판이했다.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터키, 사우디아라비아만 해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나라들이다. 이들 모두 수백 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속령이었다가 제국이 해체되면서 탄생한 국가들인 것이다.
『현대 중동의 탄생』은 현대의 중동을 이렇게 만든 주체는 누구고,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왜 그랬는지를 다룬 역사서다. 책이 첫 출간된 것은 1989년 여름이었으나 그 후로도 발간이 끊이지 않았고 그 덕에 비평과 호평도 많이 늘었다. 그럼 출간한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여러 요소들 가운데 특히 어떤 내용을 덧붙이면 좋을까?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겠지만,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제국을 복구하지 않고 해체하는 길을 택했다. 점령국이 된 서유럽 국가들이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맡게 된 탓이었다. 기독교도가 무슬림을 통치하는, 양쪽 모두 달가워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도 그래서였다. 양측은 그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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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영국과 프랑스군이 침략했을 때, 중동의 정치와 삶은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곳에 유럽인들은 세속주의, 민족주의, 동맹체제와 같은 유럽식 정치를 도입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국 땅에는 그런 요소들을 이식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동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불만스러웠던 것은, 외국인이 무슬림인 현지인들을 지배하게 된 것이었다. 외국인의 지배를 반기는 곳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겠지만 그 점에 있어 무슬림들의 증오는 특히 심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애당초 중동의 정치나 정치 지도를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은 그렇게 되었다. 1920년 초까지 유럽 연합국이 취한 각종 조치, 협정, 결정들이 뒤섞여 중동 평화의 최종 타결안을 형성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 『현대 중동의 탄생』에서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1922년의 타결”로 부른다.
그 타결에는 오류가 많았다. 최소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렇다. 국가와 국경선을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아닌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한 것만 해도 그렇다. 그런 결정은 대개 그곳 사정이나 욕구에 무지한 연합국 관리와 각료들이 내리기 일쑤였다. 외국인이 정책 결정자였던 셈이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현지 주민들의 삶에 간섭할 자격이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될 만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22년의 타결에는 그보다 더 큰 결함이 숨어 있었다. 이 책의 독자들도 알 만한 이유로, 영국의 공적 견해와 정치적 견해가 그 타결이 승인되기 무섭게 곧 배척을 당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뢰하지 않는 정책을 떠맡게 된 관리들이 타결된 내용을 잘못 시행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시행조차 하지 않았다. 『현대 중동의 탄생』의 독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낯익은 내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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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중동은 잠잠했다. 이렇게 활기 없던 곳이 1940년대 중엽과 1950년대 중엽 사이, 영국이 갖고 있던 중동의 패권을 미국이 넘겨받으면서 격동의 지역으로 변했다. 중동의 혼란은 1991년 걸프 전쟁(페르시아 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가일층 심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9?11 사태’라는 일반 명제 아래 세계의 나머지 지역까지 그 여파가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럼 이 일은 대체 왜 일어났을까? 1922년 타결에 잘못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타결의 수혜자들에게 잘못이 있었기 때문일까? 왜 유독 중동 국가들에만 그것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다른 나라들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내가 이 책의 범주를 벗어나는 주제임에도 이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이것이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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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이곳저곳에서 이합집산이 일어나는 것은 적법성 때문이다. 적법성을 획득한 나라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나라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접국의 경계를 수용하는 나라가 있고 수용하지 않는 나라도 있으며, 인접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인정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보유에 연속성이 있으면 권리 주장이 인정되었다. 영원한 이집트와 제국적 페르시아만 해도 고대 세계의 승자라는 이유로 국가의 지위에 대한 그들의 권리도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강력한 지도자가 건설한 국가들 또한 그 인물이 진정으로 강하고 진정으로 토착민이면 용인되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운 터키 공화국과,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수립한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런 나라들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나라들―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이었다. 이들 모두 영국과 프랑스의 자식들, 수정된 사이크스-피코-사자노프 협정이 만들어낸 산물이었고, 그러다 보니 영令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에는 그 국가들의 기원이 놓여 있다는 주장이 빈번히 제기된 까닭도 그래서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 사례에 비춰 보면 그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님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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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재편은 현대의 역사상 그런 종류로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에도 그와 유사하게 분쟁의 소지가 될 제국주의 유산이 남아 있었다. 