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지는 날 그대를 그리워하네
선생님께
지난번 뵌 이후로 어쩐지 ‘꽃 지는 날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어디선가 읽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꽃이 져도, 꽃이 피어도 선생님께서는 특유의 안온한 표정을 잃지 않으실 것만 같아 그런가 봅니다. 세상만사 삼라만상이 무서운 일은 없고 모두 우스운 일뿐이라는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박혀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세상에 무서운 일은 없고, 우스운 일뿐이다. 살아오면서 참되고 바르고 아름다운 기억은 그다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가 물어보면 나는 그냥 즐겁고 행복하다고만 말한다.” 선생님은 엷게 웃으며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냐고 물으셨죠. 그때 선생님의 미소가 깊은 바닷속을 담담히 흐르는 거대한 해류와 같아서 저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 나이 먹고도 인생이라는 바다의 얕은 물에서 발목이나 찰랑거리며 모래나 간질이고 있는 저로서는 결코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심해의 물결 말입니다.
산다는 것의 엄중함이 무엇인지 생각하니 숙연해졌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한참을 되뇌어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역사의 격변기를 직접 보셨고, ‘킹메이커’라 할 만큼 정치판에서도 큰 역할을 하셨고, 커다란 대학의 총장도 역임하셨지요. 그러면서 온갖 사람들이 머리 쓰며 제 이익을 좇는 광경을 무수히 보셨을 텐데, 어떻게 하면 제 이득을 위해 눈에 불을 켠 무서운 사람들을 우습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아주 사소한 불행 하나도 저는 사실 두렵습니다. 이것들을 우스운 일로 여길 수 있는 마음 자세는 과연 어떤 것에 있을까요. 저는 정말 알고 싶습니다. 아직 삼십 대 초반에 앞다투어 찾아온 반갑지 않은 일들, 이런 제 개인의 상처까지도 모두 우스운 일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다 져버린 날,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웃는다면, 웃을 수 있다면
현진에게
현진의 편지를 받고 문득 생각나는 어휘들이 있었어요. “탈출” “탈옥” 같은 말들이었습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이야기 중에 별생각 없이 한 말이 그렇게 날카로운 화두로 되돌아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예사롭게 넘기지 않는 강렬한 문제의식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물론 세상에 엄중하게 “무서운”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에 웃고 지낼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슬프고 두려운 원망의 세계로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그래서 함께 파멸에까지 이르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글재주가 없으니 예라도 들면서 이야기해볼게요.
평소 좋아하던 작가 두 분이 있습니다. 마해송 그리고 박완서 작가예요. 두 분은 세상을 떠나면서 아름다운 글들을 남기셨어요. 대략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주변 모든 사람들 덕택에 즐겁고 행복했다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말씀들 이면에 어떤 사연들이 숨어 있었겠습니까?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몇 해 전 처용 이야기를 써서 외국 잡지에 기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오쟁이 진 처용 이야기Choyong, the story of a cuckold”였어요. 외국 친구들은 대부분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면서도 솔직히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잘 아는 오셀로 이야기였습니다. 오셀로는 신통치 않은 악당이 쳐놓은 신통치 않은 함정에 빠져 엄청난 비극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 ‘함정’은 이아고가 만들어놓은 것입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열한 의심을 품을 수 있는 천격의 인물이 스스로 만든 것이겠습니까? 간통 현장을 목격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 그래서 비록 무속의 세계에서일지라도 벽사진경僻事進慶의 상징이 된 처용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웃는다면, 웃을 수 있다면 주변의 추루함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고결하고 유능한 곳에 있지 않고 누추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감옥은 권력을 놓고 적나라한 각축을 벌이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 회사, 학계, 사적인 친구 사이나 가정 내부에, 사람들이 함께 사는 모든 곳에 스스로 만든 감옥이, 그리고 그 안에 갇혀 무서워하고 무섭게 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때때로 그 감옥에 갇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고요. 웃음이 수인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수 없겠습니까?
(본문 중 일부)