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와 계급투쟁
지금 베이징, 상하이, 광둥을 비롯한 대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문화혁명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이다. 문화혁명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백화점과 슈퍼마켓이 늘어선 광경을 보며, 아직 모든 중국인의 살림이 넉넉해진 것도 아닌데 장사의 욕망만이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남의 일이지만 걱정스럽기도 하다. 중국 서민 중에 홍위병이었던 시절의 ‘위세’가 느껴질 만큼 고압적인 태도를 드러내 보이는 사람, 그렇게 아직 착각에 빠져 사는 사람이 눈에 띌 때도 문화혁명에 새삼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한편 현재의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보면 서민 중에서도 최하층인데도 지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의 삶을 접하며, 문화혁명은 이런 사람들에게도 날카로운 발톱처럼 덮쳐 왔던 것일까 하고 자못 우울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문화혁명 때 외국인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구역 이외의 후퉁胡同 안쪽에는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서로 상대를 밀고하는 ‘혁명 투쟁’이 1950년대부터 거듭 장려되었고, 외모가 중국인 같더라도 평소에 못 보던 사람이 동네에 들어왔을 경우 나라가 말하는 것처럼 스파이일지도 모르기에 사람들은 타인을 볼 때 의심의 눈을 부릅떴다.
북경반점에 머물던 나 같은 외국인도 로비를 지키고 선 여러 명의 사복 공안 경찰관이 출입을 체크했다. 왕푸징에 있는 백화점이나 둥펑東風 시장이라는 혁명적 이름으로 개명했던 등안東安 시장에 토산품을 사러 가는 관광객 뒤에, 세 명씩 따라붙어 미행하기도 했다. 많은 방의 천장 조명에 마이크가 숨겨져 있었고, 대규모 도청 시설이 1층과 2층의 중간에 위치한, 정면에서 왼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경반점 안에 있는 우체국에서 부친 우편물은 전부 개봉되어 번역 담당자 손에 들어가 검사받았다. 부적절한 부분은 검게 칠하거나 그 행만 잘라냈다. 내 편지는 무엇이 그렇게 거슬렸는지 몰라도 1센티미터 폭으로 오징어 다리처럼 잘려서 일본의 친구에게 도착했다. 편지 검열은 문화혁명이 끝나고도 6년이나 지난 1982년까지 이어졌다.
식량과 일용품을 구입하는 데는 항상 구매권ㅗ購買券이 필요했는데, 이 구매권은 늘 부족했다. 소련의 경우 유럽의 비공산주의 국가들과 인접해 있었기에 시민들이 제한된 양만 공급했던 식품을 구하려고 추운 날씨에도 줄지어 선 광경이 외국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지만, 중국의 경우 보도 규제가 엄격했기에 바깥에서 실태를 알기는 힘들었다. 불과 수백 그램의 밀가루를 얻기 위해, 썩어 가는 배추 단 한 포기를 얻기 위해 엄동설한이든 불볕더위든 가리지 않고 배급소 앞에 줄을 서야 했다.
거리에서 그나마 활기가 있는 곳은 거민식당居民食堂 정도였다. 거민식당은 원래 동네에 적어도 하나씩은 있었는데,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도시의 주민 자치 조직에 지나지 않았던 거민위원회가 운영을 도맡았다. 지금도 중국에 존재하는 거민위원회는 요즘으로 치면 주민들이 반상회나 자율 방범대에 비견할 만한 조직인데, 실질적으로는 경찰이 관리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나리구미처럼 주민이 서로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국가 행정 기관의 가장 말단에 위치한 가도변사소街道弁事所 관할이었고, 거민위원회 주임은 주민들이 투표로 선출했다. 정치 권력이 민간으로 넘어가는 경계였다고 할 수 있다. 거민위원회는 문화혁명 당시 어떤 조직보다도 생활에 밀착한 혁명과 계급투쟁의 장이었다. 공산당의 지시가 발표되면 거민위원회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 구석구석까지 그 내용을 전달했던 것이다.
문화혁명 시기에 가족은 하나로 뭉치기 어려웠다. 직장의 근로시간이 저마다 달랐고, 가족 중 누군가가 비판의 화살을 맞거나 투옥되는 일도 있었기에 가정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당시 자기 몸을 안전하게 지키려면 제 발로 감시 시스템에 뛰어들어야 했다. 거민식당에 가지 않으면 일반 감시 대상에서 특별 감시 대상으로 바뀌면서 온갖 의심을 살 위험이 있었다. 다음날에 거민위원회의 아주머니들이 그 사람의 죄상을 적은 종이가 동네 게시판에 나붙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물자가 부족한 시기에 배급될 리가 없는 닭 한 마리를 친구가 선물로 주었다고 치자. 이 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장 어리석은 짓은 집에 가져가서 요리해 먹는 것이다. 문화혁명이 한창일 때는 가정에서도 어느 정도 요리를 해 먹었으니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주민이 서로 감시하고 있었으니 집에서 닭 같은 것을 먹으면 금방 들키기 마련이다. 고작 닭 한 마리를 먹고도 혹시 계급 심사 과정에서 실수는 없었는지, 숨겨놓은 재산이 있지나 않은지, 외국 스파이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 가지각색의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쓰는 세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어리석은 짓은 거민위원회에 신고하는 것이다. 먹어도 된다는 결정을 받는 것은 거민위원회가 무척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우선 닭이 더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받는다. 계획적으로 거민위원회를 속이러 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으면 끝이다. 거민위원회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작성해서 상부 조직으로 올려 보낸다. 상부 조직에서는 그 위의 조직으로, 그 위의 조직에서는 더 위의 조직으로 연달아 서류를 올려 보낼 것이다. 그 사실은 물론 개인이 소속된 단위(직장)의 당안檔案에 일일이 기록될 것이다. 당안이란 소속 단위에서 엄중하게 관리하는 개인 조서인데, 개인에 관한 온갖 상세한 정보가 전부 기록된다. 당안에 한번 적힌 내용을 수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본인은 당안을 열람할 수 없다. 갈등이 발생하면 반드시 당안에 ‘심사 중’이라고 표기되고, 결과적으로 ‘문제가 있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그러니 현명한 태도는 처음부터 닭 같은 선물은 받지 않는 것이다. 더욱 현명한 태도는 닭을 줄 만한 친절한 친구를 처음부터 사귀지 않는 것이다. 혼자서 거민식당이나 직장의 구내식당에 들어가 거민위원회 아주머니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묵묵히 밥을 먹는 것, 이것이 문화혁명 시대의 가장 훌륭한 처세였다. 인정 어린 분위기를 특별히 중시했던 베이징 사람들은 바로 이런 시대를 견뎌야 했다.