현대에 최초로 탈식민주의가 일어난 곳은 1800년대 초 프랑스에서 독립한 아이티와, 에스파냐 식민지들을 시작으로 독립이 진행된 라틴아메리카였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유럽인들이, 대개는 자신들의 행정적 편의를 위해 남아메리카 처녀지에 그들만의 내적 경계선을 부과한 지 400년 만에 되찾은 독립이었다. 그런데 만일 이때 원주민들이―1789년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유럽의 여러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그들의 정치 현실과 민족주의 열망에 맞는 국가와 국경을 얻겠다고 항쟁을 벌였다면 남아메리카에서는 언제까지고 학살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도 자칫 발칸의 전철을 밟거나, 허다한 사라예보가 양산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가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은, 독립된 시점의 정치 체제를 받아들이고 약간의 고대 지혜도 구현한다는 내용의, 로마법에 기원을 둔 현상유지 원칙이라는 국제 공법을 따른 덕분이었다.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뒤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그들도 과거를 되돌리려 했다가는 현재와 미래마저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1960년대부터 탈식민지화가 진행된 아프리카도 라틴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현상유지의 원칙을 받아들였다. 아프리카에서는 부족이 정치 현실이었다. 따라서 조상의 영역 내에서 부족간 투쟁이 벌어지면 재앙이 초래될 수 있었고, 실제로 몇몇 경우에는 재앙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1963년 아프리카 독립국 정상 회의에서 아프리카 통일기구가 설립되고, 뒤이어 이 기구가 현상유지 원칙의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로 그것의 연속적 유효성도 확인받았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지금도 이 원칙에 따라 살고 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아프리카에서는 부족이 정치 현실인 반면 중동에서는 종교가 정치 현실이다. 따라서 둘 모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요소들이고, 그러므로 평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조정과 타협에도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극복되어야만 한다. 중동이 어느 시점에 타결과 평화를 얻으려면 현상유지의 원칙을 반드시 작동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시점은 언제가 좋을까? 그에 대한 답은 물론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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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에 벌어진 테러 사건으로 서방 세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중동의 유혈사태가 미국 땅과 미국 가정의 안방까지 침투한 사건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만했다. 게다가 테러 주동자 오사마 빈 라덴은 80년 전 서방 세계가 행한 일에 대한 복수로 그 공격을 정당화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미국인들로서는 더더욱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이후 며칠간 텔레비전의 뉴스 해설자들은 사건의 원인을 찾기에 분주했다. 1920년대 초 미국과 미국의 우방국들이 빈 라덴의 종족들에게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가 그들이 가진 궁금증이었다. 그 위해란 물론 기독교 군대가 무슬림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무슬림의 법률과 정부를 타도하며, 유럽식의 국가와 국경선을 수립한 것이었다. 무슬림 중동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닌 서구의 목적 달성과 서방 국가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체들을 세운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 점에서 빈 라덴도 1922년의 타결을 비난한 것이고, 협상에 참여도 하지 않은 미국에 그 책임을 돌린 것이었다. 지독하게 복고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날의 종교전쟁만 해도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함께 벌였다. 물론 십자군은 유감스러울 만했고, 유럽도 그 점은 유감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오사마 빈 라덴에게도 서구인들은 할 말이 있다. 훈족, 몽골족, 투르크족, 그 밖의 아시아 출신 전사 부족들이 서쪽의 유럽으로 가서 파괴활동을 자행한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따져 물을 만했다는 것이다.
테러분자들에 의한 뉴욕의 쌍둥이 빌딩 공격은 비단 미국인뿐 아니라 유럽인들에게도 중동에서 전개되는 분규가 매우 심각하고, 그 분규의 평화적 해법을 찾는데도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 또한 자못 심각하다는 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아랍-이스라엘 분쟁만 해도 나아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악화되었으니 말이다. 이 모두 중동에는 현상유지의 원칙이 도래하지 않은 탓이었다. 도래하기는커녕 중동은 아직 그 근방에 다가가지도 못했다. 적법성을 얻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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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처음 발간된 1989년 유럽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중동에 대한 위협을 포함해 전 세계에 미치던 소비에트의 위협도 이와 더불어 사라지는 듯했다. 이 책 종장들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제정 러시아가 와해되고 재등장하는 과정을 주제로 다룬다. 아닌 게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가 제기했으며 그 등락이 심했던 위험은 적어도 서구인들 시각으로는 지난 100년간 세계 정치에 거듭해서 등장한 주제였다.
국제연합의 틀을 짠 사람들을 포함해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세계정세에서의 소련의 존재 때문에 여러 세대 동안 좌절을 겪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진만 해도 2차 세계대전 뒤 1922년의 타결 내용을 뒤집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독립과 자결을 증진시키기 위해 민족들의 필요와 요구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평화 수립안을 마련했으나, 소련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혔다. 소련은 그들이 신봉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1922년의 타결 협상 때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에만 일편단심 신경을 썼다.