*
거민식당은 하루 두 번, 오전 10시 30분과 오후 4시 30분에 식사를 제공했다. 매달 정해진 금액을 선불로 지불해야 했다. 1970년 전후 기준으로 상당히 많은 양의 배급권과 현금 15위안을 내야했는데 결코 저렴한 금액이 아니었다. 먹지 않은 만큼의 금액은 매달 말에 정산해서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환불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거민식당에서 식사한 횟수가 적으면 다른 곳에서 향응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내가 체험한 1970년의 거민식당은 이런 모습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마오쩌둥의 석고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에도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민의 한가운데에 선 마오쩌둥의 찬란한 위용을 그린 포스터, 그때그때 상황에 걸맞은 정치 투쟁 슬로건 따위가 벽에 빙 둘러 붙어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식당에 들어가려면 석고상이나 포스터를 마주보고 아침에는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을, 저녁에는 그날 하루 자신이 한 혁명적 행동을 바로 선 채 보고해야 했다. 식당에 들어가면 벽과 탁자를 커다란 국자로 탕탕 치며 위협하는 거민위원회 아주머니가 《마오쩌둥 어록》을 암송하라고 채근하곤 했다. 아무리 초라한 식사라 하더라도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동지 덕택이다. 또 초라한 음식을 먹을수록 부르주아 계급 타도를 위한 혁명적 행동이기 때문에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러니 절대로 맛있는 음식이 나올 리가 없었다.
식단은 러차이热菜(열을 가해 즉석에서 만드는 음식) 한 가지와 국, 만터우饅頭(찐빵) 한 개였다. 러차이라고 해도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만들지는 않았다. 만들어놓은 것을 몇 번씩 다시 데워 내왔다. 국은 너무 묽어서 그냥 뜨거운 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만터우는 소금 간만 한 퍼석퍼석한 옥수수 만터우였다. 내가 거민식당에서 처음으로 먹어본 음식은 배추와 당면 볶음이었다. 배추는 희고 딱딱한 부분만 들어가 있었고, 당면은 몇 가닥인지 셀 수 있을 지경이었다. 배추만 유통될 때는 배추 요리만 나왔다. 여름에는 시금치와 토마토만 들어간 메뉴가 몇 달씩 이어졌다.
정부 관계자에게 동행해 달라고 부탁해서 거민식당에 여러 번 가보았다. 정부 관계자들은 내게 이런 요구를 했다. 절대 중국인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화려한 복장으로 가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안전하다고 했다. 한눈에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나를 보고 웃음을 건네는 대책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어떤 음식을 먹게 될까 하고 기대에 부풀었는데, 너무나도 맛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그 식당의 요리사가 솜씨가 없어서 그런가 하고 다른 거민식당에도 가보았다. 하지만 어딜 가도 규격품처럼 맛이 똑같았다. 내가 주로 근무하던 중앙문물연구소의 식당에서도 복사한 듯 맛이 똑같은 음식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연구소 식당도 그 지역 거민위원회의 지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밍밍하고 시큼한 맛. 그밖에는 아무 맛도 없었다. 흑초黑貂 맛도 나기는 했지만, 정체 모를 신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당시 널리 쓰이던 유지油脂를 묻힌 저질 코크스 냄새가 배어들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하여튼 빈약하고 허전한 맛이었다. 외국에서는 얼마나 맛있는 중국 요리를 먹고 있는지 가르쳐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가 이랬으니 그 이전에는 얼마나 심했을지 감히 상상이 갔다. 당시 베이징의 거민식당에서 1인분 가격은 어디든 식량권 2근어치(1킬로그램), 즉 2.6자오角 상당이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얼마 뒤 개방경제 노선이 제시되면서 거민식당은 자취를 감췄다. 내가 마지막으로 거민식당에 간 것은 1977년이었는데, 그때는 메뉴의 질이 약간 향상되어 있었다. 채소 볶음과 자장몐炸醬麵이 나왔고 1인분의 가격은 식량권 반 근과 현금 1.5자오였다. 당시의 거민식당 중 몇 군데는 지금까지도 국영 음식점으로 간판을 바꾼 채 영업을 하고 있는데, 서비스의 질이 그 옛날 거민위원회 아주머니 수준 그대로다. 그런데도 고참 공산당원들이 꾸준히 다녀서 손님 숫자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문화혁명 시대에 중국인 전체가 그 방대한 역사에서 손꼽힐 만큼 맛없는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재료는 물론이거니와 조리 기술에서도 형편없이 뒤떨어진 시대였다. 중국 대륙을 뒤덮었던 이 조악한 맛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공산당이 실시한 사회주의 정책이 부른 결과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