그런 만큼 20년 전에 일어난 소련의 붕괴가 미국으로서는 충분히 해방으로 느껴질 만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미국 정부도 이제 바라던 일을 자유자재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유일한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새로운 지위를 나타내는 화려한 수식어도 생겨나 입이 닳도록 되풀이해서 말해졌다. 1989년의 베를린 장벽 사건이 일어난 뒤였던 1990년대 초, 걸프 전쟁(페르시아 만 전쟁)을 치르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여 다국적군을 결성한 것도 당연히 미국이 새롭게 얻은 행동의 자유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이라크에 점령돼 있던 쿠웨이트를 해방시켰고, “새로운 세계 질서‘의 도래도 선언했다. 소련의 대응도 더는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는 아마도 이것, 소련의 대응을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 파멸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심지어 억제되지 않은 힘은 위험할 수 있음을 경고한 다수의 문헌조차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다. 억제되지 않은 힘은, 그 힘이 가해지는 타국에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힘을 행사하는 미국에도 위험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미국은 생각처럼 전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인들 특히 미디어와 학계에 종사하는 미국인들은 그 점에 의혹을 갖지 않았고, 미국 또한 이라크와 여타 지역에서 스스로 믿었던 것처럼 전능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그런 것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제한적 선택의 자유로 후회막급할 행동을 했다. 선택의 자유가 적었다면 실수할 개연성도 줄었을 테고, 그러면 결과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냉전기의 소련이 제기한 위협과 견제의 힘이, 미국으로 하여금 정책 수립 과정에서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장고를 거듭하게 만든 좋은 훈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우리에게는 이로운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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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있듯, 『현대 중동의 탄생』도 제아무리 위대한 제국도 종국에는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우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국 해군 소속의 요트 마녀 호가 크루즈 유람객들을 태우고 지중해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장면이 책의 출발점이다. 배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 미증유의 거대 제국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의 총리―리더―를 비롯해 여러 명의 선객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관광객이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을 둘러보기 위해 지중해 유역을 찾았던 것뿐이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 황제와 같은 위대한 정복자들이 건설한 고대 제국들의 부서진 거리를 거닐어도 보고,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다는 아카드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마녀 호의 선객들도 제국들의 세계에서 살았다. 영국 외에도 영국의 동맹인 프랑스와 러시아, 나중에 적이 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500년 동안 중동을 지배 중이던 오스만제국, 이런저런 형태로 역시 2,500년가량 중동을 지배했던 페르시아 제국이 존재하던 세계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과 이 모든 세계가, 1차 세계대전1919~1918 및 1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어 체결된 파멸적 평화조약으로 변했다.
중동도 물론 1차 세계대전으로 변한 지역―종전 뒤 아랍어권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려 한 연합국이 부과한 일련의 정치적 협약으로―변한 지역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그것이 제국주의적이라는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 공격에도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도 이 책을 통해 알았겠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단순하고 경험도 부족한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그들을 판단할 때도 그 점을 감안해 좀 더 너그러운 태도로 정상을 참작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22년 타결을 이끌어낸 사람들이 제국주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아는 유일한 세계가 제국들의 세계였고, 그러므로 그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제국주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다. 승자도 제국, 패자도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전후 중동의 재건을 책임진 정치인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는 것 역시, 1세기 전이었던 당시에는 그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다. 폭넓은 관심을 요구하거나 조장하는 것은 세계가 상호의존적이 된 오늘날에야 생겨난 개념이었다. 인류를 위한 대변도 마찬가지다.
셋째,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영국 관리들이 당시의 아랍은 아직 자치―다르게 표현하면 법률에 따른 자유 민주주의 헌법 체제―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 것 또한, 물론 그것은 쇼비니즘적 주장일 수도 있겠지만 최근의 증거물로 보면 그 말이 반드시 틀리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도 만든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2004년 4월 3일자)에 실린 다음 기사도 그것과 관련해 참조해볼 만하다. “아랍 연맹에 가입된 22개 국가들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일관되게 소수에 의한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단 한 명의 아랍 지도자도 선거 뒤 조용하게 쫓겨나 본 적이 없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넷째, 1922년의 타결과 관련해 영국이 중동에 공군 기지와 다른 군사 기지들을 보유한 것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라크, 이란, 팔레스타인, 시리아-레바논, 이집트 등 중동 전역에서 친 나치 독일 세력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영국 입장―영국 관리들이 가졌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일한 관점―에서 보면 그것도 충분히 1922년 타결의 유효성을 입증해주고, 그것의 중요성을 보여준 요소로 여길 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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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수록된 사건들에서 비롯된 국제 문제들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해결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하듯 시야를 미래로 넓히면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정치 문제는 풀리게 되어 있다. 어쩌면 그보다 중요한 다른 문제들에 밀리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해묵은 적개심도 새로운 적의 등장으로 잊힐 것이고, 길게 보면 비록 더딜지라도 사람 또한 변하게 마련이다. 이 책의 독자들도 진즉에 알았겠지만, 서로마 제국 멸망 뒤 유럽의 새 지도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데도 1,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오스만제국의 멸망도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격변들 중 하나였다. 물론 규모 면으로는 로마제국의 멸망에 견줄 바가 못 되고, 술탄 체제도 황제 제도에 비하면 뿌리가 깊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스만제국의 멸망은 정치적 지진이라 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따라서 부서진 조각들을 이런저런 형태로 꿰맞추는 데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제3천년기와 21세기에 들어서는 미국이 다시금 이라크를 침공하여 역사에 힘을 미치려고 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사건과 결과에 대해서도 많은 책들이 집필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나온 문제들과 작금의 현안들에는 유사점이 있을까? 거의 그럴 것이다. 반면에 이 책의 40주년 기념 판본이 나오면, 그것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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